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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최양업 신부가 지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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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23 ㅣ No.925

[경향 돋보기 -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최양업 신부가 지은 글들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교회에는 지성의 역사가 맥을 이어 흐르고 있다. 우리 교회는 자신이 살던 시대와 사상에 비판적이던 젊은 지식인 집단의 탐구 정신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한문 교리서를 통해서 새로운 가르침과 접했고, 이를 종교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이끌어주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지적 작업을 통해서 믿음살이와 살림살이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지적 전통은 당시 천대받던 불학무식한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천주교는 학식의 소유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이가 믿을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한문에 숙련되었던 지성들이 지은 천주교 신앙에 관한 노작들은 무지렁이 농투성이에게 새로운 지식과 신앙을 심어주었다. 새 지식을 가진 그들은 민중의 글인 한글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면서 그 신앙에 환희하고 있었다. 한글로 옮겨진 교리서는 또 다른 신앙의 표현물을 만들어 내었다. 1801년의 박해 때 나온 최해두의 참회록인 “자책”이나 이 루갈다의 편지와 같은 글들은 유학자 출신 신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지적 전통이 자라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우리 교회의 지적 전통에서 중요한 인물로는 최양업을 들어야 한다. 그가 마카오에서 받았던 신학교육은 우리나라 교회가 서양교회의 전통을 직접적으로 수용하여 재창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신앙의 선배들이 세워온 교회의 전통을 갈고 닦아 이를 굳게 하고자 불철주야로 노력했다. 이 노력 덕분에 그는 그침없이 길을 걷는 땀 흘리는 선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조선교회를 위해 적지 않은 글들을 남겼다. 그의 서한, 순교자에 관한 기록과 교리서, 가사(歌辭)는 한국교회의 지적 전통을 이루는 데 한몫했다.

 

 

그의 편지들

 

최양업 신부가 남긴 글들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것은 그가 라틴어로 작성한 편지들이다. 그는 모두 19편에 이르는 라틴어 편지를 마카오에서 자신을 가르쳤던 르그레주아(Legregois) 신부와 리브와(Libois) 신부에게 보냈다. 그가 작성한 편지는 사목활동에 관한 단순한 보고서로만 볼 수 없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새롭게 터득한 가치의 중요성을 말했고, 자신의 지식세계를 드러내었다.

 

예를 들어보자. 그는 자신이 말레이 반도 페낭에 있던 신학교에 파견한 3명의 신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곧, 그는 1854년 11월에 자신의 은사인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겸손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달라고 당부했다. 이는 그가 새롭게 터득한 그리스도교적 겸손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깨달음은 당시 조선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졌다. 이 편지에서 그는 “조선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평가할 줄 모르며, 인간의 지위와 가치를 세속의 영화와 부귀공명에서 찾을 줄만 안다.”라고 매섭게 비판했다. 이는 그가 겸손의 덕을 인간들이 가져야 할 상호 존중의 정신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에 관건이 되는 것으로 파악했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그는 새롭게 자라나는 미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겸손을 이처럼 강조했다.

 

그는 조선의 양반 중심 신분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물론 그가 살았던 당시는 이미 양반제도가 무너져 가던 시기였지만 그는 자신의 주변 도처에 남아있던 신분제의 잔재를 쓸어 없애고자 빗자루를 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양반의 특권이 인정되고 일반 양인들에게는 복종만이 강요되는 신분제 아래에서는 인간의 존엄성(dignitas humana)은 완전 무시되고, 우애(caritas fraterna)가 보존될 수 없다.”고 외쳤다.

 

인간의 존엄성과 ‘우애’를 강조하던 그의 말에서 우리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 가운데 일부가 어느덧 그의 정신에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우애란 그리스도교 전통의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특히 존엄성과 우애를 강조했던 데에서 우리는 새롭게 무장되어 가던 근대적 사회사상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또 그는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 늘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의 편을 드셨으니 신분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사회에 대한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신분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고질적이지는 아니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했다. 당시 사회에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조선의 신분제도를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조선 사람은 오직 최양업뿐이었다.

 

그는 권력자인 관리를 채용하거나, 권력 없는 양반들에게 권위를 유지시켜 주는 과거제도가 신분제도를 지속시키는 근간임을 올바로 지적했다. 이에 더 나아가 그는 관직에 사람을 채용할 때 출생 신분 등을 고려하지 말고, 재능과 인격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양반제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전통적인 과거제도를 부정하고, 공직담임권은 만인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했다.

 

우리는 최양업의 편지를 통해 그가 직접 서술한 내용뿐만 아니라 그 말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뜻까지도 파악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시각을 가진다면, 우리는 최양업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특성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사상과 정치사상까지도 유추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믿음의 노래

 

196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국문학계에서는 우리의 전통 가사문학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때 연세대 교수 김동욱은 낡은 한지를 재생하여 창호지를 만들던 경기도 안성 지소(紙所)를 비롯해서 고서적상을 뒤지고 다녔다. 망실되어 가던 국문학 자료를 하나라도 더 건지려는 노력의 표현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가사집 하나를 얻었다. 그 가사는 전통적인 내용과는 판이했고,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담은 내용이었다.

 

이에 그는 이 가사를 ‘천주가사’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가 입수한 책자에 그 저자가 최양업 신부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천주가사’의 저자로 최양업 신부를 비정하게 되었다. 그는 이를 학계에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최양업 신부가 지은 ‘믿음의 노래’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지었다는 믿음의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은 더욱 음미되어 갔다.

 

“천주가사는 서구사상이 한국의 토양에서 새롭게 형상화된 문학이자 우리 선조들의 신앙고백이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당시 유행하던 문학 형식인 가사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신앙을 표현했다. 이 가사는 4 · 4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3 · 4조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믿음의 노래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교리교사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이 지은 믿음의 노래는 신앙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전례의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전통곡조에 맞추어 믿음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중배와 원경도 등 신자들이 1800년 부활절에 함께 모여서 기도문을 노래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02년 목포의 드예(Deshayes) 신부가 흑산도 사람들을 선교하던 과정에서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정약전(1758-1816년)이 성가의 가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보고한 바 있다. 그 뒤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1787-1840년)도 ‘삼세대의’를 지어 자신의 신앙을 표현했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한때 교회의 전통에서는 모든 ‘천주가사’를 최양업 신부가 지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나는 틀린 설명이다. 그러나 천주교 가사문학의 전통이 최양업 단계에 이르러 한층 더 비상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전승이 만들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양업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대표적 믿음의 노래로는 ‘사향가(思鄕歌)’를 들 수 있다.

 

원래 우리나라 문학에서 ‘사향가’는 타향살이의 힘겨움과 서러움, 그리고 외로움을 달래며 부모와 형제친척 그리고 고향의 어릴 적 친구들을 그리던 노래였다. 그러나 신자들이 불렀던 사향가는 거룩한 노래요 교리서였으며,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그 바른 방향을 가르쳐주던 윤리서였다. 사향가는 한 편의 훌륭한 호교서이기도 했다. 그 사향가의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되고 끝맺는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낙토 찾아가세 /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낙토런고 /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 내쳐있고 / 복지로 가자하니 모세성인 못들었고 / 이러한 풍진세계 평안한곳 아니로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고향 가사이다 / 세속훼방 탄치말고 세속체면 보지말고 / 세속명리 취치말고 세속일락 탐치말고 / 제삼구를 힘써치고 저칠도를 굳이막아 / 천당길을 바로찾아 대부모를 보사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농촌에서는 이상세계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승지(勝地)는 그들이 바라던 유토피아의 일부였다. 19세기 중엽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천주교 신자들도 낙토(樂土), 지당(地堂), 복지(福地)의 개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향가’는 지상의 유토피아를 천상으로 승화시키며, 참다운 대부모(大父母)인 천주님에 대한 신앙과 이를 드러내는 자기절제와 겸손을 통해서만이 그곳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최양업 신부는 분명 가사체 문학이 가지고 있던 호소력과 친근감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는 가사에 익숙했던 신자들을 위해서 가사의 형식을 빌려 교리를 설명하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궁극에 신앙을 제시해 주었다. 최근 김영수는 한국교회사연구소 등에서 ‘천주가사’에 관한 자료집과 연구서를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최양업이 지었다는 천주가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지적 전통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측면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말

 

최양업은 1839년과 1846년의 박해 때 신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전기인 “순교자전”을 정리 완성해서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또한 그는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러한 책들은 오로지 최양업 자신의 업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이 책들이 편찬 간행되는 데에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다면 그의 저서를 논할 때에 이 책들도 함께 포함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가 한글로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당시 세계교회의 공통언어였던 라틴어로 번안했던 “순교자전”에는 그의 손길과 숨결이 스며있다. 바로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우리나라 ‘79위 복자’들이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도 자신의 견해를 강하게 투영시켰다. 그는 이 책을 편찬할 때 그의 어머니 이성례의 순교에 대한 기록을 삭제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통해서 역설적으로나마 그가 이 책의 편찬과정에서 담당했던 일들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최양업의 어머니 이성례(1800-1840년)는 한때 배교하기도 했다. 자신이 죽게 되면 의지가지없게 될 나이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였다. 이성례의 배교는 하느님이 태워주신 모성애를 따르는 올바른 행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례는 더 큰 믿음에서, 살아남게 될 자신의 자식들을 하느님께 맡기고, 서울 당고개에서 다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 이성례의 특출함이 드러난다.

 

최양업은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를 결행한 이들을 순교자의 명단에 올리는 일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독 어머니인 이성례를 그 명단에서 뺐다. 이 때문에 이성례는 ‘조선순교자 79위 복자’의 반열에도 들지 못했고, 그 복자들이 성인으로 추대될 때에도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왜 그랬을까?

 

이는 그가 역사에 대한 엄격한 자세를 가지고 있던 데에서 나온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역사를 기록하는 데에 어떠한 흠결이나 사사로운 마음도 용납하지 않았음을 이 일로써 드러냈다.

 

또한 최양업은 순교자의 영예마저도 과람하게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이 순교자로 죽기보다는 살아서 신자들에게 봉사하는 길을 택하려 했다. 이는 그 자신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겸손의 가치에 대한 실천이었다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자세 때문에 그가 쓴 편지들은 진실될 수 있었다. 그가 써서 보급시켰다는 믿음의 노래들은 신자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마음을 울릴 수 있었다. 그의 순교자전은 그 기록의 사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가 편찬에 참여했던 “성교요리문답”이나 “천주성교공과”는 신자생활에서 북두(北斗)요 지남(指南)이 될 수 있었다. 최양업은 이렇게 우리 교회의 지적 전통을 잇는 작업을 수행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순교자와 증거자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최양업 신부 가족들의 사회전기도 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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