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시복시성] 103위 시성 3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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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5-11 ㅣ No.1262

[103위 시성 30주년] 시성식과 서울세계성체대회 지켜본 노길명 교수


103위에 대한 자긍심, 한국교회 활력소 돼



1984년 당시 노길명(요한 세례자) 고려대 명예교수는 만 40세, 막 장년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교회도, 사회도 크게 변모했다. 예전에 비해 활력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는 550만 명의 교세를 보인다. 그 사이 고려대 인문대 사회학과를 퇴직한 노 교수는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가톨릭대 대학원 신학과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재)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으로,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으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렇다면 노 교수는 30년 전 그날을 어떻게 기억할까.

"이 땅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지 200주년 되던 해에 이뤄진 103위 시성은 한국 천주교회가 지나온 역사를 정리하고 복음화를 향한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103위 성인을 모시게 됐다는 기쁨과 함께 신자로서의 자긍심, 선조들의 신앙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이러한 자긍심과 의지는 한국 교회의 활력소가 됐기에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노 교수는 이어 "103위 시성 이후 1989년 제44차 서울세계성체대회도 한국 교회에 복음화를 향한 열정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며 "기존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 활동이 활성화되고 한마음한몸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도 의미가 깊다"고 기억했다.

노 교수는 특히 200주년을 전후, 한국교회가 폭발적 성장세를 보인데 주목했다. 그 원인을 노 교수는 103위 시성과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이뤄진 복음화를 향한 신자들의 열정과 노력, 활발한 사회복지활동, 인간화와 민주화를 위한 적극적 노력, 성직자 및 수도자들의 모범적 삶 등에서 찾았고, 이같은 노력이 한국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높였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시기 신자 증가는 천주교회의 현상만은 아니었다. 개신교와 불교, 신흥종교의 신자 수도 급증했다. 이는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물질제일주의나 경쟁주의 같은 사회풍조가 확산되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된 마을과 혈연 공동체가 해체된 것도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

양적 성장을 뒤따르지 못하는 질적 성장 문제는 교회뿐 아니라 한국 종교계 전반의 중요한 과제라고 밝힌 노 교수는 "신자 수가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바람직하지 못한 세상 풍조들, 성장주의나 물질제일주의, 물량주의, 경쟁주의, 업적주의, 형식주의, 권위주의 등이 종교 내부로 유입됨으로써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면서 "이렇게 되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세상을 정화하는 목탁 구실을 해야 할 교회나 종교가 오히려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종교가 일반 사회집단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면 종교의 생명력이나 역동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실망하거나 종교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전했다.

노 교수는 특히 교회의 중산층화 문제에 대해서도 짚었다. 우선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으며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의 민중 종교로 기능했는데 이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평민과 천민들이 인간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면서 사랑을 실천한 교회를 자신의 피난처이자 구원 장소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를 전후해 한국 천주교회가 급속히 중산층 교회로 바뀌며 교회의 기준과 활동이 중산층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은 교회에 머물 자리를 잃게 됐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따라서 박해시대의 신앙 역동성을 되찾을 것을 주문했다. 물론 지금은 박해시대가 아니기에 한국 교회의 신앙적 역동성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사랑과 정의, 평화를 위한 투신이야말로 교회의 신앙적 초심을 회복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노 교수는 내다봤다.

지난 30년간 군부독재정권에서 문민정부로 이행되면서 크게 바뀐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노 교수는 "교회는 세상 속에 함몰돼서도, 세상과 떨어져서도 안 된다"면서 "교회와 사회 간 바람직한 관계는 교회가 세속세계와 구별되면서도 세상의 사회 문제나 현상을 복음적인 것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노 교수는 이어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전 세계적 주목 대상이자 한국 교회에도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교황 성하 방한의 실제적 성과는 그분의 뜻과 가르침을 한국 교회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신자들의 영성으로 유지되며, 특히 신자들의 영성은 모든 활동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며 "교황 성하의 방한과 시복 분위기에 들뜨기보다 선조들이 쌓고 지켜온 순교의 의미와 영성을 되새기면서 이어받아야 한국 교회는 더욱 활기찬 모습을 띠며 이 땅의 복음화를 이뤄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4일, 오세택 기자]

 

 

[103위 시성 30주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사제품 받고 시성식 참석한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아버지처럼 따뜻했던 교황님 품 잊지 못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새사제 허영엽 신부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신부님은 성인에게 서품을 받으신 거예요. 곧 요한 바오로 2세가 성인이 되시니까요."

"아! 정말 그렇네요!"

얼마 전 평소 가깝게 지내던 교계 신문기자와 대화 중 서품식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운 좋게도 얼마 전 성인품에 오르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1920~2005)께서 1984년 한국에 오셨을 때 사제품을 받았다.

시성(諡聖)은 순교자 또는 성덕이 높은 죽은 이를 성인의 품위에 올려, 전 세계 교회가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도록 교황이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사제품을 받은 지 벌써 30년이 흘렀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금도 나의 수품식 날이 어제 일처럼 분명한데 말이다.

1984년 5월 5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전국의 부제 37명의 사제 서품식을 주례하기 위해 대구를 찾으셨다. 그날 대구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드디어 사제서품식이 시작됐고, 우리 부제들은 모두 성인들께 전구를 청하기 위해 땅에 엎드렸다. 그런데 내가 엎드린 바로 앞, 손이 닿을 거리에 교황께서 무릎을 꿇으셨다. 엎드려있는 내 귀에 교황의 성인호칭기도 노랫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교황님은 새 사제들을 안아주셨다. 교황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며 나를 포옹해주셨다. 교황님의 품이 아버지의 가슴처럼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우리 새 신부들은 다음날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성인 시성식에 참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인들이 탄생하는 현장에 함께한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교황이 직접 성인의 나라를 방문해 시성을 한 것은 물론 한꺼번에 103위가 시성된 것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의도광장을 꽉 메운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 선조들이 성인품에 오르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지켜봤다. 많은 신자가 뜨거운 감격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과 그가 주례한 시성식은 한국사회에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분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게 한 발판이 됐다. 당시 시성식은 교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던 교황님 방한 행사는 어둠 속에 빛을 비추듯, 많은 이들이 교황 방문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고자 했다. 그리고 실제로 교황 방문으로 세상과 인간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가 이 땅 구석구석에 널리 퍼져 나갔다.

시성식에서 교황은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힘줘 강론하셨다. "한국 순교자들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닮은 것은 그들의 죽음이 새 생명의 시작이 됐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은 이웃에게도 전해져 교회 안에 살아있는 공동체가 됐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입니다."

103위 시성식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우리 교회는 1784년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지 200주년을 맞으면서 103위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품에 올리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이를 통해 200년에 걸쳐 어려움을 극복하고 풍요로운 성장을 이루어 낸 동아시아의 한 작은 교회를 세계 교회가 함께 경축했다.

신앙의 도움을 받던 우리 교회는 이제 주변에 도움을 주는 교회로 탈바꿈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당시 200만 명이었던 신자 수가 지금은 500만 명 이상에 이를 만큼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 성장에 비례해 내적 성장도 함께 이뤘는가는 깊이 성찰해볼 일이다.

사실 순교자들의 시성은 그분들의 영광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시성과 103위 시성 30주년을 맞이해 그때의 감격을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순교신심을 우리 마음 안에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순교성인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우리가 얼마나 실현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순교성인들이 죽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간직했던 신앙의 초심으로 돌아가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마음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4일]

 

 

[103위 시성 30주년]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101위 동료 순교자들' 시성 청원인 윤민구 신부(수원교구 손골성지 담당)


시성, 교황의 특별한 사랑으로 가능했다



윤민구(왼쪽) 신부가 103위 시성 결정과 시성건 명칭 변경 등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있다. 가운데가 당시 교황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장익 주교다.


"교황님께서 한국교회에서 원하는 대로 다 해주라고 하셨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면 한국교회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해도 되나요?"

"아직 한국교회에서 원하는 대로 된 게 아니란 말인가?"

"네. 사실 한국교회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에는 서양 선교사들 이전에, 한국인 사제 탄생 이전에 이미 평신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하상'이란 분입니다.… 이토록 대단한 한국천주교회의 평신도 중에서 단 한 분의 이름도 시성건 명칭에 올라 있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시성건 명칭에 오직 김대건 신부 이름만 올라 있다면, 그토록 훌륭했던 한국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의 역사를 어찌 세계 사람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자, 여기 종이와 펜을 줄 테니 한국교회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이 뭔지 써보게!"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101위 동료 순교자들의 시성건'

"알았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시성건 명칭이 바뀔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네"

1983년 11월 11일. 교황청 시성성차관 집무실에서 크리산 대주교와 103위 한국 순교 복자 시성 청원인 윤민구 신부와의 대화 내용이다. 이날 대화로 103위 시성건 명칭이 '한국의 김대건 안드레아와 102위 동료 한국순교복자들의 시성건'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101위 동료 순교자들의 시성건'으로 최종 확정됐다. 원래는 '1925년에 시복된 복자 라우렌시오 앵베르, 김 안드레아 및 77위 동료 순교자들과 1968년에 시복된 복자 시메온 베르뇌, 루카 위앵 및 22위 동료 순교자들의 시성건'이란 긴 이름이었다.

1983년 3월 7일 자로 103위 순교 복자 시성 청원인을 맡아 103위 한국 순교 성인 탄생까지 '뼈가 부서지도록' 일했던 윤민구(수원교구 손골성지 담당) 신부.

윤 신부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시성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해 시성식을 거행할 것이라는 국내 분위기와는 달리 바티칸 현지에선 시성 추진 6년이 지난 1983년 초까지 답보상태였기 때문이다.

교황청 라테라노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마무리할 무렵인 1983년 3월 시성 청원인으로 공식 임명된 그는 시성성을 방문하고 차관보 페라야 주교가 한국 관계 서류라며 보여주는 문건을 보고 그만 몸이 굳었다. 시성 청원 준비 서류가 겨우 A4용지 두 장짜리 편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시성 준비는 그만큼 미흡했다.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이 시성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요한 바오로 2세의 배려와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의 노력, 시성성 장관 팔라치니 추기경의 협조 덕분이었다고 윤 신부는 회고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3년 1월 시복시성절차법을 개정하고, 시성성장관에게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 출신 성인을 모실 수 있도록 한다 △평신도 출신 성인을 탄생시켜야 한다 △지역 교회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시성 절차가 전개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교황은 또 "한국교회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라"고 시성성장관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시성성 장관 팔라치니 추기경은 시성성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시성추진위원장 김남수 주교에게 103위 시성이 진척될 수 있도록 '기적 심사 관면' 청원서를 제출하라며 서류 작성 방법까지 세세히 알려줬다. 윤 신부는 "매일 시성성에 들렀는데 팔라치니 추기경이 장관 전용 엘리베이터를 알려주면서 필요할 때 언제든지 찾아오라고까지 배려해 주셨다. 덕분에 이 엘리베이터를 자주 이용했다"고 회상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시성건 명칭에 교구장 주교(앵베르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말함)를 제쳐놓고 한국인 신부를 우선시하는 것은 국수주의다.' '수세기에 걸친 교회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다'라며 시성건 명칭과 변경과 한국에서의 시성식을 반대한 시성성 관계자들과 국무원장, 교황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103위 시성청원인이 된 계기로 귀국 후 주교회의 사무차장과 수원가톨릭대 교수를 거쳐 10여 년째 성지 담당 사목을 하고 있는 윤 신부는 "솔직히 우리나라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가운데 103위 성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본받고 있는가 묻고 싶다"면서 "내용적으로 볼 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발전된 것이 별로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사목신학 박사인 그는 "한국교회 사목의 뿌리는 순교 신심"이라고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하느님을 믿어 현세와 내세에서 참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신심만큼 신앙의 바른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4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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