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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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12: 사제를 도와 교회에 봉사한 이들 – 전교 회장 김기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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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083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12) 사제를 도와 교회에 봉사한 이들 – 전교 회장 김기호 요한*

 

 

전교 활동을 담당한 전교 회장 제도는 박해라는 초기 한국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의해 생겨난 고유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박해로 인해 산간벽지에 공소가 생기고 신자가 많아졌지만 사제는 부족하였기에, 이를 대리할 평신도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교 회장은 신덕(信德)과 교리 지식을 겸비한 인물로 주교나 신부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신자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본당 신부를 보좌하고 본당 신자와의 중간 역할을 담당했다. 대표적 전교 회장으로 19세기 강원도와 여러 지역을 사목자와 함께 혹은 홀로 순회하며 활동했던 김기호(金起浩) 요한 회장과 특별히 강원도 춘천지역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엄주언(嚴柱彦) 말딩 회장, 그리고 20세기에 강원도 각 지역의 복음화를 일구어 낸 회장(갈말의 홍수명 타대오, 서석의 연규필 안드레아, 행정의 김세중 라파엘, 홍천과 춘천의 여회장 임숙녀 보나와 김진해 마리아 등)들이 있었다.

 

김기호 요한은 1824년 황해도 수안군 무송동에서 출생하였다. 1856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깊은 신앙심으로 전교활동에 헌신하다가 1903년 경기도 하우현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깊은 신앙심은 그로 하여금 아브라함처럼 정든 고향을 떠나, 바오로 사도와 같이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게 했다. 그는 굶주림과 추위와 싸우며 산야(山野)를 넘나들며 열정적으로 주님을 증거한 길 위의 사도였다. 김기호 요한는 1866년 병인박해 뒤 10년간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은밀하게 금강산을 비롯한 강원도 영동 지역의 공소를 다니며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1876년에는 조선에 입국한 블랑(백) 신부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전교활동을 하며 성서번역을 시작하였는데, 블랑 주교 선종 후에 그 번역을 완성하였다. 은퇴하여 청계산 기슭 하우현에 머물며 기도생활을 하고 지내던 때에도 공소였던 하우현에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성당에서 자주 성사를 보면서 죽음을 준비하였고, 1903년 12월 28일 하느님 품에 안겨 영세 때 받은 묵주와 함께 묻혔다.

 

* 김기호 요한은 춘천교구 김운회 루카 주교의 고조부이다. 19세기 강원도의 ‘길 위의 사도’였던 그는 21세기에 그의 후손이 이 지역을 영적으로 사목하는 교회 지도자가 될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듯 수많은 발걸음으로 강원도 전교에 힘썼던 것 같다.

 

[2019년 4월 7일 사순 제5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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