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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진출 100주년 맞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원장 이형우 아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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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18 ㅣ No.123

한국진출 100주년 맞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원장 이형우 아빠스


“변화·쇄신 속에 한 세기 신앙 버팀목으로 성장”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원장 이형우 아빠스는 이번 백주년을 수도원의 쇄신과 재정립을 위한 전환점으로 삼고 이백주년을 향해 나아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교회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한 세기 거목으로 성장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비록 독일에서 온 두 명의 선교사로 시작했지만 베네딕도회는 민족의 역사를 온전히 함께 겪으며 한국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올해 한국진출 백주년을 맞아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수도원은 5년 전부터 ▲ 영성 ▲ 전례 ▲ 역사 ▲ 건축 네 가지 분야의 계획을 수립했으며, ▲ 베네딕도회의 규칙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는 수도자의 정체성 재확립 ▲ 성무일도서와 각종 예식서를 새로 만드는 작업 등의 전례 쇄신 ▲ 100년사와 화보집 발간 ▲ 수도원 재건을 그 내용으로 현재 막바지 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수도원 내부의 쇄신 뿐 아니라 그동안 수도원의 발전에 이바지해온 은인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감사의 자리도 계획하고 있다. 갖가지 사업들과 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는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원장 이형우 아빠스를 만나 수도원의 역사와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한국진출 백주년의 감회에 대해 들어봤다.

 

“하느님의 큰 섭리라고 생각 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됐어요.”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최초로 독일 베네딕도회에서 두 명의 수도승이 조선에 입국한 사실에 대한 이형우 아빠스의 표현이다.

 

1908년 조선은 세계교회에 있어서 극동의 작은 은둔의 나라에 불과했다. 뮈텔주교는 한불조약 이후 자유를 얻게 된 조선교회 신자들의 증가와 이에따른 예비자교리, 학교의 설립과 운영 등에 도움이 절실했다.

 

“뮈텔 주교님은 당시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양성할 수도회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 편지를 보내고 직접 방문하는 열의를 보이셨습니다.”

 

뮈텔 주교는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 장상과의 면담 자리에서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적 정황으로 봤을 때 독일에서 극동의 머나먼 나라인 조선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것은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프랑스인 주교가 물어물어 독일까지 찾아간 것은 큰 용기와 헌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 당시 면담 자리에서 뮈텔 주교는 선교사 파견을 설득하기 위해 조선교회 설립 배경과 박해사를 설명하며 감동의 자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1909년 12월 도밍고 신부와 보니파시오 신부로 구성된 선발팀이 도착하고 백동(지금의 혜화동)에는 최초로 성베네딕도 수도원이 설립된다.

 

“당시 조선에 입국한 두 명의 수도자는 독일 수도회에서도 인재 양성을 담당하던 요직에 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후 수도원은 사범학교인 숭신학교와 숭공기술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11년 조선천주교회는 경성과 대구로 교구가 분리되면서 교구 분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 8월 2일에는 베네딕도 수도회가 함경북도, 간도, 의란을 경성교구로부터 인수받아 독립 교구로 성장했다. 1927년 베네딕도회는 덕원 수도원을 설립하고 포교활동을 지속하게 된다.

 

성베네딕도 수도회는 일찍부터 출판·교육·복지 등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며 한국교회 발전에 앞장서 왔다.

 

이형우 아빠스는 “선교를 위해 한국교회에 파견된 수도자들은 독일에서도 뛰어난 엘리트들이었다”면서 “이들은 신학교를 중심으로 출판, 전례, 번역 등에 힘썼으며 이는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또 이런 사업들은 학교, 의료시설, 복지시설 등의 건립과 함께 이뤄지면서 신자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특별히 6·25전쟁 이후엔 귀환했던 선교사들이 불안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다시 입국, 독일 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의료, 복지 등의 사업을 통해 어려운 이들과 함께해왔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철저히 버림받았던 나환자들을 위해 4곳에 시설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결핵요양원과 양로원 등을 세워 복지에 힘썼습니다.”

 

척박한 한국 땅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온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이들은 처음부터 어떤 특별한 계획을 갖고 복지사업을 실천했다기보다는 늘 가까이에 가장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성베네딕도 수도회의 정착이 계속해서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서울, 덕원, 왜관이라고 바뀌어온 수도원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6·25라는 민족의 참혹한 역사 안에서 커다란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1945년 해방을 맞고 수도회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북한 지역에는 공산당이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1949년에는 결국 외국인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수용소에 갇히고 내국인 성직자들은 결국 총살을 당하게 됩니다.”

 

전쟁과 함께 살아남은 수도자들과 신자들은 피난의 행렬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삼분의 일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었다.

 

“흩어졌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부산 중앙성당에 모였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 끝에 모인 형제들은 유기서원자거나 청원자 혹은 지원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수도원을 재건을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2년 7월 6일 베네딕도회는 왜관의 가실성당에서 임시 피난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만 해도 전쟁이 끝나면 다시 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1964년 이전까지는 수도 서원 등 공적인 모든 일들이 덕원수도원의 이름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1964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아빠스좌로 승격되면서 수도회는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가난했던 5~60년대 다양한 포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파란만장했던 근현대 한국교회사를 살아온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많은 수도자들의 헌신과 순교로 신앙을 지키고 신자들과 함께 아픔을 나눴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고 풍족해진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수도원이 그리고 수도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형우 아빠스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내어 놓았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대단히 풍요롭고 발전된 사회입니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돈이 마치 최상의 가치인양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무한경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묵살당하는 시대에 수도원은 쉼터, 안식처가 되고 싶습니다. 영적으로 메말라있는 이들에게 편하게 다가설 수 있는 곳이 되고 싶습니다.”

 

이형우 아빠스는 “이번 백주년을 수도원의 쇄신과 재정립을 위한 전환점으로 삼고 이백주년을 향해 나아갈 생각”이라며 “앞으로 치러질 다양한 행사와 축제에 많은 신자분들이 함께 해 주신다면 백주년의 기쁨이 배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한국진출 100주년 행사는 9월 23일 기념 음악회, 25일 기념 미사, 21~25일 전 세계 20개 총아빠스좌 연합회 모임인 총재 아빠스 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한다. 또한 이 자리는 한국 주교단도 함께 참석해 베네딕도회 한국진출 100주년의 기쁨을 나누는 커다란 잔치로 펼쳐질 예정이다.

 

“하느님의 큰 은총인 한 세기 역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수도회가 할 일은 하느님 뜻에 맞갖은 공동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기쁨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17일, 이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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