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부활 3 주일-나해.....2006.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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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04-30 ㅣ No.719

 

부활 제 3 주일 (나해)

             사도 3,13-15.17-19         1요한 2,1-5ㄱ               루카 24,35-48

     2006. 4. 30. 무악재

주제 : 진리를 말한다는 것.....

찬미 예수님!

이제는 봄이 무르익은 때가 되었습니다.  꽃구경을 하기 좋은 때라는 말도 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런 좋은 시절은 우리가 해마다 맞이 합니다만, 나이를 먹기 때문에 늘 같은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말이든지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사람들이 맺는 삶의 열매는 달라집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글자 그대로 늙으면 놀 수 없으니 힘있고 돌아다닐 수 있을때 열심히 놀자’는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나이가 먹은 다음에라도 지금 생각하는 만큼이라도 놀수 있으려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일을 해야지’하는 말로도 알아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삶의 지침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삶의 지침을 간단한 말로 하면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을 복음의 끝에서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을 들으면서 예루살렘을 지명으로 기억하여 이스라엘 땅이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평생동안 예루살렘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가보지 않고 세상삶을 마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에 힘든 일이 한 두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말하고 그것이 우리 삶의 지침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힘든 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가 잘 대하면 현세에서 일확천금을 얻는다고 하면 사람들의 삶이 조금은 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감에는 잡히지 않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부활을 믿지 못했을까 하고 어제 어린이 미사에서 질문했습니다.  아이들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저는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서 수난과 부활을 이야기하셨고 그렇게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그대로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으로 치면 ‘내가 필요할 때만 신앙을 이용하는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고해성사가 참 어렵고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미사 한번 빠졌다고 통속에 들어가서 내 삶을 돌이키기 싫어서라도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고 잘 나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들은 양반입니다.  좀 더 영악한 사람들은 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이용합니다.  ‘한번 안 나오나 두 번 안나오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한번이면 충분하니, 열심히 빠지고 한꺼번에 몰아서 돌이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하느님에게서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 미처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일 것이고, 세상의 삶은 자기 생각대로만 해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는 가정방문을 했는데, ‘내가 성당에 나갈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나갈 테니, 이제는 우리 집에 와서 성당에 나와라.......는 소리좀 하지 말라’고 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습니다.  신앙을 내가 택한 것이니 내 맘대로 하겠다는 자신감 있는 사람의 소리를 전해들으면서 입맛이 몹시 씁쓸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말을 들으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시고 생명의 양식으로 성체를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이 이 말씀을 들으면 뭐라고 하실까요?  혹시 자신은 늘 성실하고 착하게 산 사람이라는 판단을 들을 자신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일입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하느님과 화해하는 고해성사가 힘들고 어렵다고 하면서 그 성사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더구나 그 진리가 일상의 삶을 통해서 쉽사리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려움은 더 할 것입니다.  꽤 많은 기적을 보면서 가까운데서 머물렀을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믿지 못했는데, 하느님을 내가 믿기 시작했고, 내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오류는 그 평가를 말로 한다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몇 차례의 발현을 통해서 당신의 부활을 알렸을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당신에게는 뼈와 살이 있다고 하셨을 것이고, 그 제자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잡수셨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부활이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처럼 뼈와 살이 함께하고, 우리의 오감에 의해서도 느껴질 수 있는 놀라운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넔을 놓고 사는 보통의 마음과 생활자세로는 그 행복에 내가 이르기 힘들 수도 있다는 판단도 해야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다다를 수 있는 올바른 삶은 정직하게 사는 것이라고 요한 사도는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편지에서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은 저마다 다를 수 있어도 우리가 맺어야 할 삶의 결실은 한가지 이어야합니다.  우리의 현실 삶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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