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강론자료

연중 13 주간 목요일.....2006.7.6.

스크랩 인쇄

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6-07-06 ㅣ No.761

 

연중 제 13 주간 목요일 - 짝수 해        

              아모스 7,10-17              마태 9,1-8

      2006. 7. 6. 무악재

주제 :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삽니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겠다는 자세를 뭐라고 할 일은 아니지만, 과연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들, 사람의 오감을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들이 정말로 불변의 중요성을 갖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저 역시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사람이 갖는 특징의 하나는 그 마음과 태도에 따라 같은 대상을 같은 시간동안 본다고 해도 그 남은 의미나 효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 존재로서 사람이 드러내는 태도나 삶이 자기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친다면 별 불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고, 그렇게 적용되는 것들이 올바르지 않다는 판단이 선다면 거기에서 생기는 문제는 보통을 넘게 됩니다.


오늘 독서는 정치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사제 아마츠야와 하느님의 예언자 아모스가 부딪히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만 듣고 판단해서는 실제로 일이 어떻게 결말을 맺었는지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왕립 사제 아마츠야는 하느님의 뜻을 빙자해서 우리나라를 위협하지 말라는 말을 했고, 아모스 예언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를 향하여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과장해서 강조한다면 목숨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공통점의 하나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그가 굳건히 설 수 있는 힘을 따로 어디에선가 얻은 것도 아니었는데, 아마도 경험을 중요시하는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만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고향에서 겪은 일 한가지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한다는 일이 실제로는 자기들 삶에 위협이 되지 않았는데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부칩니다.  신정(神政)체제가 적용되던 지역에서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들의 태도가 훗날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힘겨운 소리를 했던 아모스 예언자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일어나야하고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쉽사리 소홀하게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순전히 사람의 생각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느님의 뜻은 어떤 것이겠는지 한번쯤 더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24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