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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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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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1-30 ㅣ No.377

김천애 안드레아(1760-1801년)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 아우구스티노의 집은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 김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그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으며, 교리의 가르침을 굳게 지킬 줄도 알았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유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뒤를 이어 김 안드레아도 그의 맏아들인 유중철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내 감영에서는 김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와 밀고를 강요하였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김천애 안드레아의 신앙은 형조에서도 한결같았다.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십계명을 버릴 수는 없으며, 한 번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진술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또는 8월 28일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저에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 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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