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홍재영 프로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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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10 ㅣ No.1413

[124위 시복 특집] 홍재영 프로타시오(1780~1840년)


“홍재영은 근본이 흉악한 종자로서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해 왔으며, 선교사를 청해 올 때에 힘을 기울였고, 천주교 서적을 베낀 것이 110여 권에 이르며, 수십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숨겨 주었다. 이처럼 죄악이 으뜸이 되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 사형 선고문 중에서 -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의 아들이자, 1866년에 순교한 홍봉주 토마스의 아버지입니다. 어릴 때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장성한 후 교회 활동에 참여하며 신앙공동체를 만들기도 했지만,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배교하고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한동안 신앙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총의 힘으로 다시 신앙을 회복한 그는 이때부터 열심을 배가함으로써 지난날의 잘못을 보속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십자가 앞에 꿇어 기도했으며, 한 주에 금식재를 세 차례 지키며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1832년 유배자들에게 전면적인 사면령이 내리자, 광주관장은 홍재영을 불러 마음을 바로 고쳤느냐고 물었습니다. 홍재영이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관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귀양살이가 30년이 넘었고 이제는 다 늙었는데, 그래도 고집을 부린단 말이냐?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쁘지 않으냐” 이후 여러 날 동안 회유와 위협이 반복되었지만 어떤 수단도 소용이 없었으므로 홍재영은 그 후로도 광주에서 살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홍재영은 순교자들의 뒤를 따름으로써 이전에 잃었던 기회를 다시 찾겠다는 열망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많은 교우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갈 곳 모르는 4명의 여인을 제집에 거두어 돌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6월 14일에 전주에서 온 포교들이 그와 온 가족과 여러 명의 여교우들을 체포했습니다. 첫 번 신문이 끝난 다음 홍재영은 전주로 보내졌습니다. 그가 떠날 때 읍내의 주민들 3~4백 명이 그를 따라오며 말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을 이렇게 벌한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를 붙잡고 슬피 울었습니다. 홍재영은 그들을 위로하며 이 길이 자기에게는 영광의 길이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9월 15일 전주관장은 옥에 갇힌 그를 불러내어 다시 유혹했으나 소용이 없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엄히 금하는 종파의 교인일 뿐 아니라 집에 외국인들을 받아들이기까지 하였으니, 너를 극형에 처한다고 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이에 홍재영이 답했습니다. “국법대로 다스려 주십시오.” 홍재영은 관례에 따라 곤장을 맞고 옥에 갇혀 사형집행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40년 1월 4일, 60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생명수호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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