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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한국 사회에서 수도회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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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01 ㅣ No.120

[경향 돋보기] 한국 사회에서 수도회의 역할

 

 

질병으로 시달리는 한국 사회

 

한국 사회는 안팎의 갖가지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다. 골병, 몸살, 타박상, 골절, 정신 분열, 착란, 기만, 사기, 위협, 자살을 동반하는 극도의 우울증, 암 등등. 소통 불능의 장애인들도 많다. 물고 물리고 찢고 찢기고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있으랴 싶다. 한국 사회의 이 현실을 대변하는 상징은 촛불이 되었다. 그렇게 2008년 제야에도 역시 촛불이 밝혀졌다. 촛불이 어둠을 밝히지만 그 역시 거친 바람 앞엔 약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람 앞에 촛불처럼 정국 자체도 흔들리고 있다.

 

정국 자체는 더 심각한 중병에 걸려있다. 정치, 역사, 교육, 노동, 언론, 경제 등이 구심점 없이 온통 흔들리고 있다. 어느 기고가는 “온 국민이 파업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고유한 가치관도 철학도 없어진 지 오래고 윤리도 도덕도 어디 있었던가 싶다. 눈 없고 귀 없는 부자 인사들은 여전히 이념 싸움으로 허송세월이고, 이 나라의 ‘경제’는 교주가 되었다. ‘재물 숭배’를 낳았고, 돈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일한 가치이자 힘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돈 외에 다른 더 의미 있는 것들은 없어지거나 감추어졌다. 한때는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고살게 해달라는 기대송도 있었다.

 

이 작은 나라 안에서 소통 결렬과 ‘00산성’이라는 장벽의 분단도 있었고, 금방 탄로 날 거짓 공략도 있었다. 사회적 동의가 빠진 폭력의 법도 횡횡하고 숫자와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독재 이데올로기도 부활했다. 다양성은 축출되고 획일적 가치만이 자리를 잡았다. 지배체제는 힘 있는 소수의 탐욕을 부추기어 영합하고, 다수의 가난한 민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축출되고, 인류 공동의 자산인 자연 공간마저 새로 둔갑한 ‘녹색 뉴딜’의 이름으로 찢기고 약탈을 당하고 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끝없는 추락의 연속이다. 권위의 근본인 신뢰는 오갈 데가 없다. 불신과 거짓과 위장된 폭력과 어이없는 싸움질이 만연하다. 혹자는 “막장이냐 최전선이냐?”를 묻는다. 보이는 폭력은 차라리 양반이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산물인 노예의 양산이다. 군대 문화는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문제의 발상지가 되고 있다. 민주 사회의 근본인 자유가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는 ‘자유가 엄청난 모욕을 당하는 사회’라고 꼬집는다. 누구에게는 자유이고 누구에게는 불법이다.

 

전인적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 이 사회에서 복종하지 않는 자유인은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쫓겨나야 한다. 그렇게 체제를 위해 교과서도 바뀌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변질되어 버린 민족의식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내몰고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과거 이 민족의 아름다운 미덕과 정취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참빛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단언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보다 더 절묘하고 정확한 대사회적인 발언이 있을까 싶다. 하느님도 기가 막혀 하고 싶으셨던 말씀들을 다 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그저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으셨을 심정을 헤아려본다. 그분은 그렇게 묵묵히 갖가지 형태의 폭력과 구조적인 악과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함께해 주셨다. 질병과 마귀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주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랑의 기적을 행하시며 믿음과 희망을 심으셨다. 한마디로 온갖 무지와 기만과 억압과 폭력과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시고 해방시키셨다. 그러면서 무지막지한 일부 사람들을 보며 한탄하셨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었으면 죄가 없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흔히 기대했던, 카리스마적인 정치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사회적 리더가 아니셨다. 그런데도 몇 년간 그는 놀라운 지혜와 유연한 태도와 말씀과 기적으로 당신의 백성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아무런 권리도 목소리도 낼 수 없었던 여성들과 약자들과 시대가 만들어낸 죄인들의 마음을 풀어주었고 그분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을 안겨주셨다. 반면 일부 못된 이들의 심사는 더 꼬이게 만드는 말 재주도 지니셨다.

 

그분의 시선과 관심은 당대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생의 대사인 결혼도 하지 않으셨다. 자신을 위한 사회적 현실 적응 능력도 별로 없어 보였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기도하기 전에 꼭 화해해야 한다고 하시고,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호언장담도 하시고,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등 꿈 같은 말씀을 지치지 않고 하셨다. 그 때문에 냉소도 당하셨다. 아무튼 그는 그리 튈 것이 없는 좌파 같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눈의 정곡을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

 

아무리 옳은 말과 행동을 했어도 그분은 자신의 짧은 생애 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어느 날 일부 유다교 골수분자들이 벼르고 별렀던 음모가 실현되고, 그래서 사형수가 되었고, 로마 제도권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 한마디로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전무후무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고, 애인이 되고, 빛이 되고, 모범이 되고 중심이 되셨다. 그분 없이 우리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성립될 수 있단 말인가? 그분과 우리 사이의 이천 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고 메울 수 있단 말인가? 한국 사회와 이분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수도생활의 최고 회칙은 복음

 

수도회는 교회 안에서 생겨나고, 은사적 차원에 속한다. 세상에서 또 다른 집단으로 존재하는 교회에는 제도와 은사적인 차원이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대신하여 늘 함께 있어줄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수도회 큰 설립자들은 그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고, 복음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도록 충동된다.

 

어느 시대에나 그들의 응답을 요구하는 역사적 도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단지 역사적, 사회적 도전에 응답하기 위해 수도회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수도회는 ‘수도생활’이라는 카리스마를 살고자 생겨난다. 수도회는 ‘무엇을 하려고’ 존재하기보다, 특정한 방식으로 ‘복음을 살려고’ 존재한다. 존재는 활동에 앞서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인 분리’의 요소들을 동반하는 실존적인 표지로 드러난다. 그 표지는 복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역사적, 사회적 요청이나 도전에 대한 그들의 응답은 먼저 철저한 믿음의 삶으로, 다음으로 삶의 자연스런 결과로서의 사명, 봉사,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수도생활은 복음의 본질을 철저히 살고자 하는 명백한 갈망의 표현이다. 그렇게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의 삶을 재현한다. 그 때문에 수도생활의 최고의 회칙은 복음이 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필요한 것 한 가지”(루카 10,42)이다. 그리고 그 표지는 시대와 지역 배경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역사적 도전 앞에서 ‘삶의 형태’로 응답

 

박해시기 교회에는 수도생활이란 카리스마가 필요하지 않았다. 초세기 신자들은 입교의 순간부터 평화 시에 필요하지 않은 수덕생활을 했고, 완덕의 정상인 순교를 준비하고 갈망하며 살았다. 한 마디로 순교가 그 시대의 수도생활이었다. 수도생활의 원시적인 모습은 정확히 박해가 끝나고 그리스도교가 공식 종교가 되었을 때(313년) 일어났다.

 

이번에는 수도생활이 순교를 대신하는 생활이 되었다. 이들 첫 수도자들은 대개 홀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사막이나 외딴 곳에서 고독한 삶의 특수성을 살았다. 그 삶은 당시 지나치게 부유하고 편리하게 정착하여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와 세상에 대한 무언의 항의가 되어주었다. 이어서 공동체에 정주하며 땀 흘려 일하고 평화롭게 기도하는 수도생활이 생겨났다. 이 시기는 불안과 방랑과 유랑생활로 특징지어졌다. 민족들의 이동으로 문화적 충돌과 폭력이 난무했던 어지러운 사회에서, 수도생활은 이들이 바라볼 수 있는 거울, 중화제, 대화가 되어주었다.

 

그 다음 시기에 수도생활은 다양한 시대적 배경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특성을 보였다. 다시 교회와 세상을 등지는 은수생활이 생겨났고, 재속사제들이 한데 모여 공동생활과 사목생활을 하는 형태도 일어났고, 신자들안에서 복음을 철저히 살고자 하는 청빈운동, 민중운동도 일어났고, 성지 탈환을 위해 전쟁을 하는 수도회도 일어났다. 좀 더 주목할 만한 형태는 초기 교회 사도생활의 쇄신을 바탕으로 문전걸식하고 돌아다니며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수도생활이었다.

 

복음의 정신은 가난이다. 그런데 그 가난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면 교회의 존립 자체가 위협에 처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돈이 우상이 되었고, 계몽된 지식인들의 등장으로 여타의 진리들이 난무했다. 이들 앞에서 수도생활은 돈을 짓밟았고, 참된 진리와 자유의 빛을 밝혀주었다. 그 다음 시기에는 더 열심히 일하면서 모범을 보이고 교회를 재건하려는 수도생활이 생겨났다. 근세 사회는 정치, 종교, 문화, 지리, 과학기술, 인문주의 전반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고, 이런 배경에서 교회는 자신의 고유한 복음을 살아갈 새로운 개혁가들을 필요로 했다.

 

이후 계몽주의가 팽배하고, 고리처럼 이어진 혁명들의 배경에서 물적 재산을 약탈당한 수도생활은 더 단순한 삶의 형태로 더 확장된 봉사를 하거나, 더 깊이 숨어 관상생활을 하거나, 아예 세상 속으로 숨어 들어가 복음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에는 종교의 벽을 허물고 초교파적 새로운 일치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려면 얼마간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도전들 앞에서 수도생활은 무엇보다 먼저 복음의 본질을 사는 ‘특정한 삶의 형태’로 응답하였고, 그 결과로서의 사명, 시대적 사회적 요청들에 대한 선익이 되어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수도회의 역할

 

한국 사회에서 수도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진리와 사랑과 자유를 살며 드러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1. 예수님의 존재 이유는 명백했다. 그는 압바(Abba)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존재했고, 수난도 죽음도 불사했다. 그분 안에서 실현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신비는 단지 그분이 사랑했던 일부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마음을 열고 그를 찾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이고 믿음이고 희망이고 선물이었다.

 

2. 예수님은 모나고 험하고 상처 입은 세상을 모성의 사랑으로 끌어안으셨다. 사랑은 법을 모른다. 비판하고 징벌하고 심판하기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도록 가르치고 이끄셨다. 악을 악으로 이길 수 없고, 오직 선으로만 사랑으로만 이길 수 있다는 진리를 당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셨다.

 

3. 예수님은 더 깊은 영역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갈망을 깨우치고 보이는 현상 이면의 세계를 자극하고 열어주고 변화하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아름다운 인간의 의미와 모습을 되찾아주셨다. 그렇게 그는 진정한 인간의 해방자요 혁명가가 되셨다.

 

4. 기도 안에서 배양되는 빛과 영적인 영향력은 소리도 없고 단번에 이해받지도 못하고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항구히 깊은 곳을 유유히 흐르는 지하수처럼 그 물이 샘솟는 곳마다 예수님이 주신 참 생명을 잉태하는 동력이 된다.

 

5. 그분이 보내신 성령은 오늘도 역사의 주역으로 어떤 사람들 안에서 힘차게 이 소명을 불러일으키신다. 먼저 예수님처럼 살기를, 그분처럼 말하고 그분처럼 행동하고 그분처럼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자신을 바치도록 충동하신다.

 

6. 그리고 이편과 저편의 경계선상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되고, 비유가 되고, 이정표가 되게 하신다.

 

* 강운자 루실라 -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스페인 살라망카 교황청 대학교에서 수도생활신학을 전공하였고 현재는 주로 수도회 안팎에서 양성 강의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2월호, 강운자 루실라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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