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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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25: 영동지구의 본당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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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094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25) 영동지구의 본당 분할

 

 

전라도 · 충청도 · 경기도 지방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영동지방으로 넘어와서 토기업으로 생계를 이으며 신자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시초를 이루었던 강릉지역의 첫 본당은, 1921년 7월 서품된 원산 본당 소속 이철연 방지거 신부가 강릉군 구정면 금광리(현 금광리 공소 위치, 당시 명칭은 영동 교회)에 머물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영동 교회는 사목과 전교의 활성화를 위하여 1923년 6월, 주문진인 강릉군 신리면 교항리 133번지에 10칸 상당의 가옥을 신축하여 본당을 이전하였다. 화재를 겪어 1934년 강릉으로 본당 소재지를 이전하면서 강릉 본당이라 부르다가 1974년에 임당동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임당동 본당의 주보는 ‘성 골롬바노’이다.

 

임당동 본당이 자리잡고 있는 강릉은 천혜의 수려한 자연과 유서 깊고 전통을 자랑하는 영동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하시랑, 하슬라(何瑟羅)라고도 불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바대로 ‘강릉인들의 솔직성, 열성, 물욕이 없고 예의 바름’이 천주교 신앙과 일치하여 일찍이 신앙의 싹이 정착되었던 것이다. 춘천교구 설립 이전부터 강원도 영동 지역 복음화의 중추였던 강릉 본당은 1939년 4월 25일 김학용 신부 재임 시 춘천교구로 편입되었다. 이후 1948년 묵호, 1973년 옥천동, 1987년 노암동, 1994년 옥계, 1996년 초당, 2008년 입암 본당을 분가하며 강릉 지역의 모본당이 되었다. 평창군 일대의 세 본당은 평창본당에서 분가한 1968년 진부, 1996년 대관령, 2014년 봉평본당이 있다.

 

영동의 신앙 공동체는 본당 설립 이후부터 지역사회와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1946년에는 불우 청소년을 위한 야간 중등학교 과정인 성심공민학교를 설립하고 그 후 성심중학교로 개칭하여 10년간 운영하였다.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던 시기에 무보수로 봉사한 교사들의 사랑과 헌신으로 42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당국의 인가를 받지 못하여 1957년 2월 자진 폐교하였다. 묵호지역에는 남호고등공민학교가 있었으며 양재학원을 운영하여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여성의 자립교육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또한 1967년 3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소화 유치원’을 개원하여 취학 전 아이들의 전인교육을 위해 봉사하였다. 소화 유치원은 현재까지도 교우 자녀들뿐만 아니라 비신자 자녀들에게도 신앙의 싹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며 신뢰받는 가톨릭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1964년에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에 의해 갈바리 의원이 설립되어 지역의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의료 활동을 시작하였고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현재 임당동 성당 옆 건물에는 강릉을 찾는 순례객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영동지역의 교회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영동지역 가톨릭 역사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2019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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