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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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13: 사제를 도와 교회에 봉사한 이들 – 공소 회장 엄주언 말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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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084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13) 사제를 도와 교회에 봉사한 이들 – 공소 회장 엄주언 말딩

 

 

엄주언 말딩은 1872년 춘천시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명석하고 심성이 착하여 언제나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한문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열아홉 살이 되던 1891년, 그는 자기 집 건넛방에 세 들어 사는 체 장수의 권유로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세상 부모도 공경 못 하면 불효의 죄를 짓는 것인데,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으신, 부모보다 더 높으신 천주님을 모르고 미신을 섬기며 살아왔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라는 깨달음의 탄식을 하면서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한국 천주교의 요람인 경기도 광주에서 3년 동안 머물던 1896년에 온 가족이 영세를 받은 후 고향에 돌아와 천주학쟁이라는 냉대 속에 고은리 윗너부랭이의 폐가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신앙의 터전은 훗날 한 해에 40-50명씩 영세를 받는 신앙 공동체가 되었고, 1920년에는 공소를 건립하기에 이른다. 엄주언 말딩은 초대 신부를 모시기 위해 풍수원과 서울의 명동성당을 수차례 왕래하였고, 마침내 초대 김유룡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현 죽림동으로 본당을 이전한 후에도 그는 실천이 몸에 밴 신앙인의 모범으로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회두시키고 전교했으며 그런 그의 헌신적인 희생과 노력은 교회 발전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하느님 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올곧은 신앙을 보여 준 엄주언 말딩은 1955년 4월 30일 83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5월 4일 고은리 천주교회 신자 일동 이름으로 쓰여진 고별사 내용 중 일부이다. “우리 敎友(교우) 一同(일동)은 恭敬(공경)하올 우리 會長任(회장님)의 至大(지대)하신 德望(덕망)과 功績(공적)을 推想(추상)하면서 感激(감격)에 넘치는 한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生存時(생존시)를 回顧(회고)하옵고 삼가 告別辭(고별사)를 올리나이다.” 그가 얼마나 살아생전 신앙인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99년 4월 24일, 엄주언 말딩의 딸인 엄 루시아가 기증한 죽림동성당 인근의 토지에 교구 설정 60주년을 기념하여 ‘말딩회관’이라고 명명된 건물이 봉헌되었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 큰 역할을 했던 회장이라는 직분은 해방 후 점차 사라져 갔다. 그 후 회장제도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에 도입된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사목협의회 등의 제도와 조화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도 예전의 회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이 생겨,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의 역할이 균형을 이루는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으로 가꾸어져 가길 기대해 본다.

 

[2019년 4월 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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