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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15: 5ㆍ18 광주민주화운동과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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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1 ㅣ No.132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15) 5ㆍ18 광주민주화운동과 가톨릭교회


그날의 십자가, 오늘의 파스카 신비로 승화해야

 

 

1980년 '5ㆍ18광주민중항쟁'이후 29년 세월이 흘렀다. 5월의 무고한 희생을 기억하며 명예를 회복하고 추모하기까지에는 숱한 이들의 기도와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이 뒤따랐다.

 

가톨릭교회도 5ㆍ18 민중항쟁을 통해 정의를 외치고, 진리의 증언자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광주대교구는 2005년 5ㆍ18 광주민중항쟁 25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고 승화시키고자 5ㆍ18을 '교구 기념일'로 선포하고, 5ㆍ18과 지역 민주화의 심장 역할을 한 남동성당을 '5ㆍ18기념성당'으로 지정함으로써 그 정신을 잇고 있다.

 

- 올해로 29주기를 맞는 광주민중항쟁에서 희생된 열사들이 묻힌 망월동 국립묘지에는 유족들의 눈물이 아직도 계속 흐른다.

 

 

■ 광주, 그리고 무등산

 

1980년 5월 17일 자정. 전국에 비상계엄이 확대됐다. 일부 정치군인들이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12ㆍ12사태에 이어 벌인 '제2의 쿠데타'였다. 정치활동과 시위가 금지됐다. 광주엔 18일 7ㆍ11공수여단이 진입했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였다. 그럼에도 광주에선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 언론 자유 보장 등을 반대하는 시위가 전개됐다.

 

항쟁의 도화선은 5월 18일 전남대에서 최초로 불붙어 시내 금남로로 옮겨갔다. 희생자가 속출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이 군홧발에 짓밟히고 곤봉으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야 했다.

 

당시 광주대교구장이던 윤공희 대주교는 이 상황을 교구청사(현 가톨릭센터) 6층에서 직접 지켜보고 자신의 자료집에 포함된 '오월항쟁일지'를 통해 증언을 남겼다.

 

윤공희 대주교, 생생한 증언

 

"…그때 군인들이 서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얼마나 어떻게 맞았는지 흰 셔츠를 입은 앞가슴과 등에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질펀하게 주저앉아 있다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금남로를 향해 몇 걸음을 옮기다 그 자리에 쓰러지곤 했다. 금남로엔 군인들이 시민들을 길 한가운데에 한 사람씩 엎어 놓고 군홧발로 목을 밟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엄군의 행동은 거칠어졌다. 여기저기서 머리를 아스팔트에 대고 몸을 돌리게 했고 군홧발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또 붙잡힌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곤봉으로 내리쳤다.…"

 

상황은 악화됐다. 무고한 시민들을 구타하고 강제연행하는 계엄군에 분노한 시민들도 시위에 동참했다.

 

그리고 21일 '집단 발포'가 전남도청 앞에서 이뤄졌다. 10여 분간 이뤄진 발포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나주, 화순 등지로 빠져나가 자구책으로 경찰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무장, 시민군으로 탄생했다.

 

조철현 신부 등 수습위원에

 

갈수록 사태가 악화되자 중재가 이뤄졌다. 22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독립유공자 최한영씨를 비롯해 광주대교구 조철현ㆍ정규완ㆍ이영수 신부 등 종교계와 언론계, 학생, 교수, 노동자, 행정관서 대표 등 20여 명이 수습위원으로 위촉됐다. 남동본당 주임 김성용 신부 등 12명도 또 다른 수습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계엄군측과 협상은 무산됐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개시됐다. 이른바 '충정작전'이었다. 신군부는 2만여 명에 이르는 최정예 부대를 동원해 참혹한 살상을 저질렀다.

 

열흘간 민중항쟁으로 인한 희생자는 1997년 말 현재 사망자 166명, 부상 후 사망자 83명, 부상자 2710명, 연행ㆍ피구금자 508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 시민들과 함께 십자가를 짊어진 교회

 

5ㆍ18 항쟁이 일어나기 꼭 열흘 전,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시국담화를 발표했다. 골자는 비상계엄 해제와 언론 자유 회복, 민주정치 정착 등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광주는 민족의 십자가를 홀로 져야 했다.

 

윤 대주교는 그해 5월 24일자로 발표한 '성령강림대축일 전날 특별서한'에서 이렇게 밝혔다.

 

김성용 신부에 15년 형 선고

 

"오늘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사망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비통과 통탄은 말로써 다 표현할 길도 없고 아무것으로도 기워 갚을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자비로우신 품 안으로 그들의 영혼을 데려가 주시도록 눈물어린 기도를 주님께 바칠 뿐입니다.…"

 

- 지난 2005년 5월 16일 광주민중항쟁 사적 제25호로 지정된 남동성당에 사적표지석이 세워졌다. 교구장 최창무(왼쪽에서 다섯 번째) 대주교와 총대리 김희중(왼쪽에서 네 번째) 주교 등이 표지석을 제막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광주대교구의 활동 가운데 주목할 만한 점은 김성용 신부 등 교구 사제들이 시민수습대책위에 들어가 난국을 타개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특히 김성용 신부는 남동본당에서 대책수습회의를 갖고 해결을 도모했으나 신군부는 오히려 5월 27일 김 신부 체포령을 내린다. 이에 김 신부는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잠행을 통해 상경, 광주 상황을 전하고 다시 광주로 내려가 6월 14일 계엄사에 자진출두해 폭도로 내몰린 광주시민을 대변하고 군부독재를 질타하다가 구속돼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구속 수감된 지 1년 2개월만인 이듬해 8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매주 월요일 남동성당에서 구속자 석방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를 가졌다.

 

남동성당, 5ㆍ18 사적 제25호로

 

이후 25년간 남동성당은 5ㆍ18 추모미사와 시국집회, 시국강연회 등이 잇따라 열려 민주화운동의 보루 역할을 했다. 남동성당은 2005년 4월 18일 광주광역시에 의해 5ㆍ18 민중항쟁 사적 제25호로 지정됐다.

 

광주대교구와 맞닿은 전주교구도 5월 23일 긴급사제총회를 열어 △ 광주 항쟁에서 희생된 민주시민들을 위해 위령미사를 바치고 △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께 십자가를 짊어진 전주교구 사제들은 전국 곳곳에 광주의 진실과 자신들의 결의를 알리는 유인물을 보냈다.

 

한국 주교단도 23일자로 전국 신자들에게 특별기도를 요청했다.

 

교회에서도 수난이 이어졌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오태순ㆍ장덕필 신부가 옥고를 치렀고, 김택암ㆍ안충석ㆍ양홍 신부 등이 보안사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전주교구 박창신 신부는 군인들이 자행한 테러에 중상을 입었다.

 

5월이 지나도 신군부에 의한 연행과 구속, 고문의 회오리가 끊이지 않자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광주사태에 관한 진상'이라는 성명을 발표, 광주항쟁의 비극적 원인이 당시 정부와 일부 군부의 광적 살인행위에서 기인한 것임을 천명했다.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도 6월 2일 윤 대주교에게 광주항쟁의 진실을 듣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진정한 국민적 화합을 이뤄주기를 앙청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강요된 침묵과 절망이 모두를 짓눌렀고, 이후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 책임자가 처벌되기까지엔 17년 세월이 필요했다. 발포권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6년 3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다.

 

자유와 평화의 디딤돌로

 

그리고 이듬해 4월 대법원은 반란 수괴ㆍ내란 목적 살인, 상관 살해 미수, 뇌물 수수 등 혐의로 피소된 두 피고인에게 각각 무기징역과 17년 형을 선고했다. 이어 국회는 '5ㆍ18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은 정당한 행위로 역사에 다시 기록됐다.

 

다시 기록된 역사는 과연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올해로 5ㆍ18 29주기를 맞은 광주대교구는 5ㆍ18광주항쟁을 파스카 신비로 승화시켜 영성화하고 있다. 광주의 아픔을 21세기 자유와 평화의 디딤돌로 삼으며, 새로운 내일을 위해 화해에 동참해야 한다는 진리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재학 신부는 "우리 신앙인 각자가 삶 속에서 5월을 새로운 파스카의 신비로 체험할 때 5ㆍ18정신은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여기서 살아 숨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신문, 2009년 6월 21일, 오세택 기자, 김상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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