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한국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9-01 ㅣ No.1152

한국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 (1) 순교란 무엇인가?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순교라는 말뜻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국어사전에 보면, 순교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로 설명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사를 살펴볼 때 이와 같은 풀이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순교라는 행동에는 박해시대 신자들의 특별한 경험과 결단, 그리고 염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박해시대 우리 선조들은 오늘날의 ‘순교’에 해당하는 말로 ‘치명’(致命)이란 단어를 써왔다. 치명이란 말은 원래 ‘주역’(周易)이나 ‘논어’(論語)와 같은 중국의 고전에서 유래한 단어였다. ‘주역’에는 ‘군자(君子)는 목숨을 내던져[致命] 뜻을 이룬다’고 했다. 그리고 ‘논어’에서는 ‘선비는(국가나 도덕이)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내던진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치명이란 말에는 당시의 지배적 사회계층이었던 ‘군자’나 ‘선비’와 같은 고귀한 사람들이 감행하는 목숨을 건 결단을 칭송하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이 치명이란 단어가 천주교의 수용 이후 교회 용어로 자리 잡아갔다. 천주교가 수용되던 직후에는 교회의 지도자는 양반 지식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한국교회 창설 직후에 일어났던 조상제사문제로 인해서 교회를 멀리하거나 순교했다. 또한, 그 양반들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 조상이 나라의 죄인이 되어 순교한 이상, 그들은 더는 양반임을 내세울 수 없었다. 이들의 빈자리를 신분이 높지 않은 일반 양인이나 천인들이 채웠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박해과정에서 일반 신자들이나 순교자의 주류로는 양반이 아닌 일반 양인들을 주목하게 된다. 일반 양인이나 천인들은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 지배층에서 엄격한 차별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들은 예의와 도덕을 모르는 사람들로 취급당했다. 그들은 예의와 도덕을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차별받고 천대받아도 되던 ‘아랫것들’이었다. 원래 군자나 선비에게만 적용되던 치명이란 말은 양인이나 천인들에게는 결코 사용할 수 없던 단어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신자들은 순교한 자신의 조상뿐만 아니라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당당히 ‘치명자’로 불렀다. 이로써 신분 낮은 신자들이 자신들은 군자나 선비들과 대등한 존재이며, 고귀한 가치를 실천하는 주체로 선언하고자 했다. 그들이 자신을 군자나 선비로 이해한 까닭은 지극히 존엄한 하느님의 자식으로 자신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세 입교하는 일을 하느님 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 갔다. 여기에 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의 특성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존귀함을 먼저 확인했다.

지난날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자부심과 신념을 가졌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존귀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 간 순교자의 신앙과 영성에 따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그 순교자들의 정신적 후손이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인천주보 3면,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 (2) 그리스도교 순교와 우리 문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을 희생하여 자식을 위험에서 구하려는 어버이는 자신의 목숨보다 그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자식도 있다. 또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목숨까지도 거는 선비의 결연함은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이들이 목숨을 걸 때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특정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은 그 가치를 자신의 전 존재와 일치시키며 이를 더 높게 여긴 결과이다. 이들은 자신과는 무관한 이질적인 가치를 위해서는 결코 죽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자신의 목숨을 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이유도 그 신앙이 곧 자신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천주교 신앙은 서양에서 들어온 이질적 신앙이라고 말한다. ‘민족종교’라고 할 때에도 천주교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순교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까닭은 자신의 신앙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신앙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고귀한 신앙이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이 확신은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었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외국의 종교가 아닌 자신의 종교로 믿게 된 데에는 우리 문화적 맥락에서 천주교 신앙을 재해석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앙이 들어오던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보급되어 있던 이념으로는 부모에 대한 효(孝)와 임금에 대한 충을 들 수 있다. 이 충효라는 가치는 생활윤리를 지배했고 국가이념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우리 문화전통에서는 충을 효보다 더 높게 평가해 왔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삼위일체인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로 받들었다. 그리고 인간인 부모나 임금에게 드려야 할 ‘충효’보다 월등히 더 큰 ‘대충대효’(大忠大孝)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임금을 위해 죽은 사륙신이나 아버지를 위해 죽은 심청이의 ‘충효’보다는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신의 행위를 더 고상한 것으로 표현하며 ‘대충대효’라고 했다. 특히 순교자들은 십자가상에서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효도의 모범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당시의 사조에 따라 ‘효’를 더욱 중시하면서 하느님의 효자가 되기를 바랐다. 우리의 순교자들을 통해서 ‘효’라고 하는 전통적 가치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서로 만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신앙을 이해했던 결과,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결코 이질적 종교가 될 수 없었다.

박해시대 ‘효’는 이웃사랑의 근본이었으며, 당시의 신앙은 이 사랑을 키워가는 운동력을 신자들에게 부여해 주었다. 순교자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의자(義子)임을 확인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도의 연장 선상에서 하느님께 효도를 다 했다. 그들은 효자로서의 신앙을 가졌다. 이 효자로서의 신앙은 우리 문화에 뿌리를 둔 신앙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이 바로 순교정신의 실천임을 말해 주려 한다. [2013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인천주보 3면,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 (3) 순교는 사랑이다

 

 

순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증언이며, 순교자는 그 믿음의 고백자였다. 그 순교자들이 고백했던 믿음의 본질은 사랑이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지난날 한때 우리는 순교를 죽음으로 지켜낸 믿음이라는 차원에서만 주목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순교 관계 기록들에서는 그들의 삶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일삼아 서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신앙의 순교자들이 실천했던 많은 일을 통해서 그 믿음의 본질이 사랑에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순교자를 기억하는 일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결단이다. 지난날 순교자들은 “그렇소, 나는 그리스당(Christian)이오”라고 고백했다. 그들의 이 신앙고백은 말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행동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박해시대 우리 교회사에서 다수 발견된다. 한 예를 들겠다. 1815년 대구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 때 신자들의 체포에 앞장섰던 이는 배교자요 밀고자인 ‘전치수’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고발로 인해서 많은 신자가 경주와 안동의 관아로 잡혀갔다. 그리고 대구 감옥에도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를 비롯해서 여러 신자가 잡혀있었다. 원래 전치수는 신자들의 호의에 의지하여 살아가다가 믿음의 형제들을 밀고 해서 한밑천을 장만해 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그해 부활절을 택해서 포졸들을 이끌고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는 현장을 덮쳤다. 이렇듯 그의 ‘맹활약’ 결과 많은 신자가 체포되었다. 체포된 신자 중 일부는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의 밀고 때문에 순교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신자들을 밀고하여 재미를 본 전치수가 또 다른 범죄를 저질렀고 이로 말미암아 대구 감영의 감옥에 들어갔다. 감사는 그의 행적과 죄상을 매우 나쁘게 보아 그를 굶겨 죽이라고 명을 내렸다. 이때 그의 고발 때문에 감옥에 함께 있게 된 신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적은 양의 음식 덜어내어 그의 목숨을 건져주었다. 덕분에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그가 석방되어 알몸으로 감옥에서 내쫓겼다. 이때에도 감옥 안에 있던 신자들은 그에게 몸을 가릴 옷을 주었다. 이 일을 기록한 교회사가는 이러한 광경을 설명하면서 “참다운 사랑이 원수를 어떻게 갚는지 모든 외교인들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배교자요 밀고자였던 전치수에게 밥과 옷을 나누어주었던 신자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다. 그들이 순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다져나갔던 결과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구 감영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사랑 없이는 그들의 신앙을 논하기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이렇듯 순교는 사랑이었고, 사랑의 실천을 통한 신앙 훈련의 결과였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실천이 없이 순교의 영광만을 논한다면, 그것은 죽음의 고통을 이겨낸 사랑의 모범을 망각하는 일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며 가톨릭이다”라는 고백에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포함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순교의 영성이 있고, 우리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핵심이 있다. [2013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인천주보 3면,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 (4) 순교에 대한 가르침

 

 

흔히 ‘신유박해’라고들 하는 1801년의 박해 때에 여러 신자가 순교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고 석방되거나 귀양간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후자에 속한 신자 가운데 최해두(崔海斗)가 있다. 그는 서울에서 신앙을 실천하다가 체포되어 배교했다. 그러나 그는 배교 후 방면되었던 다른 신자들과는 달리 경상도 흥해 땅으로 귀양을 갔다. 아마도 그가 배교하기 전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벌로 귀양 갔을 것이다. 그가 귀양을 갔던 곳은 오늘의 지명으로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은 당시에 바닷가에 있던 매우 궁벽한 땅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곰곰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배교자였던 만큼, 아마도 그에게 하느님의 존재는 더욱 심각한 사색과 반성의 주제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배교에 대한 반성과 고백의 글을 썼다. 이 글의 제목을 스스로 자신을 꾸짖는다는 의미로 ‘자책’(自責)이라고 했다. 최해두는 “교회의 전통과 교회사에서 말하기를, ‘형구 아래 죽는 것은 순간의 순교지만, 은수자와 수도자들의 공부는 한평생에 걸친 순교’다.”라고 기록했다. 즉, 그는 형구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교자들의 경우에는 그 고통이 순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하거나, 올바른 신자로서 살아가는 일은 평생에 걸친 순교이므로, 잠시의 순교보다도 더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평생을 그 순교의 삶으로 살고자 했다.

우리 교회사에 기록된 프랑스인 선교사 가운데 칼레(Calais, 姜, 1833-1884) 신부가 있다. 그는 1866년의 박해 때에 용케 잡히지 않고 중국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순교한 동료 선교사들의 뒤를 따르고자 조선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이 일이 불가능했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하여 자신의 평생을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그가 박해시대 조선인 신자들에게 했던 강론이 남아 있다.

“천당 가는 길에는 둘이 있다. 하나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특별히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는 일이니, 광야에서 은수생활을 하거나 동굴에 홀로 살면서 동정을 지키거나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실행하기가 쉬운 일이니 예사로운 일을 잘하는 것이다. 예사로운 일이란 자고 깨고, 마시고 먹고, 일하고 쉬는 따위의 집안과 집 밖에서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비록 예사로운 일이지만,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행실을 잘 닦은 분이다. 예수님은 은수생활을 하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직 평상시의 일만을 하셨으니, 어찌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냐.” (‘강신부 훈계’, ‘순교자와 증거자들’ 1981, 한국교회사연구소)

최해두는 올바른 신앙생활의 실천을 ‘평생에 걸친 순교’로 보았다. 이는 ‘순간의 순교’보다도 더 어렵다고도 했다. 그러나 칼레 강 신부는 바로 이 평생의 일상적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평상적인 일에 충실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최해두나 칼레 신부 모두는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순교 영성의 전형을 찾게 된다. 그것은 순교자의 믿음과 삶을 우리 평상의 생활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2013년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인천주보 3면,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 (5) 순교자와의 대화와 만남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그리고 역사는 죽은 사람을 만나는 학문이다. 화석처럼 굳어진 죽은 인물과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 대화는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이 대화를 위해 역사에서는 이미 죽었던 이들에게도 생명을 불어넣어 살려내려 한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구체적 인간들이다. 우리 한국 교회사에 등장한 순교자의 숫자는 1만여 명 내외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1만 명이란 숫자는 결코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순교자의 수를 합해보면 약 2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물론 실제 순교자의 숫자는 문헌기록에 남아 있는 이보다는 더 많았음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1만 명이란 숫자는 분명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과장된 표현이었다. 아마 이는 순교자가 많았음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의 숫자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순교자의 정확한 숫자는 하느님만이 아실 듯하다. 그러나 이미 우리 귀에는 1만 명의 순교자라는 말이 못이 박혀 있다. 또한, 우리는 103명이나 되는 많은 성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또 수백 명의 순교성인이 탄생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순교자나 성인들마저도 숫자로 이해해 버리고 만다. 우리는 순교자나 성인들을 구체적 인격체로 만나기보다는 집단적 숫자로만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원래 현대 사회에서는 물량주의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돈을 세듯이 순교자의 숫자를 헤아리는 듯하다. 그러나 순교에 대한 인식은 양적 측면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 신앙은 현상의 양적 측면보다는 질적 측면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순교에 대한 질적인 평가가 요청된다. 우리 순교자들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올바로 파악해서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임을 당한 첫 인물로는 신라 시대의 이차돈이 있다. 그는 불교신앙을 위해 순교했다. 그 이차돈 한 사람의 죽음은 신라인들에게 불교적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제자들은 한 사람에 지나지 않은 이차돈의 순교를 음미하고 재음미해서 그 의미를 밝혀내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신라가 불교국이 된 까닭은 불교를 위해 죽은 순교자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제자들의 이러한 노력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2천 명 이상의 순교자가 있다. 비유하자면, 우리에게는 2천 명 이상의 이차돈이 있었다. 그러나 이차돈의 가르침을 음미하여 신라를 불국토(佛國土)로 만들려 했던 그 제자와 같은 사람들은 드물었다. 그래서 이 땅은 순교자들이 염원했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꽃피는 곳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순교자의 후예인 우리가 그 몫을 맡을 때가 되었다. 우리는 순교자들을 구체적 인격체로 만나서 그들의 충고에 귀 기울여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들의 지혜와 믿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가게 된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믿음과 살림을 구체적으로 본받아 실천한다면 이 땅의 문화와 사회질서는 질적으로 전환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그만큼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순교자들의 염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순교자들의 지혜는 현재의 우리 삶을 기름지게 가꾸어주며, 미래의 새 세상을 풍요롭게 적셔주는 마르지 않을 샘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2013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인천주보 3면,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78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