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청빈한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수도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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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01 ㅣ No.121

[경향 돋보기] 청빈한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수도회인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원적으로나 성경을 봐도 교회는 회중을 뜻한다(신명 4장; 신명 5장; 2역대 30장 참조). 모세가 십계명을 사람들한테 들려줄 때 그 자리에 모인 회중, 모일 백성이 적어서 파스카 축제를 못 가졌는데, 그때 그 백성, 회중이 바로 교회를 가리킨다. 호렙산에서 하느님께서 “백성을 나에게 불러 모아라!” 하실 때, 그 백성이 바로 교회다.

 

콜로새서 4장을 보면 바오로가 감옥에 갇혀서 콜로새 신자들에게 서간을 보낼 때 마지막에 인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또 님파와 그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그 집에 모이는 교회, 그러니까 교회는 사람이지 건물이 아닌 것이다. 에페소서 2장은 교회의 본질을 아주 잘 드러낸다. “여러분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19-22).

 

교회는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의 모임이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모이면 그게 바로 교회고 흩어지면 없어지는 유기적인 모습을 띤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명이나 세 명이 모이든, 백만 명이 모이든 모이면 교회고 흩어지면 교회는 없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본질이 드러나면 교회고, 본질이 드러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닌 여느 집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본질은 사람이요, 너와 나 우리가 교회인 것이다.

 

 

하느님 백성은 누구인가?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는, 제도와 조직과 건물을 갖추고 역사를 기초로 역사 속에 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복음적으로 말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 가운데서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그들을 부르시어 교회를 세웠고, 역사 안에서, 사회 안에서, 그들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교회의 생명으로 살아 계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 나가셨다. 지상의 교회는 세상과 하느님께로부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한 이유에서 세상은 대단히 중요하다. 바로 하느님 나라를 역사적으로 실현하는 무대이며 하느님 나라가 구체화되는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이 땅,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땅, 이 사회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겠는데, ‘해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 말한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고 하신 예수님은 개혁자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된 하느님, 그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세례성사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되면, 존재론적으로 전인적인 변화를 일으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에페 1,3-11 참조). 이렇듯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변화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밖의 사람들은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의 못 다한 사명의 계승자다. 그러면 과연 그리스도의 과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사명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21 참조) 하는 것이다. 이는 이사야서 61장에서 말하는 메시아의 사명이고, 메시아의 사명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에서 수행해야 할 하느님의 뜻이고 마음이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첫 번째 계약을 맺을 때,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에서도 나온다(창세 18,19 참조).

 

정의와 공정을 실현하려는 하느님의 뜻은 이렇게 맥을 잇는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해방운동은, 종교적이며 동시에 사회 정치경제적인 해방이고, 구약의 파스카 해방이다. 그것을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실천해야 하는, 나의 사명인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여론에 흔들리는 분이 아니셨다. 기존 권위의 폭력에 굴하지 않으셨고, 사랑이 요구될 때는 안식일 규정도 깨뜨리셨다. 필요에 따라 형식적 전통이나 차별적 규정도 무시했고, 사제 귀족 계층의 착취에 항의하셨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며 성전 내의 환전상을 둘러엎으신 분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불의에서, 법 아래 자행되는 폭력에서, 죄에서, 병에서, 악의 세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구조적 ? 제도적 악에 도전하시며 사회적 구원을 이루시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신 분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해방운동은 정의로운 사회,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었으며, 이 사명은 정의와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가지셨던 그분의 꿈을 이루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과 같은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과 정의의 나라다. 평화는 정의를 실현하면 저절로 오는 열매다. 예수님은 우리한테 평화를 주러온 것이 아니라 불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다.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정의를 실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평화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해방운동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에 의해서 왜곡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마음을 본래의 빛으로 돌려세운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 땅 위에 세워진 하느님 나라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룬 것이 바로 초대교회다. 초대교회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느님 나라였다. “모든 것을 나누어 공동소유로 내놓고, 필요한 것은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으며,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하며, 함께 모여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도 행하고,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사도 2,43-47; 4,32-37 참조). 나눔으로 서로의 궁핍을 덜어주고,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던 경제적인 평등함, 그래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2코린 8,9-15). 이렇게 사랑과 정의가 실현된 하느님 나라에는 절대적 평등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이며, 교회의 본질이 살아 숨 쉬는 곳이 된다.

 

 

가난과 청빈의 덕

 

성경에는 가난 자체보다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공허한 자, 보잘것없는 자, 비참한 자, 몸을 수그리고 다니는 자, 우는 자, 시달리는 자, 지배당하는 자, 억눌린 자, 억울한 자, 시든 자, 업신여김 받는 자, 미소한 자, 기를 못 펴는 자, 호소하는 자, 구차한 자, 천더기’,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난은 악이다. 모든 사람이, 세계가 연대해서 물리쳐야 할 인류의 적이며 악이다. 인간다움의 품위를 빼앗는,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제일 큰 원인이 가난이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서 제물로 바치는 것, 가난한 사람에게서 빵 한 조각을 빼앗는 것은 살인과 같다고 한다(집회 34,20). 가난은 하느님의 창조물,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갖추고 살기 어렵게 하며, 사람다움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박탈한다. 청빈은 덕이다. 가난을 수동적으로 당할 때는 악이지만, 적극적, 능동적,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겠다고 할 때는 청빈 덕이 된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또한 “마음이 가난한 자가 진복자”라고도 하신다.

 

청빈은 모든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안정과 자유를 자기 힘으로 쟁취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에 완전히 맡기고, 하느님께 의지해서 살려는, 자기 의지의 자발적인 표현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하느님께 철저히 자기를 의탁할 때 따르는 열매는 자유이다. 먹고 사는 일차적 의무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쟁취하면 삶이 투명해지고 단순해지고, 이때에 기적이 일어난다.

 

역설적이게도 청빈한 자는 부요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모든 것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스스로 가난한 자 되시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시기 때문이다”(2코린 8,9 참조). 그 모델이 바오로 사도이다. 그는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고 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청빈하지 못하면 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청빈은 수단일 뿐, 청빈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투신하면서, 같은 가치를 가진 사람과 연대해 사회적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마련이다.

 

 

현 수도회의 청빈은?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모든 수도회는 중산층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일단, 하는 일이 있고 집이 있고 굶을 걱정하지 않고 병들어도 병원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도회의 물질 소유 문제를 떠나서, 각 수도회가, 수도회에 소속된 수도자들이 청빈한 삶 속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투신하는가 안 하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수도자 당사자들이 회개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수도자의 청빈은 “단순하고 투명한,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오롯이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을 청빈서원의 본질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가?

 

우리 한국 교회는 일반적으로 부자다 가난하다라고 말하기 힘들다. 가난한 교구, 본당과 부자 교구, 본당으로 나누어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교회를 민중 또는 회중으로서 이해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의 교회는 가난할 수밖에 없고, 부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교회는 부자일 수밖에 없는데, 도시의 교회가 부자화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부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닌 분들도 많겠지만, 중형차 타고, 골프 치고, 언제든지 외식할 수 있으면 부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병원 가면서 병원비 걱정 안하면 부자 아닌가? 그러기에 교계제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다. 현 한국 교회는 적어도 가난하지는 않다.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 교회를 보시면서 기뻐하시겠는가?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교회인가?” “하느님께서 특별히 눈여겨보시며 사랑하시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인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만일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까? 교회가 본질을 잃으면 필연적으로 물질주의에 빠지게 된다. 기복신앙화되고, 질보다 양에 치중하게 되어서 대형화하고 거대해진 부자들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이 들어설 틈이 없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신앙 안에 폐쇄되어서 이웃과 세상에 무관심하고, 복음적 삶보다는 도덕적 삶에 매달려서 독선에 만족하게 된다. 권위주의에 떨어져 역할의 기능상, 직책상의 구분을 존재론적인 차등으로 오인, 교계조직을 마치 신분조직으로 착각, 겸손을 잃게 된다. 주님이 주인인 교회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좋은 목자는 이런 사람이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에제 34,16).

 

교회가 본질을 잃으면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빠져 위선적이 되고 이론, 관념적이 되어 죽은 말씀으로 생명의 성령을 죽인다. 성령이 죽으면 교회 지도자층의 의식 안에 서구제국주의적인 그리스도의 팽창주의, 현세 기복적 재벌 종교, 반민중적이고 사이비 미래지향적 구원 종교로 변신한다. 교회가 본질을 잃으면 세상의 세파에서 이미 완전히 구원된 방주로 착각하고 그릇된 신앙 집단을 만들어서 집단이기주의를 낳고 현실사회와 다른 또 하나의 교회사회를 형성, 이원론적으로 사는 기현상을 낳는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민중의 언어는 이해도 못하고, 그들의 감정과 눈물, 탄식을 보고 들을 수도 없고, 따라서 그들에게 기쁨이나 위로가 되지 못하고, 전혀 복음적이지 못한 교회가 되고 만다. 이런 모습은 하느님께서 기뻐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사제직, 왕직은 잘 수행하고 있으나 예언자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예언자직은 역사 속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우리 사회에서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선포하고, 불의를 고발하고 비판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희망을 안겨주는 역할이다. 이 시대의 예언자는 누구인가?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 교회가 이 시대의 구원의 표지요 상징이라면, 교회 자체가 예언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2000년 전에 한 번만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으로 끝인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는 정말 필요하지 않단 말인가? 우리는 절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면 교회가 이 시대의 작은 그리스도 역할을 해줘야 할 것이다. 너나 나나, 이 시대의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믿음을 강조하셨고, 우리는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스럽게 묻는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고.

 

이 시점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생각해 보자.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 교회를 보시면서 기뻐하시는가? 축복해 주시는 교회인가?”

 

* 소희숙 스텔라 - 툿찡 포교 베네딕도 서울 수녀회 수녀. 서울 상지 피정의 집에서 피정을 지도하면서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다.

 

[경향잡지, 2009년 2월호, 소희숙 스텔라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서울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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