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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반역, 병사, 살인, 행불자도 하느님의 종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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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14 ㅣ No.968

반역, 병사, 살인, 행불자도 '하느님의 종' 될 수 있을까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 '시복시성을 위한 핵심주제' 심포지엄

 

 

왼쪽부터 이동호 신부, 황종렬 박사, 한영만 신부, 최인각 신부, 사회를 맡은 박동균 신부, 박태균 서울대 교수, 이성근 신부, 윤민구 신부, 여진천 신부.

 

 

반역자와 병사(病死)자, 살인자, 행방불명자는 과연 신앙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 이같은 요인들이 시복시성 추진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는 9월 28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하느님의 종' 124위와 최양업 신부 시복 추진에 이은 2차 시복시성 추진 과정에서 '하느님의 종'이 될 수 있을지 검증 대상으로 떠오른 인물들을 재조명했다.

 

심포지엄 주제는 '시복을 위한 핵심 주제 : 반역ㆍ병사(病死)ㆍ살인ㆍ행방불명'으로,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과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 안중근(토마스, 1879~1910), 6ㆍ25전쟁 전후 납치된 성직자와 신자들이 그 대상이 됐다.

 

과연 오늘날 교회 안팎에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 황사영을 본받으라고 할 수 있는지,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순교자라고 볼 수 있는지 아니면 증거자로 봐야 하는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의 시복시성은 가능한지, 전쟁 중 행불자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이 이뤄질 수 있을지 꼼꼼히 살피고 시복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반역 - 윤민구 신부

 

황사영 백서(帛書)에 대한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박청래(大舶請來)', 즉 큰 배를 요청한다는 내용뿐 아니라 서양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 6만 명을 파견해 조선정부를 위협하고, 조선을 청의 지방으로 귀속시켜 달라는 요청 등으로 숱한 논란을 낳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논란을 낳은 황사영을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수원교구 손골성지 전담 윤민구 신부는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 추진에 대한 검토'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우선 대박 요청에 대해 면밀히 살폈다. 황사영 백서 사건 이전, 또는 그 이후에도 조선교회에서 계속되는 대박 요청은 단순히 서양의 큰 배나 선교사 영입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윤 신부의 주장이다.

 

윤 신부는 "조선 신자들이 영입하려고 한 것은 단순히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에 처음 천주교가 전파됐을 때 그랬듯이 마테오 리치(1552~1610)와 같은 성격의 선교사들, 곧 과학이나 예술에 능한 선교사들이 중국을 거치지 않고 서양에서 직접 배를 타고 조선으로 오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해석했다. 이어 "그럴 경우 그들이 조선에 와서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때 박해를 누그러뜨리고 왕이 조선에서 천주교를 믿는 것을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는 요청이었다"고 말했다. 그러기에 조선 신자들의 대박 요청은 황사영의 대박 요청과 그 성격이나 목적이 판이하게 다르고, 황사영의 대박 요청은 신유박해(1801년)로 분별력을 잃고 극단으로 치달은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황사영에게 내려진 죄명은 대역모반죄일뿐 아니라 처형 방법도 능지처참형이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정치적 이유로 처형했을 가능성이 크고 순교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원주교구 배론성지 관리소장 여진천 신부는 "교회의 전통적 순교 관점에서 볼 때, 역률이나 모반부도죄로 사형을 당한 103위 성인들의 죽음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신앙에 대한 증오가 가득한 박해자들은 황사영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을 정치적인 이유를 구실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병사 - 최인각 신부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에 대해 발표한 수원가톨릭대 교수 최인각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고찰했다.

 

우선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을 놓고 의학자나 역사학자가 보면 '병사', 신앙인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믿으며 죽음을 맞았기에 '선종', 직무와 그 수행자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순직', 그리스도교의 정점인 신앙과 교회의 진리를 증거하고 드러내고 뿌리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관점으로 본다면 '증거', 박해라는 상황을 고려할 때 '순교'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은 병사와 선종, 순직, 증거, 순교라고 모두 칭할 수 있고 역사적, 교회법적, 사목적으로 모두 사용가능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고 최 신부는 밝혔다.

 

최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증거자로 시복시성을 추진하면 박해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순교자적 삶이나 순교정신으로 목자직을 수행한 순직자적 삶과 덕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순교자로 시복시성을 추진하면 현재까지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 과정에 있는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최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순교자로서 시복시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본다"며 "왜냐하면 지금까지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못한 것은 우리가 이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나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논평자로 나선 서울 홍은동본당 주임 한영만 신부는 "엄밀하게 보아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은 과로사로 보인다"며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앙심, 피곤과 박해를 무릅쓴 조선 입국시도 등은 그가 신앙의 증거자로서 훌륭한 생활을 했고 모범적 생활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증거자로서 시복시성절차에 들어가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밝혔다.

 

 

살인 - 황종렬 박사

 

평신도 신학자인 황종렬(레오, 두물머리복음화연구소장) 박사는 '안중근의 시복시성은 가능한가'를 주제로 안중근의 생애에 대한 재인식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안중근의 삶을 신체 인격 형성기(1879년~)와 신앙과 인권 내면화기(1896년~), 교육 투신기(1905년~), 의병 항거기(1907년~), 동양 평화 수인기(1909년 10월 26일~1910년 3월 26일) 등 다섯 시기로 나눠 살폈다. 이 중 이토 저격 살해 이후 151일에 걸쳐 맞았던 안중근의 수인기는 시간적으로 보면 짧지만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 청취서 등을 통해 하느님과 세상과 자신 사이에서 아름다운 화해와 일치를 이루고 은총을 선물받는 시기라고 주장했다.

 

황 박사도 안중근의 이토 저격 살해가 사람을 죽인 측면에서 살인행위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으로는 명백히 살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살인은 이기적이거나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하느님 정의에 수용 가능한 살인이라고 본다. 이른바 '의로운 전쟁(Just War) 이론'으로, 잔 다르크 사건에서 선례를 찾았다.

 

안중근에 대한 하느님의 종 선정 여부는 교회가 판단해야 할 사안이지만,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자기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의를 증거한 행위의 시작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고 황 박사는 강조했다.

 

가톨릭대 윤리신학 교수 이동호(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신부는 윤리신학적으로 직접 무력행위를 포함해 '살인죄마저 용인'되는 정당방위 또는 의로운 전쟁의 조건을 갖추려면 △ 당시 합법적 권위가 존재하고 있었는지 △ 그 공동체가 불의한 공격을 실제로 받았는지 △ 제거된 인명이 공격의 직접 책임자이거나 관련자였는지 △ 개인적 이해나 증오 관계는 아닌지 △ 무력사용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 △ 거사 이후 더 큰 희생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 그 신분이 국민적 지지를 받는 의병 신분인지 등이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방불명 - 박태균 교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가브리엘, 역사학) 교수는 6ㆍ25전쟁 중 연행, 납치된 이들과 전쟁 이전에 연행, 납치돼 행방불명된 피해자들로 나눠 가톨릭계 인사들의 피해 유형을 분석했다.

 

박 교수는 "피랍된 가톨릭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들은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까지 가톨릭 관련자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미8군 병참관구 범죄과 문서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민간인 납치 살해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측면에서 앞으로 전쟁 중 행불자들에 대한 시복을 추진할 경우 참전국 사료 가운데 찾아봐야 할 문서고의 외연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박 교수는 "앞으로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박해로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들과 수도자, 평신도들에 대한 진상을 좀 더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고 이들의 업적을 정확히 자리매김해 줘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사바) 신부는 "한국교회가 20세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추진한다는 것은 한국전쟁 전후 체포 또는 납치된 후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대상자들의 물리적 죽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고 밝혔다.

 

이어 "박 교수의 논문은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자들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한 범교회적 위원회를 설립해 총체적인 진상조사 재착수의 필요성을 제기한다"고 덧붙였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9일, 오세택 기자]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을 위한 심포지엄 - 반역 · 병사 · 살인 · 행방불명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발제자 황종렬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가 9월 2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을 위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시복을 위한 핵심주제 : 반역·병사·살인·행방불명’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대주제에 따른 4개의 주제, ▲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 윤민구 신부(손골성지) ▲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 최인각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 안중근의 시복시성 가능한가 : 안중근 생애에 대한 재인식- 황종렬 박사(두물머리복음화연구소) ▲ 해방 직후 북한의 종교정책과 전쟁 전후 실종된 가톨릭 관계자들- 박태균 교수(서울대학교)에 대해 토론했다.

 

 

반역 -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윤민구 신부)

법적으로 순교자라 보는데 한계가 있어

 

대부분 조선신자들은 중국의 경우처럼 조선에 온 서양선교사들도 자신들이 갖고 온 금은보화로 성당을 지은 후 조선의 젊은 인재들에게 과학기술을 전수하면서 부국강병에 기여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사영은 북경주교에게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박해의 실상을 전하면서, 엄청난 수의 서양 배와 군대를 보내달라는 백서를 썼다. 하지만 백서는 중간에 발각됐고 그는 대역반란죄로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황사영의 백서 이후에도 1811년(신미년), 1813년(계유년), 1824년에도 조선 신자들은 대박을 요청했다. 하지만 황사영의 백서의 방안들은 ‘백서’ 이전이나 이후의 조선신자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었다. 우선 그는 군함 수백 척에 정예군 5,6만과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와달라고 요청했다.

 

법적 관점에서 황사영의 죽음을 형상적인 순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신자들이 신심적으로 황사영을 순교자로 볼 수는 있겠지만 법적으로 황사영을 순교자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복시성을 하는 목적 중 하나는 삶을 본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신자들에게 황사영을 본받으라고 모범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영복’이라는 상을 주신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황사영을 시복시성해야 황사영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백서’에 나타난 ‘불편한 진실’을 미화시키거나 변명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 될 것이다.

 

 

병사 -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최인각 신부)

병사 넘어 순교 정신에 의한 죽음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인을 도나타 주교는 ‘병의 악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은 여러 가지 병이 그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병사를 넘어선 순교 정신에 의한 죽음이었다.

 

중국은 물론, 조선에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과 중국에서의 박해상황의 연속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활동과 운신의 폭이 좁았고, 고통이었으며, 그의 죽음의 원인인 병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러한 박해상황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임무에 온몸을 바쳐 투신했다. 이러한 목숨을 건 투신으로 쇠잔해져 죽음을 맞은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은 박해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해자에 의해서, 박해의 상황에서, 그 박해가 직접적 원인이 되어 병을 얻어 죽었다면, 이 죽음은 병사가 아니라, 순교에 해당하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을 풍요롭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다. 그를 증거자로 시복시성을 추진하게 되면, 박해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순교자적 삶이나 순교정신으로 목자직을 수행하기 위한 성덕 등은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증거자의 경우는 지속적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통해 드러난 덕행의 영웅성을 밝혀야 한다.

 

지금까지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못한 것은 우리가 이 점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이나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살인 - 안중근의 시복시성 가능한가 : 안중근 생애에 대한 재인식 - 의병기와 수인기의 목적을 중심으로(황종렬 박사)

투철한 믿음·조국애는 현대인의 모범

 

안중근에 대해 논의한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오해하여 살해한 것이 아니다. 둘째, 안중근은 1905년 초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정책이 한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성찰하며 도달한 결론에 따라 교육사업을 거쳐 의병항거에 참여,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저격했다.

 

셋째,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였다. 안중근은 한국에서 독립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하얼빈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는 1907년 여름에 간도로 간 후 대한인이자 동아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밑돌이고 동양의 평화가 한국독립의 요체임을 파악해 이를 자신의 전 존재로 증거했다. 넷째, 안중근은 이토 저격 이후 자신이 저격의 목표로 삼았던 독립과 동양평화를 교수형으로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과 세계에 설득해 갔다. 동양평화를 위한 ‘자기희생’이 이토 저격과 함께 개시돼 교수대에 오름으로써 동양평화를 위한 그의 증거가 완결돼 갔다고 할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항거했기 때문에 현대 가톨릭교회의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참으로 현대 가톨릭교회의 모범이자 동아시아 세계 가톨릭교회와 전 지구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고해성사를 통해 정화를 거친 영혼으로 상징되는 갈림 없는 마음으로 이토 저격 이후 일관되게 증거한 그의 믿음과 민중과 조국에 대한 투철한 사랑에 있다.

 

 

행방불명 - 해방 직후 북한의 종교정책과 전쟁 전후 실종된 가톨릭 관계자들(박태균 교수)

희생자 진상 명확히 밝혀 바로 잡아야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톨릭계 피해자는 크게 두 시기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는 전쟁 중 피해를 입은 종교 지도자 및 신자들이다. 전쟁 시기 피해자는 다시 둘로 나눠지는데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 남한에서 피해를 입은 가톨릭 관계자들과,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의 북진 이후 북한군이 후퇴과정에서 납치 또는 피살된 북한지역의 가톨릭관계자들이다. 둘째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피해자들이다. 이들의 연행, 납치 후 행방불명 시기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눠지는데, 1949년 5~7월, 동년 12월, 1950년 6월 24일에 집중돼있다. 덕원·함흥교구가 44명이고 평양교구가 29명이다.

 

가톨릭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거의 없다. 대규모 학살의 경우 신원파악과 시체 수습의 어려움 때문에 가톨릭 계열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압송과정에서, 혹은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을 수도 있다.

 

이들의 최후 행방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 방법은 북한에 직접 조회하거나, 국제 적십자위원회의 자료들을 좀 더 상세히 조사하는 것이다.

 

60년이 지난 현재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스스로 전쟁 당시의 결정에 대해서 되돌아보아야 하고, 분단과 전쟁의 과정에서 박해를 받아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에 대한 진상을 좀 더 정확히 밝혀 이들의 위치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10월 9일, 오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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