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주님의 수난 성 금요일.....2006.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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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04-14 ㅣ No.710

 

주님의 수난 성금요일        

             이사 52,13-53,12   히브리 4,14-16; 5,7-9     요한 18,1-19,42

     2006. 4. 14. 무악재

주제 : 죽음이란?

지금 이 순간은 약 2천년 전, 제자들과 함께 사셨던 몸,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땅을 동으로 서로 그리고 남과 북으로 바쁘게 움직이셨을 예수님께서 이제 움직이시는 것을 멈추고, 예루살렘 도성 가까운 곳, ‘해골터’ 어딘가, 새로 만든 무덤 어느 곳엔가에 몸을 뉘고 쉬고 계신 시간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람이라면 많은 경우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병을 앓는 사람이라고 해도 ‘죽어서 병에서 해방’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더 한 순간이라도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그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수난을 기억하는 이 시간에는 죽음에 관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사명을 다하고, 영혼이 육신에서 떠나는 일, 즉 죽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삶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거나, 이것도 저것도 판단하지 못할 사람을 빼고서는 제가 드린 질문에 말 그대로 기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기는 요한복음사가의 기록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들은 것과 같은 수난기이면서도 읽고 듣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다릅니다.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예수님의 수난과정을 전하는 요한복음사가의 수난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훨씬 더 편하고 부드럽습니다.  마치도 죽음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당신을 고발한 사람들이나, 빌라도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으시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다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고, 그들이 가졌음직한 잘못된 생각과 자세를 바꾸어주시는 분이 또한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말씀 몇마디로 바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어야 사람으로 몰고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삶에서 말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그런 노력들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실패했듯이 말입니다.  그럴 때 신앙이나 하느님의 뜻을 말하는 우리의 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험악해졌다는 것을 이용하여, 그 그늘에서 마음을 바꾸지 않고 적당히 숨어살아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입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삶에 다가올 때, 예고하고 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 죽음이 내 삶에 언제 다가올지 알지 못하면서 삽니다.  좀 더 깨어 있는 사람, 자신의 삶을 좀 더 잘 돌이키는 사람이라면, 아직 다가오지 않은 죽음에 대해서도 준비하는 자세로 살겠지만, 그것 역시도 다른 사람의 설명으로 내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큰소리로 주장했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뜻대로 죽으셨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부활하신 분이 살아계실 때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을 기억하며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국가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가졌던 민족적 자신감, 그들의 정체성만큼은 남과 비교해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특징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잘못된 신념, 하느님은 언제나 내 편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양이 어떤 결과를 맺겠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 오늘 기억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과 일들이 겹쳐서 예수님은 세상의 삶을 마치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며, 지금은 편안히 쉬고 계실 거라고 우리가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구리가 멀리 뛰기 위해서는 다리를 잔뜩 오므리는 시간이 있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이 수난과 죽음은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의 희망을 갖고 살게 하기 위해서는 거칠 수밖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알면서도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는 것은, 예수님을 죽게 했던 십자가가 이제는 더 이상 죽음을 가져오는 도구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기가 필요할 때는 기도하고 다른 사람이나 도구를 이용하면서도, 그 필요를 채우고 나면, 딴 마음을 갖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현명하고 재주있고 칭찬받을 수 있는 삶의 모습일 수는 있어도,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난다면 그 판단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죽음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되새긴다고 해서, 사람인 우리에게 언젠가는 닥쳐온다고 말할 죽음이 우리를 피해서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갖는 생각과 자세가 다르다면, 훗날 언젠가 같은 일을 겪더라도 그 태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이면 될 것입니다.


인류구원이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어쨌든 죽음은 슬픈 것입니다.  잠시 후,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죽음의 도구였던 십자가를 새롭게 대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도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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