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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항상 새로운 기억 희망을 주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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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7 ㅣ No.629

[기억, 아남네시스] 항상 새로운 기억 희망을 주는 기억



“여러분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지키는 분들입니다. 지키는 것은 특별히 주교에게 맡겨진 임무의 하나로, 곧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형제 주교 여러분과 함께 이 나라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지키는 임무의 두 가지 중심 측면을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 그리고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연설은 ‘기억의 지킴’과 ‘희망의 지킴’이라는 개념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연설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그 대상이 주교님들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볼 것을 위탁하신 주교직무 수행의 핵심적 활동이 기억의 지킴과 희망의 지킴이라는 것이다.

둘째, 이 연설에서 ‘기억의 지킴’이라는 측면에서 교황께서 특별히 전제하고 계신 것은 한국교회의 신앙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하느님의 말씀과의 직접적 만남, 자발적인 신앙실천, 순교의 정신이며, 희망의 지킴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과 ‘희망’의 그리스도교적 고유 의미

그런데 교황님의 이 메시지는 이와 같은 표면적 특징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의미를 담고 있다. ‘기억’과 ‘희망’이 가진 그리스도교적인 고유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그러한 풍요로움을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과 ‘희망’은 사실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책의 종교’, 곧 책에 쓰인 진리들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2,000여 년 전 팔레스티나라는 특정 지역에서 30여 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살다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청년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약 3년을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웠고, 나아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똑같은 하느님으로 고백하면서 ‘이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이 온 세상의 구원을 이루셨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한 신앙이고, 예수라는 인격을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을 ‘기억’하는 신앙이다.


유다인들의 기억과 신앙

‘신앙’과 ‘기억’ 간의 이러한 깊은 연관성은, 유다인들의 신앙의 특징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신앙의 빛」에서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신앙의 특징은 ‘기억’이었음을 주시한다.

“하느님께서 먼저 하신 말씀에 대한 응답인 아브라함의 신앙은 언제나 기억이라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억은 과거의 사건들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기억으로서, 미래를 열어줄 수 있고 그가 걸을 길에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억(memoria futuri)’으로서 신앙이 얼마나 희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9항).

곧 신앙이란 과거에 하신 약속의 말씀을 ‘오늘’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살면서 또한 그 약속이 충만하게 이루어질 ‘미래’를 희망하는 신앙인 것이다.

‘과거에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는 신앙은 이스라엘의 경우 이집트 탈출 사건을 겪은 뒤 ‘하느님께서 하신 놀라우신 구원의 업적’을 기억하는 신앙으로 발전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빛은 예배 안에서 회상되고 경축되며, 부모를 통하여 그 자녀들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위해 빛나고 있다”(「신앙의 빛」, 12항 참조).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위대한 구원 업적을 ‘기억’하는 일은 파스카 식사의 핵심적 요소이기도 하다(탈출 12,14-20; 신명 6,20-25). 이들은 과거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셨는지를 기억하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기억하다’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머릿속으로 회상하는 것, 일종의 정보의 암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 곧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재현하고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재현(repraesentatio)’이라는 말은 더 정확히 표현하면 다시(re-) 현재(praesens)화 하는 것, 곧 ‘지금 여기에서 실현됨’을 말한다.


예수의 성찬례 제정에서의 ‘기억’

파스카 식사가 담고 있는 이러한 ‘기억’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다음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4 이하). 여기에서 ‘기억(anamnesis)’하라는 명령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예수가 죽고 부활했다.’라는 ‘지식정보’를 잊지 말고 계속 암기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지금 여기에서 현재화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지금 여기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믿으며, 동시에 이 예수가 종말에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는(1요한 3,2; 1코린 13,12) 것을 희망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란 이스라엘의 신앙처럼 오늘 여기에서 과거에 이루신 말씀과 업적을 현재화하는 것인 동시에 더 나아가 마지막에는 그 구원이 충만에 이르리라는 것을 희망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역동적으로 상호 연관된 신앙이다.


‘기억’과 ‘희망’,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한편, 구원사건에 대한 ‘기억’은 ‘선포’를 요청한다. 미사 때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하고 외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선포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우리는 그 답을 성찬례 제정문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1코린 11,17-34 참조).

바오로 사도는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고 그분의 잔을 마시는 것은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바오로 사도가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고 그분의 잔을 마시는’ 행위라고 본 것은 다름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생겨난 분열, 특히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이 홀대되는 상황이었다.

공동체는 주님의 만찬을 위해 모였으면서도, 어떤 이는 자기 것을 먹고 취하도록 마셨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 공동체가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희망이 어떤 빛을 세상에 줄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사건을 지금 여기에 현존케 하는, 곧 그리스도 사건을 ‘기억’하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봉헌과 사랑, 섬김을 실천하는 것까지도 요청한다. 그렇게 할 때 그 공동체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오늘’을 살면서도 ‘미래’, 곧 다시오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공동체이고, 이런 공동체야말로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왜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억의 지킴을 이야기하면서 희망의 지킴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가난한 이들을 돌볼 것을 강력히 요청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특히 난민들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 연대를 실행하여,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신앙이라면 그분의 실존방식, 삶의 목적과 지향은 그리스도인들 개개인, 그리고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실존방식이요 목적이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는 그 창립자와 “똑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장엄하게 선포한 것은 이 때문이다(교회헌장, 8항).

그분을 구세주라고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삶의 방식 그리고 나아가 죽음의 방식이 참으로 구원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선포하였고 나아가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면(마태 25,31 이하), 그에 대한 ‘참된 기억과 신앙’은 필연적으로 ‘가난한 이들’이라고 총칭되는 사람들, 곧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포함하여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받고 있거나 박탈당한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서 ‘가난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의 주교들에게 한 연설에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이요 시작이요 끝에 있다고 강조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지나친 것이 전혀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많은 교부가 주장했던 것처럼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기억과 희망의 지킴’ :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행해진 요청

그러므로 주교 직무의 특징으로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였던 기억의 지킴, 희망의 지킴이란 단순히 주교직무를 받은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또한 ‘기억’과 ‘희망’의 이러한 역동성과 연관성을 생각할 때 ‘지킴’이라는 단어 또한 단순히 잘 보존한다는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키다(custodire)라는 동사가 표현하듯이 보호하고 보살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돌보는 역동적 행위이다.

이것은 신앙의 기억이 인간 역사 안에서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면서 늘 새롭게 기억되고 보살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께서 언급하셨던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조들은 늘 새로워야 할 그 ‘기억하는 자세’의 모범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기억’이란 화살표가 출발하고 있는 원점과 같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신앙을 갖고 살면서, 곧 자신의 신앙을 각 시대와 장소의 상황 안에서 재해석하여 실천하면서 미래를 지향한다. 이것이 사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정신인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이기도 하다.

이러한 재해석과 시대에의 적응은 자신의 근원적 출발점 곧 그래프에 비교한다면 원점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에 대한 ‘원천적 기억’이다. 이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원천으로 돌아가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고자 노력할 때마다 새로운 길들이 드러나고 창조적 방식들이 보이며, 또 다른 형태의 표현들과 더욱 설득력 있는 기호들과 오늘날의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 어휘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모든 참다운 복음화 활동은 언제나 ‘새로운’ 것입니다”(11항).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기억’은 늘 살아있고 늘 ‘새로운’ 기억이어야 하고 그럴 때에 참으로 이 시대에 ‘희망’을 주는 기억이 될 것이다.

* 최현순 데레사 -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의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1월호, 최현순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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