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17 주간 금요일.....200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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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08-04 ㅣ No.784

 

연중 제 17 주간 금요일 - 짝수 해    

              예레미야 26,1-9     마태오 13,54-58

      2006. 8. 4. 무악재. 

주제 : 삶의 위협

세상에서 아무런 불편없이 ‘룰루랄라’하면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질문은 쉬워도 대답은 어려운 것이 이 질문일 것입니다.  똑같이 사용하는 말이라도 그 안에 담을 뜻은 사람들마다 다르기때문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둘러봐도 나 만큼 힘겹게 살고, 나 만큼 고생하는사람이 없다고 말하기 쉬운 것이 사람들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뜬히 현실을 이겨내고 즐기며 사는 듯한데. 왜 내 삶은 힘들까...하고 말하기 쉬운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삶에 대한 판단기준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이 될 수는 있어도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것에 익숙해지다보면, 삶의 자세도 변하게 됩니다.  그렇게 변화되기 시작하는 첫 순간에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하지만,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고 현실에 지배를 받는 존재들이기에 몸에 다가오는 유혹을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무척이나 착하고 선하게 보신 듯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서, 백성들이 개과천선할 거라는 소리, 즉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의 악행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려는 재앙을 거두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의 물을 온통 흐리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미꾸라지 한 마리가 큰 연못을 흐리게 하는지는 몰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드러내는 삶의 모양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큽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세좋게 전한 예레미야 예언자였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살해의 위협이었습니다.  ‘너 그렇게 까불면 죽어....’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어째서, 하느님의 분노가 실현되는 장소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소리를 해도 내 삶이 변할까 말까인데, 네가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순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실현될 일은 사람이 요동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그 실현시기가 빨라지거나 늦어지거나 차이뿐일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듣고 그 말의 내용을 무시한다면 달라질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는대로 보는 법입니다.  나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 특별한 행동을 해봐야 나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혈연관계, 친분관계, 지역연고등으로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기는 하지만, 항상 그렇게 산다면 문제도 생길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권리를 소유한 사람들의 무리에 속해 있을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내 삶이라고 해서 비겨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법입니다.  세상을 사는 합당한 자세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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