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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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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에 비추어본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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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23 ㅣ No.926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에 비추어본 한국교회

 

 

순교와 선교의 영성으로 점철된 생애

 

최양업 신부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십자가의 능력이 자신의 삶에 응결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이렇게 청한다.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배우려 하지 않게 하시기를 빕니다. 저의 이 서원을 신부님의 기도로 굳혀주시고 완성시켜 주십시오”(세 번째 서한).

 

또, 순교자들의 영적 전쟁에 함께하여 목숨을 바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였다. “부모와 형제를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처럼 장렬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두 번째 서한).

 

최양업 토마스는 1842년 11월부터 1846년 11월경까지 소팔가자를 주거주지로 삼아 신학공부를 하고 입국로를 찾으려고 하였다.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뒤에 그는 소팔가자의 신학생들을 지도한 것으로 보인다. 1846년 12월 중국 심양에서 쓴 편지에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선교 열정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있다.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 요동의 차쿠 본당에서 베르뇌 신부(후에 제4대 조선대목구장) 밑에서 6개월 동안 중국인을 대상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귀국을 준비하면서 한국인으로 중국 선교의 첫 장을 연 것이다. 그해 12월에 귀국한 뒤, 1861년 6월 선종하기까지 1년에 7천 리 이상, 5개 도 100여 개 이상의 교우촌을 다니며 사목순방에 나섰다. 그의 삶은 선교에 대한 열망과 사명감으로 가득했다.

 

그는 입국하여 활동하면서 과중한 일에 시달렸다. 메스트르 신부는 1855년 2월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 신부가 한 해에 대부분의 신자를 찾아가 4,500명의 고해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최 신부의 소원은 “천상음식에 굶주린 영혼들을 실컷 배불리 포식시키는 것”이었다(일곱 번째 서한).

 

최 신부는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신자들의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를 보면 그들을 도와줄 능력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자비와 연민의 마음이었다.

 

최 신부는 동정녀 바르바라의 죽음에 커다란 회한을 가졌다. 박해시기에는 동정을 지키려면 동정부부로 살든가 동정생활의 결심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성사 금지의 제재를 가하기도 하였다. 수도생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고 박해의 위험 때문에 행한 조치였다. 동정생활을 갈망하면서도 성사 금지 처벌을 받은 바르바라는 큰 슬픔에 빠졌고 차라리 병에 걸려 천상 아버지께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정말 그녀는 중병에 걸려 병자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 하늘나라에 갔다.

 

최 신부는 커다란 회한과 가책과 하느님 사랑의 감정을 느낀 채 이렇게 기록했다. “사악이 그녀의 지력을 손상할까 봐, 또 위선이 그녀의 총명을 흐리게 할까 봐 바삐 하늘로 거둠을 받았으니, 그녀의 생애는 짧은 시간에 쇠진하였으나 많은 시간을 채웠도다”(일곱 번째 편지). 최 신부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착한 목자요 바오로 사도 같은 선교사였다.

 

최양업 신부의 업적은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의 시복시성 추진,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 수집, 천주가사의 저술과 보급, 가톨릭 교리서와 전례서 편찬과 보급, 신학생 양성 등을 들 수 있다.

 

1847년 4월 20일의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고 페레올 주교님께서 프랑스어로 기록하여 보내주신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는 것은 저에게 더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순교자들의 행적을 고 주교님도 원하시고 이 메스트르 신부님도 권하시므로 제가 라틴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라틴어 번역본은 1847년 교황청 예부성에 접수된 뒤 시복절차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행적에 수록된 82명 전원이 1857년에 가경자로 선포되고 1925년도에 79명이 복자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최 신부는 바쁜 공소 순방을 마치고 휴가기간 동안 순교자 조사를 하였다. 이 일은 단순한 관심사를 넘어 하느님께 약속한 바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저는 하느님의 자비로 오랫동안 서원으로 맹세했던 대로 저의 동료들에 대하여 더욱 주의 깊게 고찰하고, 조상들의 순교 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지 아니하고서는 도저히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여덟 번째 서한).

 

최 신부는 자신이 서원한 대로 많은 자료들을 찾아내서 스승에게 보고하려 하였으나 다블뤼 주교에게 드렸으므로 따로 보고하지 않겠다고 언급한다. “지난해에 제가 우리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많은 자료를 찾아 신부님께 보고드리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동안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나 그것을 존경하올 다블뤼 주교님께 모두 드렸습니다. 안 다블뤼 주교님께서 모든 순교자들의 전반적 역사를 편찬하고 계십니다”(열세 번째 서한).

 

이러한 편지의 내용을 통해 보면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상당 부분이 최 신부가 수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최 신부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로 신앙교육을 하려고 했다. 한글 서적이나 천주가사는 전교활동과 교리공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한글이 교리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어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하여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여덟 번째 서한).

 

한글로 기록된 ‘천당 노래’ 또는 ‘신앙 전래 노래’를 ‘천주가사’라고 한다.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교 교리를 노래로 전수하고 가르쳤다. 박해시기의 천주가사는 21편이며 큰 제목으로는 9편으로 나눌 수 있다. 곧, 민극가 성인의 ‘삼세대의’, 이문우 성인의 ‘삼덕가’, ‘제성’, ‘행선’과 ‘옥중제성’,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사향가’,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보급되고 읽힌 천주가사가 ‘사향가’이다.

 

또한 최 신부는 1859년 10월에 주요 전례 기도문인 “천주성교공과”의 번역을 마쳤고, 가톨릭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최 신부의 짐을 덜어주고 순교자에 관한 기록을 보강하려고 경상도 지역 일부 교우촌의 순방을 맡았다(열일곱 번째 서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최 토마스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는 보통 일 말고도 주요한 기도서의 번역을 끝마쳐 가는 중이었고, 교리문답의 완전하고 더 정확한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한국 천주교회사” 하권, 번역본, 299)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최 신부는 진천 배티의 조선교구 신학생 3명을 지도하고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으며, 신학교가 제천 배론으로 이전되자 그곳을 방문하여 신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업적에 비추어본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찰

 

베르뇌 주교의 1861년 9월 4일의 편지를 보면, 신자 숫자가 18,035명으로 나온다. 그 당시 주교 2명, 신부 7명이 활동하였으며 사목구 7개, 신학교 1개가 있었다. 2009년 12월 31일 현재 한국교회 신자 수는 5,120,092명, 주교는 30명, 신부는 4,374명, 본당은 1,571개, 공소는 1,017개, 신학교는 7개이다. 남자수도회는 47개에 회원이 1,555명이고 여자수도회는 106개에 회원이 10,073명이다. 의료기관과 사회복지기관은 1,300여 개에 이른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었고, 오늘도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시작했던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의 절차는 103위 성인의 탄생으로 한 단락 마감했다. 그리고 주교회의가 추진 주체가 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 안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시성 안건이 지금 로마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전통은 ‘한국전쟁 순교자’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이분들의 시복 조사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 2차 시복 추진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최양업 신부의 유업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에서는 “매일미사”, 전례용 독서, 성가, “성무일도” 등을 번역하고 편찬 · 간행하고 있는데 이 역시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보급하고, 연중 주요 기도문을 번역한 일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에서는 “간추린 가톨릭교회교리서”나 “청년 교리서” 등을 편찬하고 있는데 이것도 교리서 편찬 작업에 참여한 최 신부의 활동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교리서 간행작업은 아직도 미완성 단계에 있다. 좀 더 다양하고 각 계층에 맞는 교리서 연구와 편찬이 과제로 남아있다.

 

최양업 신부가 한국에서 활동했던 시대(1850-1861년)는 선교사의 시대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방인 성직자로 양성된 2명의 한국인 사제가 조선대목구에서 활동하였다. 조선대목구는 오늘날 16개 교구로 성장하였다. 평양교구와 함흥교구와 덕원 자치 수도원구는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토대는 선교사들이 흘린 피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교구 소속의 한국인 신부는 3,605명이고, 선교회 소속 신부는 59명, 수도회 소속 신부는 529명이다. 외국인 신부는 191명이다. 3,000명 이상이 교구신부이므로 교구와 수도회의 균형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보편교회는 초대교회의 순교자 시대를 마감하며 증거자의 시대로 넘어서면서 많은 수도회 성인들을 배출하였다. 4세기 초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그리스도의 정신과 교회 영성의 맥은 수도자들을 통하여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들어가 순교정신으로 복음삼덕을 증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와 증거자가 되었다. 미래의 한국교회가 성숙하고 아시아 선교의 중심이 되려면 수도자들이 존경받는 풍토와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수도회 출신의 성인이 배출되지 않았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이 완결되지 않아 이러한 과정이 지연되는 면도 없지 않으나, 젊은이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수도생활을 하려면 수도회 창설자나 수도생활의 귀감이 되는 분들이 시복시성되어야 한다. 남자수도자와 여자수도자의 차이는 10배나 된다. 이러한 큰 차이는 교구 소속의 신부가 교회와 사회에서 인정받고 좋게 보이는 환경과 전통에 영향을 받아 수사신부의 숫자가 줄어든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해시대의 동정녀와 동정부부의 삶을 오늘날의 영성으로 표현하면 ‘재속봉헌생활’이다. 교회법 제710조는 “그리스도 신자들이세속에 살면서 애덕의 완성을 향하여 노력하고 세상의 성화를 위하여 특히 그 안에서부터 기여하기를 힘쓰는 봉헌생활회”가 재속회임을 밝히고 있다. 수도회의 봉쇄생활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나 이 세상 안에서 봉헌생활을 하려는 욕구가 우리 사회 안에서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사도직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북방선교’라는 화두가 한국교회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훌륭한 과업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실상 그러한 정신과 삶을 살려는 선교사들은 드물고 적은 듯하다. 이 점은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의 정신과 자세가 현재에 이어지지 않는 단면이기도 하다. 몇몇 교구신부들이 북방선교를 준비하려고 중국에 가서 탐색을 하고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교구사제로 양성된 신부들이 종교 박해가 교묘하게 지속되고 있는 공산정권하에 선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주교회의 선교단체로 한국외방선교회가 있다. 북방선교 또는 아시아 선교를 한국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한다면 선교사 양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후원 방법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생기는 선교회 단체들이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과 메리놀외방전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황석두 루카 선교회의 김동일 신부를 교구신부에서 선교회신부로 이적시켰다. 이는 시사하는 것이 크다. 증거자의 시대를 맞이하여 훌륭한 선교사들이 많이 늘어나 한국교회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소망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교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들이 있다. 가정에서 자녀를 많이 낳지 않아 성소자들이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7개 교구의 신학교 신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 이러한 자리에 중국교회나 아시아 교회의 신학생들이 채울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생산적인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류한영 베드로 - 청주교구 연수동본당 주임신부.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주교위원회 총무.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류한영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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