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강론자료

2015-0906.....연중 제23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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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9-05 ㅣ No.1856

연중 제23주일 (나해)

이사야 35,4-7ㄱ       야고보 2,1-5      마르코 7,31-37

2015. 9. 6. 이태원.

주제 : 듣고 말하는 것의 중요성

우리가 하루에도 듣는 소리는 그 수량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언젠가 들은 얘기입니다만, 사람에게 귀가 두 개가 있고 입은 하나만 있는 이유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얘기를 아십니까?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제가 들었다는 그 얘기와 같은 의도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담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오래전에 그 말을 들으면서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귀가 두 개가 있고, 입이 하나가 있는 것은 말하는 분량보다 듣는 분량을 더 많이 하라는 것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말하는 분량보다 2배로 들어야 할 소리를 듣는 대신에, 말을 더 많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나마 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표현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듣는 것보다는 자기 소리만 내고 싶은 사람은 제대로 듣지 않는 사람이라거나 옳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판단도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길에서 움직이신 꽤 긴 거리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긴 일정을 정리하는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인으로 사는 일에 듣는 것은 행동하는 것의 기본이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선포를 하는 과정에 예수님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명성에 덧붙여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이 드러낸 첫 번째 행동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그분께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이 듣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아서 예수님에게 그렇게 한 것일까요

 

헌데, 예수님은 귀머거리요 말을 더듬던 그를 사람들이 보는 데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그에게 기적을 베푸셨고 다시 들을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게 하신 다음, ‘그렇게 바뀐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가능한 소리라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일까요? ‘귀머거리요 말을 더듬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뻔히 보이는 일이었는데, 또 그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다 아는 것이었을 텐데, 왜 그렇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읽은 것은 한글로 된 것이니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생각과 다른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개인의 삶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말로만 드러내는 것이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듣는 일은 수동적인 행동입니다. 바꿔 말하면 내가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해야 잘 들을 수 있다는 소리도 가능하겠지만, 내가 들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소리를 내주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동적인 행동인 것이 분명한 행동입니다. 그에 비교해서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재촉이나 권고가 필요하지 않은 나의 능동적인 행동이고 그 능동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능동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의 2배가 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잘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해야 할 과정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하느님의 소리가 세상에 울려 퍼지면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들릴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그가 비록 눈이 멀었고 귀가 먹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소리는 그의 삶에 와 닿을 것이라고 야고보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제가 이렇게 바꾸어서 질문으로 물었습니다만, 이 소리는 가능성을 묻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중동의 먼 나라, 시리아에서 생긴 문제로 독일과 스페인의 지방정부들이 죄 없고 탓 없는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우리사회에서는 어디에서 보겠습니까

 

멀리서 찾아야 할 일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삶에서부터 찾아야 할 일입니다. 이태원성당의 주일미사에 나오시는 여러분은 그러한 행동을 어디에서부터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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