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아! 어쩌나: 주님 죽음을 묵상하면 힘들어요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7 ㅣ No.496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49) 주님 죽음을 묵상하면 힘들어요

 

 

Q. 사순 동안 주님 수난과 죽음을 묵상했더니 마음이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죄를 지어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어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보고 지나치다고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주님 죽음을 묵상하고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한 죄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웬일인지 마음도 몸도 힘이 듭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A. 주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신심행위는 당연하고 좋은 기도생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돌아가심을 묵상하면서 주님과 우리와 내적인 관계의 긴밀함을 느낄 수 있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지요. 또 일상 안에서 영혼의 감각이 무뎌져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그런 묵상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 죽음을 묵상하면서 지나친 죄책감을 갖는 것입니다. 지나친 죄책감은 건강한 죄책감과는 달라 사람이 일상생활을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하도록 돕는 게 아니라 반대로 병적 삶을 살도록 합니다. 이런 병적 죄책감은 어느 순간에는 반대되는 감정 즉, 적대감으로 바뀔 가능성이 큽니다.

 

예컨대 중세 십자군 원정시 수많은 유다인을 죽인 것은 바로 이런 병적 죄책감이 적개심으로 변화하는 탓에 발생한 정신병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감정이 극에서 극으로 치달은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주님 죽음을 묵상하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자책하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은 주님 죽음의 다른 면을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외롭고 힘든 죽음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다가 관계 안에서 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죽음이란 것은 그동안 맺었던 수많은 관계를 정리하고 삶이란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맺은 관계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가 죽음의 내용을 결정짓는 데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죽어가는 내 곁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깊은 안도감과 행복감을 가집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주님 죽음은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행복한 죽음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 주님께서 죽음을 맞으실 때 그 주위에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먼 발치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눈을 마주치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주님을 기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으니, 주님 죽음이야말로 행복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도 주님처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많은 이의 애도를 받는 죽음을 맞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깊은 묵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생전에 사람을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떤 면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 바로 자신을 위한 삶임을 알려주기 위한 가르침이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면 내가 사랑을 베푼 사람들이 바로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내 곁을 지켜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주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행복한 죽음을 맞은 분을 들라고 한다면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 종교와 종파를 떠나 온 국민이 그분들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했으니, 그분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으신 분들, 다시 말해 호상 중의 호상을 맞은 분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생전에 사람들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보상을 받으신 것입니다. 자매님께서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성찰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성찰이 심한 죄책감을 불러 일으킨다면 잠시 묵상 주제를 바꿔서 주님 죽음의 행복한 부분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들, 나를 위해 애도해 줄 사람들을 얻기 위해 어떤 선행을 할 것인가, 어떤 봉사활동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자매님께서 그렇게 묵상 방법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 주님의 죽음과 자신의 죄를 연관짓는 묵상만을 한다면, 종교적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분노하고 학대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식적이지 않은 분노를 터뜨리는 신경증적 상태에 빠질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외형상 열심함이 내적 건강함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할 수 없으니 자매님 정신 건강을 지키는데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0년 4월 18일, 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



42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