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부활 2 주일.....2006.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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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04-22 ㅣ No.714

부활 제 2 주일 (나해)

              사도 4,32-25    1요한 5,1-6    요한 20,19-31

      2006. 4. 23. 무악재, (2000년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제정한 하느님 자비주일)

주제 : 믿음이라는 것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산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런 말을 여러분들에게 여러 차례 한 일이 있고, 오늘도 그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말을 여러번 한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가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받는 영향은 어떤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게서 받는 영향은 어떤 것인지를 구별하지는 않기 때문에 사람이 실제로 변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두가지를 구별하지 않고 어느 정도 살다가 내 삶을 돌이켜보니, 내가 이러저러하게 ‘변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2006년 부활대축일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나서 한 주간씩 더해가는 그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오늘 부활 두 번째 주일 복음에는, 말그대로 스승으로 모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전합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듣고 묵상하는 내용입니다만,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지 않았던 탓으로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믿지 못했던 토마스 사도의 말을 통해서 신앙인의 본질에 해당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묵상하며 지냈으면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바로 그 모습을 보았던 다른 사도들이 토마스 사도보다 믿음이 강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말이나 행동으포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신앙인들에게서 ‘힘겨운 내 삶을 모른척 하시는 하느님이 정말로 계신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듣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자신에게도 한때 믿음이 있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서 그 믿음이 도망치고 사라졌다는 것을 큰소리치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왔다가 도망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큰소리쳤던 토마스 사도였지만, 한 주간이 지난 후, 다시 이루어진 예수님의 발현에서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지도 않고, 그분의 옆구리에 주먹을 넣지 않았으면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한 주간 전에 했던 자신이 했던 말을 잊어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 앞에 쳐다보면서도 그렇게 말한다면 외람될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실제로 믿음은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같은 믿음으로 시작된 그 내용이 개신교 신자들은 서로를 자기 교회로 이끌고 돌아오게하는 원동력이 되는데에 비해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그 말을 수차례 반복해 들으면서도 믿음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대하고 행동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믿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 하는 것으로 끝내는 일이라면 성인(聖人)이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고, 행동이 말과 일치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면 다른 사람에게서 탓을 들어가면서 삶을 힘겹게 살거나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과 달리 나타나는 법입니다.  내가 드러내는 올바른 행동만이 다른 사람들을 내가 가진 믿음으로 이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모양으로 드러나야 하겠습니까?  제가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하는 것이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오늘의 독서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진정으로 남을 생각하며 사는 일은 나눔에 있다는 말로 해석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나더러 가난하게 살라고 말하고 나더러 힘들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부익부 빈익빈, 부의 양극화 문제’는 요즘 정부가 추진하는 방법처럼, 많이 벌어들인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서 적게 벌어들인 사람들을 위해서 쓰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의 편중 문제는 ‘내가 벌어들인 것을 다른 사람과 얼마나 나눌 수 있느냐’하는 자발적인 실천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애써 벌어들인 재산을 나누는 방법이 억지로 하는 성격을 띤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반발할 것입니다.  내가 피땀 흘려 번 것을 왜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자신만 생각하는 생각과 자세 때문에 왜곡된 길로 간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을 설명하는 모습인 자본주의나 시장경제도 사람들의 삶을 해석하는 완벽한 이론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나 시장경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자꾸만 더 큰 욕심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신앙인으로 머물고자 한다면, 가능한한 욕심은 다룰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사람들이 욕심이라고는 없던 사람들이라서, 자기들이 가졌던 것을 모두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사는 똑똑한 사람들은 내가 먹을 것은 따로 갈무리해놓고, 내게 여유있고 남는 것을 다른 이에게 주면서도 각자가 갖는 마음은 내 모든 것을 다 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시간을 봉헌하는지 뻔히 계산할 수 있는데도, 그 시간을 뻥튀기해서 하느님에게서 더 많은 축복을 받을 준비만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식적인 것이 되었든, 무의식적인 것이 되었은 우리가 미루고 늦춘 일들이 만들어낸 수확에 대한 것들은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합당한 삶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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