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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4: 경향신문 폐간, 정간, 복간 고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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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113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4) 경향신문 폐간ㆍ정간ㆍ복간 고난 여정


이승만 정부, 독재 비판지에 '재갈'

 

 

- 1959년 4월 30일 정부로부터 '폐간' 통고를 받은 직후 경향신문 편집국에는 무거운 침묵과 함께 비탄이 흐르고 있다. 사진출처=「경향신문50년사」

 

 

1959년 4월 30일 밤 10시 50분께 서울 소공동 경향신문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이승만 정부가 이날 천주교 서울교구 유지재단이 운영하던 경향신문에 전격 '폐간'을 통고한 것. 이로써 1946년 10월 6일 광복 뒤 서울에서 창간된 첫 종합일간지 경향신문은 지령 4325호로 발행 중단이라는 큰 시련을 겪는다.

 

해방 이듬해 서울대교구장 노기남(1902~84) 대주교와 윤형중(1903~79)ㆍ양기섭(1905~82) 신부가 주역이 돼 창간한 경향신문 발행 중단은 해방 이후 최대 언론탄압 사건으로, 이날 이후 1년간에 걸쳐 한국언론사에 길이 남을 법정투쟁이 이어진다.

 

당시 잇따른 국내외 비난과 법원 판결에 직면한 이승만 정부는 경향 폐간 조치를 '무기한 발행정지처분'으로 바꿔 발행을 막았다. 물론 4ㆍ19 혁명 이후 대법원 결정에 따라 361일 만에 속간됐지만, 2년 뒤 1963년 경영권이 이준구씨에게로 넘어가며 경향신문은 천주교회의 손을 떠난다. 15년 영욕의 세월이었다.

 

 

자유 언론 '말문은 닫히고'

 

당시 국내 최대 발행부수 20만 부를 자랑하던 경향신문 발행이 멈춰지던 급박한 정황을 「경향신문50년사」는 이렇게 전한다.

 

"…(요양차 진해에 체재 중인 이기붕씨를 만나기 위해) 진해로 떠난 한창우(베네딕토, 1910~78) 사장이 대전역에 도착할 시간, 공보실 직원과 서울시경 형사대는 '공보 제1172호'로 된 발행허가 취소 통고서를 휴대하고 내사, 즉시 윤전기를 멈추게 했다. 또 형사대는 모든 차량 운행을 정지시키고, 차량에 내건 사기(社旗)도 철거했다. 통고서가 도착하기 전에 인쇄돼 일부 지방에 배포된 5월 2일자 조간도 현지 경찰에 의해 대부분 회수됐다."

 

경향 폐간의 법률적 근거는 미 육군 소장 아치 L 러치가 군정 당시 공포한 미군정 법령 제88호 위반이었다. 당시 전성천 공보실장은 △ 단기 4292년(1959년) 1월 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 제하 사설 △ 2월 4일자 페르디난드 허멘스 미 노틀담대 교수의 논문 '다수의 폭정'을 인용한 '여적'란 △ 2월 16일자 '사단장은 기름 팔아먹고' 기사 △ 4월 3일자 '간첩 하(河)모씨 체포' 보도시점 제한(엠바고) 원칙 파기 △ 4월 15일자 이 대통령 기자회견 내용 보도 등을 들며 정부 비난과 허위보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빌미로 삼았다.

 

이에 대해 폐간 당시 외유 중이던 노기남 대주교는 5일 만인 5월 4일 박희봉(1924~88, 서울대교구 재정 담당) 신부가 대신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공보실 담화를 반박했다.

 

또 당시 사법부 양심으로 꼽히던 김병로(1888~1964) 전 대법원장도 동아일보 5월 2ㆍ3일자 논단을 통해 "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한 것은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된 조치로, 당국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 2008년으로 창간 62돌을 맞은 현재 서울 중구 정동에 자리한 '경향신문' 사옥. 전대식 기자.

 

 

민주언론 '경향'은 왜 필화를 입었나

 

당시 경향신문 폐간 조치는 1950년대 정치상황과 깊숙이 맞물려 있다. 정부수립 당시만 해도 신탁 반대와 남한 만의 총선거 지지로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경향신문은 6ㆍ25전쟁 이후 1958년 2ㆍ4국가보안법 개악 파동과 지방자치단체장 임명제 시행 등에 따른 자유당 독재 비판에 앞장서며 정부와 관계가 틀어진다. 노 대주교를 '야당 대주교' '정치 주교'라고 비난한 것도 자유당 정권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천주교회의 입장은 철저히 중립에 놓여 있었다. 그 입장은 1957년 9월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주교회의가 발표한 성명을 통해 드러나 있다.

 

"…아무쪼록 선거법을 엄수하며 끝까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하기를 권한다. 선거에의 참여는 국민으로서 정당한 의무이며 권리다. 교회로서는 어느 모로든지 이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부는 대정부 비판에 앞장선 경향신문에 대해 1959년 2월 한국 언론사상 첫 압수수색, '여적'란 필자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 편집국장 연행 및 기자 구속을 거쳐 폐간을 통고하기에 이른다. 물론 폐간에 앞서 정부측과 세 차례 물밑 대화도 이뤄졌다.

 

당시 정부측은 발행인 교체와 사과 등을 요구, 신문사측은 발행인을 한창우 2대 사장에서 김철규(1918~90, 서울대교구) 신부로 바꾸는 '정기간행물 허가사항 변경신청서'를 공보실에 제출하고 주요 간부 인사이동도 단행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발행인 변경 신청서를 아무 말없이 반송하고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경향' 발행중단 그 파장은

 

경향신문 발행 중단 사태는 국내외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신문편집회와 민주당, 변호사협회, 미 국무성 등은 경향신문 발행허가 취소 처분이 언론 자유 침해라며 그 취소를 요구한다.

 

또 그해 6월 13일에는 언론 자유 수호 국민대회가 열려 경향신문을 폐간한 정부 처사를 규탄하고, 미 군정법령 88호의 무효를 결의한다. 1996년 1월에 기밀 해제된 한ㆍ미 외교문서에 따르면, 4ㆍ19 혁명 이후 미 국무성은 '경향신문 복간'을 5대 시국 수습책의 하나로 강력히 요구했을 정도다.

 

이 같은 경향신문 폐간조치에 교회는 어떻게 생각하고 대응했을까. 이는 노 대주교의 성명서에 그 방향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요지는 두 가지다. △ 경향신문 논조가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위배했거나 또 종교와 정치를 혼동해 무절제한 정부 비난을 계속해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 1959년 3월 2일 노 대주교와 전 공보실장 간 서면공약을 통해 약속한 경향신문 발행인 교체 및 편집 진용 개편을 하나도 어긴 바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경향신문은 곧바로 서울고등법원에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함과 동시에 전 공보실장을 상대로 행정처분 집행 정지 가처분신청을 내고 지리한 소송에 들어간다. 윤전기가 멎은 지 57일 만에 서울고법에서 경향신문의 행정처분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폐간 뒤 단 하루 속간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정부측은 '발행 허가 취소'조치를 '발행허가 정지'로 바꿔 통보한다. 법원의 가처분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7시간 만의 조치였다.

 

1년간 법정 공방 끝에 1960년 4월 20일 대법원은 대법관 만장일치로 경향신문에 대한 정간 처분 효력을 정지한다. 이에 따라 4월 27일 지령 4327호로 1년 만에 속간, 30만 부 발행이라는 괄목한 만한 성장과 함께 '이승만 전 대통령 망명' 특종을 이뤄낸다.

 

5ㆍ16 군사쿠데타와 함께 윤형중 신부가 3대 사장으로 부임해 경영 쇄신과 기반 구축에 힘썼으나 7개월 만에 물러난다. 1963년 5월 23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이준구 사장이 경향신문 인수를 마무리함으로써 교회와 경향신문은 완전히 분리된다.

 

 

올해로 창간 62주년 맞는 경향신문이 걸어온 길

 

경향신문의 뿌리는 1906년 10월 19일 대한제국시대 때 발간된 주간 경향신문이다. 초대 사장 양기섭 신부는 드망즈(1871~1938, 1911년 초대 대구대목구장 주교) 신부가 서울 종현(현 명동)성당에서 창간한 타블로이드판 4면 순한글 신문인 주간 경향신문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뜻에서 '경향신문' 제호를 계승했다.

 

미 군정 당시 위조지폐 사건으로 유명한 서울 소공동 조선정판사 건물을 미 군정측에서 인수, 개조해 신문사를 운영했다. '새로운 시대 계몽보도기관'을 자부하며 진실 보도를 방침으로 삼은 천주교회 매체는 이렇게 태어났다.

 

창간 당시 발행부수는 3만 부였으며 전쟁 중 잠시 휴간했다가 1950년 11월 평양에서 '전선판'과 '서북판'을 발행했다. 종군기자 1호인 박성환 기자를 배출했고, 1951년 1ㆍ4후퇴 때는 대구서 '이동전시판'을 발행했으며, 또 그해 부산에서는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속간했다.

 

1952년 '발췌 개헌안'에 대해 비판적 보도를 했다가 우익 폭력단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1954년에는 우리나라 언론사상 첫 축쇄판을 발행했고, 1958년 12월에는 조ㆍ석간 8면을 발행했다. 1959년 자유당 체제가 굳어지자 반독재 노선을 분명히 했고 그해 정부로부터 폐간을 당했다. 4ㆍ19 혁명 이후 속간했고, 경영권이 이준구 사장에게 넘어가면서 교회의 손을 떠났다.

 

그 뒤 기아산업, 신진자동차, 한화그룹 등으로 경영권이 넘어갔다가 지금은 사원 전체 회사 주식 보유율이 96%에 이르는 '독립 언론'이다. 현재 대표이사는 고영재(60)씨가 맡고 있고, 본사는 서울시 중구 정동 22번지에 있다.

 

[평화신문, 2008년 3월 30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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