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33-37: 극동(極東, The Far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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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101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33) 『극동(極東, The Far East)』 I

 

 

전남감목대리구(1934년)뿐만 아니라 춘천감목대리구(1939년)가 설립될 당시, 한국인 사제의 부족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사목이 위탁되었다. 척박한 강원도 땅에 파견된 푸른 눈의 선교사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그 출신지(아일랜드, 호주, 미국)에 따라 자신들의 사목활동의 성과와 경험한 것들을 글로 써서 보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 발간한 잡지가 『극동(極東, The Far East)』이다.

 

몇 주간 『극동』에 실린 글을 연재하며 외국 선교사들에 비친 우리 교구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한다. 제3자의 위치에서 우리 문화와 종교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접하는 일은 재미있고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조선인들의 성품이라는 기사는 “현대의 조선인들은 모이기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이 살던 옛날 유대의 사람들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조선인은 유대인들의 특징인 장사꾼 기질도 없었고, 그들을 그토록 비열하게 만들었던 교활함도 없었고, 그들을 그렇게 멸시받게 만든 위선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요컨대 조선인은 소박한 심성에 선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고, 그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조선인은 또한 극도의 붙임성이 있다. 아마도 이 점이 조선인들이 항상 마을에서 사는 이유일 것이다. 외딴집이란 것은 이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 외국 선교사들은 어떻게 선교 활동을 하였을까?

 

1942년 12월호에 실린 조선 춘천지국장 구인란 토마스 몬시뇰이 보낸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39년 이른 봄에 메이누스(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본부가 있는 지방 이름) 선교회는 교황청으로부터 조선의 두 번째 선교 구역을 관할하라는 명을 받았다. 현재 춘천지목구로 알려진 그 지역은 동부 해안선을 따라 위치해 있는 일만 평방마일의 지역이다. 3명의 우리 신부들이 즉시 그 새 선교지역에 임명되어 토마스 퀴란 신부(현재는 몬시뇰) 휘하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같은 해 가을 무렵에는 11명의 신부들이 더 임명되어 총 14명의 메이누스 선교회 신부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2019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34) 『극동(極東, The Far East)』 II

 

 

한창 반일감정으로 두 이웃나라의 관계가 안 좋은 때에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최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배기현 주교는 “성실하게 과거를 마주하고 당사자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협의회의 초대에 형제적 사랑으로 연대한다.”고 말하면서 “한일관계가 새로운 질서에 부응하는 올바른 길, 진리와 자유, 정의와 사랑의 길을 다시 찾아야 한다.” 고 했다. 아울러 “이를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 전제 조건은 참회와 정화” 라고 밝혔다. 참회와 정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웃한 두 나라가 평화를 이루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1939년 춘천지목구가 설립되었을 때의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으로 온 국민이 신음하던 때였다. 1946년 12월에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후 구 몬시뇰이 보낸 보고서에 일제의 강점 때의 어려운 점을 이렇게 시사하고 있다.

 

“전시 기간(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새 선교사업은 힘든 시간이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했고, 비밀리에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해온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에서 서양인들이 하는 활동을 엄중히 경계하였다. 1941년 일본은 전쟁에 참전했고, 그와 함께 외국인 선교사들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춘천에 있던 14명의 선교사들은 구금되었고, 6개월 후에 그들 중 4명은 적성국 국민으로서 그들의 본국인 호주, 뉴질랜드,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홍천에 구금되어 있던 길 헨리(Henry Gillen) 신부는 해방을 열흘 정도 앞두고 1945년 8월 6일 이질로 사망하여 현재 홍천 본당 공원묘지에 모셔져 있다. 7명의 조선인 신부들이 남아서 구역에 있는 일만 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사목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교회에 대한 일본 당국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외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답보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 신부들은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조선은 러시아와 미국에 의해 임의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위도 38선을 경계로 남부지역은 미국이, 북부지역은 러시아가 점령하게 되었다. 구 몬시뇰의 지목구 상당 지역이 러시아의 점령지역 내에 있었는데(이천, 평강, 양양 본당을 포함한 북강원도 지역) 우리 신부들은 아직까지 한 명도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가받지 못하고 있다.” [2019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35) 『극동(極東, The Far East)』 III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허 프란치스코(Francis Herlihy) 신부는 잠시 죽림동에서 머물다가 홍천에서 보좌로 활동하였다. 그가 처음 춘천에 와서 본 경관과 사제들이 지냈던 사제관에 대해서 이야기 한 내용이 『극동』 1947년 8월호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선교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생활로 사목에 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몬시뇰께서(구 몬시뇰) 오두막에 있는 방을 하나 내게 내주셨는데, 전날 밤늦은 시간에 나를 데리고 갔던 언덕을 올라 방으로 안내하셨다. 바깥벽을 따라 높이가 2피트(약 0.6미터) 되는 좁은 툇마루가 있었는데 몬시뇰께서 그 위로 올라가 미닫이를 여셨다. 몸을 굽혀서 방에 들어갔는데, 방 안에는 침대 하나,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양철 대야 한 개, 그리고 서랍장 하나가 있을 뿐이었으며, 맨손 체조를 할 정도의 공간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출입하는 방문은 동시에 창문 역할도 했다. 바깥쪽 나무 문짝 대신 흰 종이나 면포를 바른 안쪽 미닫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몬시뇰께선 어디서 주무시는지 여쭤보자, 몬시뇰은 옆방을 가리키셨다. 날이 밝아 살펴보니 몬시뇰이 그 방에서 책상에 앉아 계셨는데, 그 방은 의자 두 개와 책장 하나를 들여놓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여기서 주무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아, 그럼요, 자주 여기서 잠도 자지요.’ 몬시뇰이 대답하였다. ‘아니, 그냥 바닥에서요? 세상에, 제게 주신 방이 몬시뇰님의 방인 줄 몰랐습니다.’ 퀸란 몬시뇰은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쿡쿡 웃으셨다. 몬시뇰께서 나를 안심시키려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쪽 구석에서 아주 편하게 잔 적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추운 날 밤에는 한국 방바닥보다 훨씬 못한 곳들이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허 프란치스코 신부는 스스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가옥들은 외관상 별로 볼 것이 없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들은 가장 단순한 자재로 매우 적절한 거처를 용케도 만들어 낸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이렇게 보고를 마무리하고 있다. “한국의 겨울은 굉장히 춥다.” 추위를 구들의 온기로 녹이면서도 강원도의 선교를 위해 헌신한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기도로 전한다. [2019년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36) 『극동(極東, The Far East)』 IV –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기록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공산화 과정에서 동료 선교사들이 사목지를 떠나지 않고 순교한 사실을 기억하며 한국 땅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선배 선교사들의 영향은 한국에서도 드러났는데, 한국전쟁 중에 본당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가 순교한 7분(광주대교구 3분 포함)의 사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모범은 광주 민주화 운동 때까지도 이어져 고통 받는 양들과 함께 하는 선교사제들의 훌륭한 삶으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극동』 1951년 1월호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첫 순교자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춘천 소양로 성당의 첫 주임이었던 고 안토니오(Anthony Collier) 사제의 순교에 대한 기사였다. 자세한 설명이 가능했던 것은 고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총격을 받았으나 고 신부의 살신성인의 행동으로 살아난 김경호 가브리엘이 그 상황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한국 지부장 지 벨라도 신부가 선교회 총장에게 고 안토니오 사제의 선종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을 옮겨 본다.

 

“신자들은 고 신부님이 사목활동을 하며 보여주셨던 보살핌과 사려 깊음, 그리고 본당과 선교 거점에 매일 정확한 시간에 오셨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신부님은 올해 성당을 지을 계획으로, 이미 자재를 모으고 계셨고 성당 부지를 점찍어 두셨습니다. 저는 그곳에 최종적으로 고 신부님을 모실 생각입니다. 신부님이 새로이 시작한 본당의 신자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부님께서 바라셨을 것이라 확신합니다.”(현재 고 안토니오 신부는 소양로 성당이 아닌 죽림동 성당 성직자 묘역에 모셔져 있다.)

 

춘천교구는 전쟁의 상흔이 많이 묻어있는 춘천에 평화와 사랑의 순례길을 조성하였다. 고 안토니오 신부의 사목지인 소양로 성당에서 출발하여 그분이 순교한 장소인 낙원문화공원, 그리고 그분이 잠들어 계시는 죽림동 순교성지에 이르는 ‘평화의 길’, 그리고 천주교 신앙의 본질인 사랑의 선포지였던 죽림동 성당과 그 사랑의 구체적 실천 장소였던 성 골롬반 의원을 지나 춘천교구 신앙 교육과 행정의 요람인 옛 교육원과 주교관, 영서지역 신앙의 씨앗이 싹텄던 곰실공소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길’이 그것이다. 이 길을 걷는 모든 이가, 역사의 아픈 흔적을 치유하면서 참된 평화를 만들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도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춘천교구의 평화와 사랑의 순례길’에 대해서는 교구 홈페이지(www.cccatholic.or.kr)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2019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37) 『극동(極東, The Far East)』 V

 

 

『극동』 1947년 8월호에는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건축에 대한 구 토마스 몬시뇰의 편지가 실려 있다. 구 몬시뇰은 이 편지에서 성당 건축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강원도 현실에 맞는 사목에 대한 계획도 이야기 하고 있다.

 

“나는 이곳 도청소재지에 대성당을 짓는 일에 착수하려 합니다. 자재를 구하기가 어렵고 또 값도 비싸지만, 시멘트를 구할 수만 있다면 미국에서 지붕 자재가 오기를 일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한 지역에서 우연히 화강암 강(江)도 발견했는데, 길이 험하긴 해도 트럭이 다닐 만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행사로 풍수원에 다녀올 예정인데, 돌아오면 외투를 벗고 작업에 착수하려 합니다. 우리 선교원 부지에 인접한 곳에 이미 작은 땅을 구해놓았는데, 미군 대령이 친절하게도 전체 부지를 고르게 하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불도저 두 대와 군인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군인들은 매일 돈도 받지 않은 채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업이 끝나면 부지가 근사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성당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앞으로 몇 년은 사용할 만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지어진 죽림동 성당은 완공을 앞두고 전쟁의 폭격으로 허물어져 버렸다. 지금의 죽림동 성당은 전쟁 후에 다시 재건한 성당으로 70년 가까이 우리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이곳에서 많은 형태의 교구 전례와 교구 사제들의 서품식이 거행되었다.

 

구 몬시뇰은 1938년 이래로 춘천에 머무르면서 일만 이천 명의 신자들의 사목에 헌신하였다. 그는 신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 대부분은 백여 년 전에 있었던 피로 물든 박해의 와중에 서울과 조선의 다른 도시들에서 피난을 온 순교자들의 후손들이다. 그 지역은 산악지대이고 신자들은 가난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오늘날에도 순교한 선조들의 시련과 투혼을 이야기하길 즐긴다. 이 지목구에 적당한 성당과 학교를 마련하는 일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 이전에 조선의 상황 때문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었고 앞으로도 그런 종류의 일이 산적해 있다.”

 

강원도 복음화를 위한 교두보인 본당 설립과 우리 민족을 위한 교육 시설 마련이라는 사목적 목표는 골롬반 선교회 사제들에 의해 90년대까지 이어져갔다. 학교 운영을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한 부분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2019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 · 군인 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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