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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와 적응주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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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9 ㅣ No.114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의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와 적응주의의 탄생*



국문 초록

 

말라카에서 일본인 안지로와의 우연적 만남에 의해 하비에르(스페인어 : Francisco Javier, 方济 · 沙勿略, 1506~1552)의 일본선교가 가능했다고 보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하비에르는 일본선교 이전에 이미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선교를 계획했고, 이 계획에 따라 일본에 온 것이었다. 일본에서 안출된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담지한 현지문화 친화적 적응정책은 이러한 선교 프로젝트의 한 결과로서,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적응주의 선교정책의 초기형태가 되었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2장)에서는 하비에르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인식과 정보를 취득하게 된 경위와 특징을 분석한다. 3장에서는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의 의지와 계획을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살펴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첫째, 교황대사이자 국왕 순찰사로서 그의 자격에 준거하여 동아시아 선교를 구상했다. 둘째, 다른 수도회, 구체적으로 프란치스코회와의 동아시아 선교협력을 요청했다. 셋째, 예수회 동료이자 부하인 베르제(Jaspar Berze) 신부를 동아시아 선교를 위해 준비시켰다. 4장은 하비에르가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를 실행으로 옮기면서 일본을 방문하였고, 다른 선교지역과 다른 고등 문명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에 준거하여 기존과 달리 철저히 선교지 지역 문화에 대한 고려와 적응적 자세로 자신의 행위전략을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대단히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하비에르의 적응적 행위전략은 세 가지 제도 수준에서 관찰된다. 첫째,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강한 일본 사회(동아시아)에 적합하게 지배 엘리트계층의 선교에 집중한다(정치). 둘째, 선교지의 문화 권력으로서의 토착종교 불교의 문화적 상징을 일정 부분 수용하지만, 민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토착종교와 경쟁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것은 신학적 보수주의로 드러난다(종교). 셋째, 선교지 사회가 필요한 상업과 무역을 촉진함으로써 선교의 자유를 확보한다(경제). 하비에르는 정치, 종교, 경제의 제도영역에서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위치를 강화함으로써 선교의 용이성과 민중들에 대한 종교적 헤게모니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본고는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담지한 적응주의 전략을 세 개의 제도적 수준에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계획과 일본에서 안출된 엘리트주의적 선교정책은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 그리스도교 복음화의 적응전략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1. 들어가는 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포르투갈 리스본과 인도 코친에 이르는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면서 동서 문명 간 교류는 활발해졌다. 이 시기로부터 비롯된 문명 간 교류는 동서양 문명에 근대라 부르는 새로운 사유와 사회질서를 촉발하게 되었다.1) 유럽이 세계를 향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뻗어 나가던 이 시대를 배경으로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 발생한 만남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이 종착점이 되었다. 유럽이 동아시아를 향해 뻗어 나가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은 인도의 고아를 중심으로 인도양 동쪽 말라카의 서쪽에 군사거점을 설치하고 보호세 명분으로 아시아의 선박에 세금을 징수하는 해양제국을 수립했다. 포르투갈의 세력은 말라카 해협에서 동쪽으로 몰루카 제도, 일본해 그리고 남지나해를 향해 나아가며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을 무역의 대상으로 두고 싶어했다. 이 시기에 선교사들은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 문관(文官)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는데, 그 대가로 선교의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2) 1549년,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3)가 일본에 도착한 것도 이러한 배경 아래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한 이후 포르투갈인의 입항금지가 내려진 1640년까지의 약 100년을 그리스도교의 역사가들은 일본의 ‘기리시탄 세기(Christian Century)’4)라 부른다.

 

문명론의 관점에서 초기 근대의 유럽인들은 문명단수론을 고집했다. 그리스도교 라틴문명이 이 세상의 유일하고 최고의 문명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발견과 선교 프로젝트는 새로운 고등 문명이 존재함을 유럽 사회에 알리게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 지식인들은 문화간 접촉의 매개자로서 유럽과 동아시아 문화의 지식과 기술을 양쪽으로 전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술 문명의 진보뿐만 아니라 지역의식과 세계관의 확장을 돕게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가 매개된 교류는 두 문명에 때로는 모순적인 조화를 창출한 것으로 보인다.5) 이러한 조화는 적응주의란 인식과 행위의 규범 속에서 창출되었다. 두 문화 간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유사성을 색출하여 상호이해를 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6)

 

오늘날 초기 근대 동아시아 문명형성에 영향을 미친 예수회 지식인들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와 그 후예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오 리치 이전의 하비에르의 적응주의 유훈이 사실상 동아시아 적응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학계는 이 사실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 듯하다. 요시노부 후카츠(深津容伸)의 말처럼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에서 적응주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들어온 후 시작되었고, 이후 동아시아에 입국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 기초 위에 그리스도교라는 집을 세운 것이다. 적응주의는 하비에르가 일본에 들어와 일본 문화와 일본인이 중시하는 불교를 연구하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쉽도록 용어나 의례형식을 변형하기도 하면서 외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일본인의 감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에서 출현하였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하비에르에 대한 시각은 적응주의의 안출자로서보다는 단순히 인도와 아시아 선교의 선구자, 또는 그의 탁월한 덕행과 영성적 영웅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비에르의 출판물로는 16세기 그의 서간 몇몇 판본들이 나와 있으며,8) 20세기 들어 예수회의 쉬르하머(Georg Schurhammer)가 그의 서간과 연구 사료들을 집대성하였다.9) 한편 현 시대의 역사학자 고노이 다카하시(五野井隆史)는 하비에르 서간과 당시 사료를 통해 그가 일본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에 대해 가졌던 인식과 선교계획을 다루었다.10) 또, 키시노 히사시(岸野久)는 오랜 기간에 걸쳐 하비에르 동아시아 선교계획의 전모를 연구하여 하비에르가 일본에 오기 전부터 중국과 일본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고 중국선교를 기획해 왔다는 사실을 밝혔다.11) 하비에르는 중국과 일본을 포괄하는 지역 단위로서 동아시아를 상상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선교를 실행했다는 것이다. 히사시는 또한 다양한 사료를 통해 하비에르가 교황대사로서 가졌던 신분적 자격, 다른 수도회와의 동아시아 협력 추진, 일본 도항 전 베르제와 같은 예수회 동료들을 사전에 준비시킨 사실 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히사시의 연구에는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의 개별 사건들만을 다루고 있고, 이 프로젝트 안에서 안출된 적응주의의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본고에서는 하비에르의 선교 프로젝트의 기획단계에서부터 발생했던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 및 선교에 대한 계획 그리고 일본 도착 후 실행한 선교의 일련의 내적 과정 속에서 태동한 적응주의 방법의 형상을 조명하려고 한다. 즉, 일본선교가 말라카에서 안지로라는 일본인을 만나 우연히 수행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의 틀 안에서 계획적으로 준비된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예수회의 동아시아 적응주의의 초기 구상이 안출되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 일본에서 출현한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담지한 적응주의가 하비에르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 특화된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이 글의 본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부분(제2장)에서는 하비에르의 적응주의적 선교행위의 인식론적 토대로서, 동아시아 문명의 이해와 특징에 대해 살펴본다. 두 번째 부분(제3장)은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의 의지와 계획의 역사적 단초들을 제시하고 분석한다. 세 번째 부분(제4장)은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의 한 과정으로 수행된 일본선교에서 색출된 적응주의 선교전략의 특징을 세 가지 제도적 수준에서 설명한다. 첫째,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강한 일본 사회(동아시아)에 적합하게 지배 엘리트계층의 선교에 집중한다(정치). 둘째, 선교지의 문화권력으로서 토착종교인 불교의 문화적 상징을 일정 부분 수용하지만, 민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불교와 경쟁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것은 신학적 보수주의로 드러난다(종교). 셋째, 선교지 사회가 요구하는 상업과 무역을 촉진함으로써 선교의 자유와 효율성을 확보한다(경제).

 

 

2.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문명 인식

 

인도 고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하비에르는 일본으로 오기 전 이미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과 선교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하비에르는 1549년 일본에 도항하기 이전부터 다양한 루트를 통해 중국과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동아시아에 고도로 발달한 독자적 문명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 인식에 준거하여 동아시아 선교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겼다. 1551년 2월 하비에르는 일본을 떠나 고아로 향했고, 그 도상에서 중국 상추안(上天島)에 머물며 중국선교를 시도했는데, 이것이 일본선교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통설이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중국선교는 일본에 오기 전 인도에서부터 계획했던 동아시아 선교 로드맵에 따른 것이었다. 이 장에서는 하비에르가 일본과 중국문명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경위와 문명에 대한 이미지와 특징을 분석해 본다.

 

하비에르가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할 무렵에도 그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다. 게다가 중국정부의 폐쇄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선교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12) 하비에르는 일본에 대해 알기 전부터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관심은 1547년 12월 말라카(Malacca)에서 일본인 안지로를 만나고 난 이후 생겼지만, 중국에 대해서는 그보다 2년 전인 1545년에 인도 해안의 산토메(Santhome)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료가 있다. 산토메에서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성 토마스가 중국선교를 계획했다는 전승을 하비에르가 듣게 된 것이다. 이후 하비에르는 중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였다.13) 하비에르는 1548년 고아에서 안지로와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중국이 1인 지배하에 통합되었다는 것(주원장의 명 건국),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발달한 행정제도를 갖춘 법치국가이며 학문, 교육, 지식인이 성행하는 문명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이 같은 문명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에 있어 밀접한 상호관련성이 있으며, 외국인의 입국을 엄격히 제한한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고 이 지역에 대한 선교를 구체적으로 구상하게 된다. 하비에르는 1548년 1월 20일 코친에서 로욜라의 이냐시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최초로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동아시아 선교를 위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교도의 마을을 가기 위해, 성덕이 뛰어난 예수회원을 보내주십시오. 그 예수회원은 몰루카 제도라든지, 지나(중국)이든지, 아니면 일본이든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할 필요가 있는 어디든지 (…). 지나나 일본에 대해 또 그 외의 사람들의 일에 대한 보고서를 이 편지 안에 넣어 보내기 때문에 이것을 읽는다면 어느 정도의 사람이 필요할지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14)

 

이제 하비에르의 일본과 중국에 대한 인식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하비에르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구체적인 지식을 갖게 된 것은 주로 세 개의 정보 원천에 근거한다. 첫째, 포르투갈 선장 조루즈 알바레스(Jorge Alvarès)의 ‘일본 정보’15), 둘째, 예수회원 니콜라오 란치롯트(Nicolao Lancilloto) 수사가 고아에서 안지로에게서 듣고 정리한 ‘일본 정보’16), 셋째, 안지로와 그 동료들로부터 직접 얻은 정보이다. 하비에르는 그가 일본인 안지로를 만나기 이전에 알바레스 선장뿐 아니라 다수의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일본 도항을 권유받았다. 하비에르가 일본의 문명 인식에 대해 처음 언급한 서한은 1548년 1월 20일 로마에 있는 동료들에게 보낸 것으로 인도코친에서 발신한 것이다.17)

 

말라카의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 내가 대단히 신뢰하는 포르투갈 상인이 있었는데 그가 중대한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근 발견된 일본이라 불리는 큰 섬에 대한 것입니다.18) 그 섬에 우리의 신앙을 전하면 일본인들은 인도의 이교도들에게서 볼 수 없는 강한 지식욕이 있으므로, 인도의 어떤 지역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포르투갈 상인들과 함께 안지로라 불리는 일본인이 왔습니다. (…) 만약 일본인이 안지로처럼 지식욕이 왕성하다면 새로 발견된 모든 지역 중 일본인이 가장 지식욕이 왕성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안지로는 교의요목을 모두 썼습니다. 또 교회에 가끔 와 기도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습니다. 나(하비에르)는 안지로에게 만일 내가 일본에 가서 천주교를 전한다면 그들이 신자가 될지 물었습니다. 안지로는 자기 고향 사람들이 즉시 신자가 되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 나에게 얼마나 지식이 있는지를 볼 것이고 무엇보다 내 생활이 내가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고 있는가를 볼 거라고 합니다.19)

 

하비에르는 일본인이 이성에 근거하지 않으면 신앙으로 인도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인에 대한 하비에르의 인식은 인도와 비교할 때 고도로 문명화된 인종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선교의 기대효과가 높았다. 일본에 도착하기 전 일본에 대한 그의 서한에서도 일본인이 사려 깊고 신과 학문에 대해서도 지식욕이 있다는 것, 호기심이 강하고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픈 욕구가 있다는 것, 가르침이 일단 받아들여지면 그들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20) 당시 포르투갈이 경험했던, 모잠비크, 인도, 말라카 도서 지역의 원주민과 달리 일본은 유럽인과 대등할 정도의 문명국이라는 정보를 하비에르는 얻게 되었다.

 

한편 하비에르는 일본선교에서 만난 포르투갈 상인과 중국인을 통해 문명의 중심으로서의 중국의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었으며 동아시아의 동질적인 지역의식을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인은 백인입니다. 일본국 근처에는 지나(중국)라는 나라가 있고, 전에 썼던 것처럼 일본의 여러 종파는 지나에서 전해진 것입니다. 지나는 큰 나라이고 평화로우며 전쟁이 없습니다. 거기에 있는 포르투갈 상인에 따르면 정의가 대단히 존중되며, 그리스도교 국가 어느 곳에도 없는 정의로운 나라라고 합니다. 일본이나 다른 지방에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지나인은 대단히 예민하고 재능이 풍부하고, 일본인보다 훨씬 우수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21)

 

하비에르는 동아시아 문명의 종주국으로서 중국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하비에르는 종교개혁으로 위기에 직면한 유럽의 상황에서, 건너편 세계에 유럽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문화를 가진 지역을 발견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정신을 전파할 새로운 문명 공간의 창출 가능성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다.22) 이러한 기대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지 못했던 문명에 대한 존중과 개방적인 유연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선교의 으뜸가는 규범이 된 적응주의 선교 방법은 몇몇 개인의 뛰어난 인품과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닌 선교지 문명의 맥락에 대한 이해로부터 창출된 것이다. 하비에르의 적응주의는 이러한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인식에서 도출되었다. 1549년 1월 12일에 로마의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과 중국에 대한 톱-다운 엘리트주의적 선교 방법의 단초를 읽을 수 있다.

 

일본은 지나(중국) 근처의 섬입니다. 거기의 모든 사람은 이교도인데 이슬람교도도 유다교도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상당히 지식을 추구하고 신에 대해서도 그 외의 자연현상에 대해서도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기쁘게 일본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일본인 사이에 우리 예수회원들이 살면서 영적 성과를 거둔다면 예수회의 생명을 지속해 나갈 거라 생각합니다. (…) 특히 바오로(안지로)는 우수하여, (…) 포르투갈어로 상당히 긴 편지를 썼습니다. 바오로는 8개월 만에 포르투갈어를 읽고 쓰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묵상(기도)에 있어서도 큰 진보를 이루어냈고 신앙을 대단히 잘 받아들입니다. (…) 우선 국왕이 있는 미야코(교토)로 가고, 다음으로 학문이 성행하고 있는 제 대학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a).23) 바오로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신봉하는 가르침은 천축이라는 지역에서 나와 중국을 거쳐 타타르(몽골)를 경유하여 전달되었다고 합니다(b).24)

 

하비에르가 기존 선교지에서 펼쳤던 선교 방법25)보다 더 문화적응적이고 톱다운-엘리트주의적인 선교 전략을 구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a). 하비에르의 일본 문명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성격의 기원이 천축, 몽골, 중국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지역으로 소급 확대된다(b). 선교에 있어서 문자와 지식을 중시하고 사회의 지도층 계급에 집중하는 톱다운 선교, 문화 권력을 생산하는 기성 토착종교와의 대결을 위해 지식사회(사원)에서 주도권을 얻으려는 엘리트주의적 선교 구상의 맹아를 위 서간에서 간취할 수 있다.

 

 

3. 동아시아 선교의 의지와 계획

 

하비에르는 일본 도항 이전부터 중국과 일본(동아시아) 선교에 대한 의지와 계획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의지와 계획의 연속성 안에서 일본과 중국선교를 실행했다. 하비에르의 신분 자격, 프란치스코 수도회와의 협력, 동료 베르제와의 선교계획 등을 살펴볼 때 그의 동아시아 선교가 즉흥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의지적이고 계획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하비에르의 신분적 정체성

 

먼저 하비에르의 신분적 정체성을 살펴보자. 우선 그가 교황대사이자 포르투갈 국왕 순찰사의 신분에 있었다는 점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선교적 사명과 의지를 갖게 된 토대가 되며, 선교 활동에 이러한 자격은 적극적으로 전유된다. 포르투갈 국왕 조왕 3세(João III 재위 1521~1557)는 아시아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포교를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실시했다. 교회조직의 측면에서 1534년 고아에 주교구를 설정하고, 프란치스코회의 후안 데 아르부케르케(Juan de Albuquerque)를 주교로 파견하였다. 하비에르는 1542년 5월 6일 인도 고아에 왔다. 그곳에 파견될 때 그는 세 개의 신분적 자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황대사(nuntio), 포르투갈 국왕 순찰사, 아시아 지역 예수회 최고 장상이었다. 특히 교황대사의 신분은 사도좌를 대신하여 아시아 지역 가톨릭교회의 사목을 감독하는 자리이다.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Padroado)에 입각하여, 인도와 아시아 지역의 교황대사는 교황청과 포르투갈 국왕 사이의 합의에 의해 임명되는 자리로서, 포르투갈 정부의 다양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위치였다.26)

 

하비에르가 교황대사로서 아시아에 파견되었을 때 구체적 의무와 권한이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그 타이틀만으로도 광범위한 활동을 해명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교황대사는 19세기 이래 국민국가 체제가 정착되어 교회와 국가 간의 정치적 관계를 매개하는 외교관을 의미하지만, 16세기에는 그 항시적 권한과 능력이 명시되어 있지 않고, 상황과 목적에 따라 부여되었다. 하비에르 시대의 교황대사는 정기적으로(16세기 후반엔 일주일 단위로) 파견지 상황을 편지형식으로 보고하고, 지침을 받았다.27)

 

교황대사 관련 교령(decretum)을 통해 하비에르의 임무와 권한을 추정할 수 있다. 교황대사 관련 교령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서가 있다. ① “Cum sicut charissimus” 1540년 7월 27일, ② “Hodie pro parte” 1540년 8월 2일, ③ “Cum nos nuper” 1540년 10월 4일, ④ “Cum nuper ad” 1540년 10월 4일. ①번 교령은 동인도 선교지 개종자의 신앙 강화와 신앙의 수호가 교황대사의 임무로 강조되고 있다. 구체적인 권한은 다음과 같다. 1) 복음을 설교하는 것, 2) 이단의 오류에 오염된 성물과 서적을 금지하는 것, 3) 모든 죄나 잘못을 사면하는 것, 4) 수도 서원의 규범을 다른 형태로 대체할 수 있는 권한, 4) 성사권을 실행하는 것, 5) 전술한 제 권한을 적격자에게 위임하는 것.28)

 

또한 하비에르는 포르투갈 국왕 순찰사로서의 임무도 부여받았다. 하비에르 서간집에는 포르투갈 국왕 앞으로 보낸 10통의 편지가 있다. 하비에르에게는 아시아의 식민지나 지역의 정치, 외교 상황에 대한 보고와 제안하는 임무가 맡겨졌다.29) 하비에르에게 새로운 지역과 포르투갈 식민지의 발견 역시 중요한 임무로서 중국이나 일본선교에 대한 의지와 실행은 이러한 자격들로부터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비에르는 한 수도회의 수도자가 아니라 아시아 전 지역의 선교지를 책임지고 감독하는 위치였으며, 이러한 신분적 자격에서 그의 동아시아(중국, 일본) 선교가 이해되어야 한다. 동아시아 선교는 사도적 열정과 우연한 만남(안지로)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기보다 그의 신분적 정체성에서 나오는 의무와 책임에서 나온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하비에르는 동아시아 선교에서 교황과 포르투갈 국왕의 대사라는 자격을 적극 활용했다. 하비에르는 1552년 1월 29일 코친에서 유럽 예수회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다시 야마구치로 돌아갔을 때, 야마구치 영주(오우치 요시타카, 大內義隆)에게 들고 왔던 총독과 주교의 신임장(Cartas) 및 우정의 징표로 보내진 공물을 선물로 주었다. 영주는 선물과 신임장에 크게 기뻐하였다.”30) 하비에르의 서간에서 그가 외교사절로서의 자격을 동아시아 선교에 적극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승려들이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외교자문과 문서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외국 승려로 보였던 하비에르의 외교관 자격은 일본 지배층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하비에르의 자격에서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구체적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직접적 사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의 『일본사』에는 하비에르의 신분적 자격이 이후 선교에서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31)

 

2) 프란치스코 수도회와의 협력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 의지와 계획은 다른 수도회와의 협력에 대한 열의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하비에르는 인도에 도착하고 10년간 아시아 선교를 기획하면서 극동아시아의 중국과 일본선교까지 착수했다. 그는 예수회원이었지만 인도에 먼저와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동아시아 선교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하였다.32) 1534년 고아 교구가 설정되었는데, 고아교구는 희망봉에서 중국까지 포괄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목구가 되었다. 1538년 초대 교구장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아르부케르케(Juan de Albuquerque)33)가 주교로 임명되어 부임했다. 1542년 5월 인도에 도착한 하비에르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및 고아 주교와 사목적 교류를 긴밀히 했다. 아르부케르케 주교는 하비에르가 일본포교에 있어서 신임장을 써준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하비에르의 선교 활동이 동아시아로 확장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비에르가 언급했듯이 일개 선교사가 아니라 교황대사(Nuntio Apostolico)의 지위를 가졌고, 교령에 따라 포르투갈인들을 돕고, 새로운 개종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고, 이교도의 개종에 힘쓰는 특별한 임무와 자격을 받았다. 게다가 하비에르와 아르부케르케 주교는 둘 다 포르투갈 국왕의 신임을 받았기에, 인도와 동아시아 지역 선교를 위한 긴밀한 동반자로 간주할 수 있다.

 

고아교구에서 하비에르는 인도인들의 부도덕과 무지함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인도인의 교리교육을 위해 힘썼다.34) 아르부케르케 주교는 하비에르의 겸손한 인간성과 학식 그리고 현지인을 위한 교리교육 활동에 매료되었고, 하비에르와의 협력을 추구하였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조앙 로드리게스(Joãn Rodrigues, 1559~1629)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교는 파도레(하비에르)가 그 권한으로 교리와 모범에 있어서 인도 전체에 신앙을 널리 알리고 풍습을 개선함으로써 우리 주 하느님을 위해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생각이 일치하였고 그 희망하는 바가 동일하였다.”35) 하비에르는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를 구분하지 않았고 함께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1548년 1월 20일 코친에서 포르투갈 관구장 로드리게스(Simão Rodrigues, 1510~1579)에게 보낸 편지이다. “나는 우리 주이신 하느님의 영광과 봉사를 위해 그리고 국왕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인도 전 요새에 우리 예수회나 프란치스코회의 설교자를 파견해 주도록 강력히 청합니다.”36) 하비에르는 포르투갈 관구장 로드리게스에게 부탁하여 포르투갈 국왕을 움직여 예수회뿐만 아니라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의 파견을 의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도에서의 우호적 협력 관계를 생각할 때,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 구상에 있어서 일본과 중국에 있어서의 선교협력을 희망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동아시아 선교와 관련하여, 하비에르는 1549년 11월 5일 가고시마에서 고아의 예수회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들 지방의 상황이 우리들에게 점점 분명하게 전달되고 있고, 이것이 대단히 훌륭한 것이라면, 교황 성하께 반드시 보고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하께서 지상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리자, 그리스도교도의 목자이시고, 나아가 구원주이시며 속죄주임을 인정하고, 성하의 영적 지배하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목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신의 영광을 전하려는 위대하고 성스런 희망을 갖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험 있는 축성된 모든 탁발수도(Fraire)회 형제들에게도 쓰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럽으로부터) 온다 하여도, 그들의 희망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이 커다란 왕국 일본에서도, 또한 나아가 커다란 (왕국) 중국에서도 많은 (선교 인력으로서의 선교사들)이 필요합니다.37)

 

스페인어 프라이레(Fraire)38)는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를 의미하며, 하비에르는 탁발수도회와 동아시아(일본과 중국) 선교를 함께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39)

 

3) 베르제(Berze)의 동아시아 선교 구상

 

1549년 8월 하비에르는 일본에 오기 전 중국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일본과 중국을 통합하여 하나의 선교적 과제로 생각하며, 일본선교 3년과 중국선교를 베르제40)와 함께 계획했다. 1549년 4월 일본으로 가기 전에 오르무즈(Hormuz)로 선교를 떠나는 제자이자 후배인 베르제에게 중국이나 일본선교를 준비하라고 상세한 명령을 내렸다. 명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41)

 

① 오르무즈에 최소한 3년간 체재하고, 일본으로부터 나(하비에르)의 답변을 기다릴 것. 그 사이 고아의 예수회 성 바오로 학원장의 명령에 따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말 것. 그러나 3년이 경과하면, 동 원장의 지시를 받들어, 그 명령에 따를 것. ② 오르무즈의 상황을 말라카를 경유하여 일본의 나에게 보낼 것. ①과 ②를 종합하면, 하비에르는 3년간의 일본선교를 계획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고아의 성 바오로 학원장42)의 간섭을 배제하고, 오르무즈의 베르제를 완전히 자기의 관리하에 두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43)

 

베르제가 오르무즈에 건너가 쓴 2통의 서한에는 하비에르와의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1549년 12월 1일부 오르무즈에서 인도 및 유럽의 예수회 회원에게 보낸 베르제의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 이유(오르무즈에서 나갈 수 없는 이유)는 메스토레 프란치스코(하비에르)가 나를 여기(오르무즈)에 파견했을 때, (…) 그가 나를 일본이나 중국에 파견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44) 같은 해 12월 10일부 오르무즈에서 인도 및 유럽의 예수회 회원에게 보낸 베르제의 서한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는 나에게 (오르무즈 체재를) 일본으로부터 그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의 3년으로 한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 또는 그가 명하는 곳에 나를 파견하기 위해서입니다.45) (…) 그가 만일 그쪽에서 길을 연다면, 나를 중국에 파견하고 싶다고 크게 원하고 있습니다.”46) 하비에르는 베르제를 오르무즈로 파견할 때, 그를 ‘일본이나 중국’으로 파견할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를 신속히 수행하기 위해 소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여 베르제가 오르무즈 섬 밖으로는 이동하지 말 것을 주문했었을 것이다.

 

베르제는 오르무즈에서 어떻게 동아시아 선교를 준비했을까? 베르제는 1549년 6월 오르무즈 섬에 도착해서 수도자와 봉사자를 충원하는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선교를 구상하고, 그로부터 반년 후에 고아의 성 바오로 학원장인 고메스에게 허가를 요청했다. 그의 중국선교 의지는 1년 후 더욱 구체화된다. 앞서 인용한 1550년 11월 24일 서한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우리들 예수회에 입회하겠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회가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커다란 존경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찬미. 나는 6명밖에 (코레지오에)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회에 가입하고 싶다고 원하고 있지만, 그들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서, 코레지오가 완성될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는 많은 일이 있기에, 모든 것에 응할 수 없지만, 만약 안토니오 고메스 신부님이 좋다고만 하시면, 모든 사람들을 중국으로 동반하려고 생각합니다. 나와 함께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아직 예수회 수사들이 아님에도 덕이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들의 협력자가 될 것입니다.47)

 

1550년 11월 시점에서 베르제는 일단 6명을 오르무즈에서 신학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이외에도 마을의 많은 사람이 예수회의 입회를 희망하지만, 오르무즈의 코레지오가 완성할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베르제는 오르무즈에서 ‘모든 사람들’이라고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데리고, 고메스의 허가가 난다면, 중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순교의 각오로 중국행을 지원하는 비 예수회원인 사람들을 협력자로 중국선교를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48)

 

한편 하비에르는 베르제를 일본 또는 중국으로 파견할 계획이 있었으므로 그를 오르무즈에 파견할 때 그 섬 안에만 머무르도록 활동을 제한하고 기한을 한정했다. 그 기간은 베르제뿐만 아니라 아시아 선교를 총괄하는 하비에르 자신과 고아 주재의 예수회 간부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향후 일본선교의 예정 기간을 감안하여 산출된 기한은, 앞서 언급한 서간49)에서 ‘3년’, 또는 ‘3년간’이며 이 기간은 5번에 걸쳐 나타난다.50) 그리고 실제로 하비에르는 3년(오고 가는 기간 포함)간 일본에 머물렀다.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 구상’은 그가 아시아(인도)에 와서 얻은 중국과 일본 정보, 일본인 안지로와의 만남, 아시아에서의 활동 성과로부터 중국을 포함하여 계획한 것이며, 그의 아시아에서의 활동 성과, 부하인 베르제의 오르무즈 파견 등의 요소가 결합하면서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비에르는 베르제를 1549년 4월 7일에 오르무즈에 보내고, 자신은 그 일주일 후에 일본으로 향했기 때문에, 그의 ‘동아시아 선교 구상’의 골격은 고아를 떠나는 시점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4. 하비에르의 일본선교와 적응주의의 형상

 

하비에르가 동아시아 선교를 생각하고 있었던 차에 말라카에서 일본인 안지로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동아시아 선교의 첫발을 현실적으로 내디딜 수 있었다. 하비에르는 1549년 4월 15일 인도 고아를 출발하여 8월 15일에 가고시마에 도착하였다.51) 하비에르는 일본에서의 2년 3개월간 체류하면서 동아시아 적응주의 선교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일본에서 구상한 적응주의 방법의 초기 형상을 세 가지 제도적 차원에서 검출하고자 한다.52)

 

 

 

 

1) 귀족 중심의 그리스도교 : 정치적 적응주의

 

하비에르에게 일본 사회는 대단히 엄격한 가부장적 신분사회로 보였다. 그는 귀족(사무라이) 영주와 같은 엘리트 지도계층을 통하지 않고서는 선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비에르는 영주와 귀족을 중심으로 한 선교 방법을 채택하게 된다. 하비에르와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정치권력과 상당히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화된 유럽에서 사제계급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의 엘리트로 간주되었다. 도일(渡日) 후 하비에르는 처음엔 평민들과 접촉하다가, 유럽과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이 후원자가 된다면 선교 활동에 유리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치권력의 입장에서 선교사들은 포르투갈로부터 무역허가를 가져올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서양문명의 이기인 총포를 입수할 수 있었기에 유익한 존재였다.53) 게다가 일본 사회에서 승려계급은 외교와 문서 행정에 있어서 중요한 엘리트 관료적 역할을 담당했기에, 종교인으로서 하비에르와 선교사들의 존재는 불교 승려에 준해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본에 도착하여 하비에르는 사츠마(薩摩)의 영주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의 허락을 받고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미 사츠마 지역은 포르투갈인들의 출입이 있어 외국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영주의 눈에 하비에르는 상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영주의 종교가 영민의 종교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비에르는 영주에게 선교허가를 얻는 일이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수도 미야코(京)를 방문하여 일본의 왕에게 선교허가를 받기로 결심한다.54)

 

하비에르는 규슈(九州) 남부에서 일본에 대한 상황을 살피고 수도가 있는 미야코(京, 교토)를 최종 목적지로 하여 몇 개의 주요 지역을 방문하며 선교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그는 수도인 미야코가 복음화되면 다른 지방으로 전파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과 같은 피라미드형 계급사회에서 미야코가 주는 본보기가 구석구석까지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비에르는 생각했다. 하비에르는 미야코를 향해 가면서, 우선 나가사키(長崎) 인근의 히라도를 방문하여 그곳 영주 마츠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의 환대를 받는다. 마츠우라는 그곳의 포르투갈 상인들이 하비에르를 존경하는 것을 보고 서양 상선과의 교역이 더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비에르는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 토레스 신부를 히라도에 남기고 페르난데스 수사와 일본인 개종자 베르나르도를 동반해서, 야마구치(山口)를 거쳐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 동쪽으로 항해하여 사카이(堺)를 경유, 1551년 1월 중순 미야코(京)에 도착했다.

 

미야코에 도착하여 하비에르가 느낀 인상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여파로 아시카가(足利) 막부 가문과 천황의 힘은 약화되어 있었다.55) 게다가 선물이 없는 외국인 사절은 만나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토착종교인 불교의 세력이 상당히 강했기에 하비에르는 미야코로부터 물러나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윽고 하비에르는 힘 있는 다이묘(大名)들의 영지를 중심으로 선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야마구치로가 오우치(大內) 가문을 찾아갔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하비에르는 이때부터 자신의 신분적 아비투스(Habitus)를 유럽의 가난한 탁발수도사가 아닌 귀족적인 불승의 계급으로 정립하였고 포르투갈 국왕과 고아 총독의 특명전권 대사의 신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총포, 거울, 서적, 도자기, 수정, 안경과 같은 진귀한 선물을 준비하였다.

 

하느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전하기에 미야코(수도)는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다시 야마구치로 되돌아왔습니다. 가지고 온 인도 총독(가르시아 데 사)과 주교(아르부케르케)의 친서 그리고 친선의 징표로 지참한 선물을 야마구치의 영주에게 진상했습니다. 이 영주는 선물과 친서를 받고 기뻐했습니다. 영주는 나에게 답례로 많은 물건을 내놓으며 금과 은을 가득 하사하려고 했으나 우리들은 어떤 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만일 영주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영내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것을 허가하고 신자가 되고 싶은 자를 용인해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영주는 큰 애정을 갖고 허가를 내려주었습니다. 영내에서 하느님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영주의 기쁨이며 신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자는 신자가 되는 허가를 내린다고 영주 명의의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56)

 

하비에르는 선교를 위해 정치권력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신분적 지위와 습속을 일본의 귀족계급에 준하는 승려와 동일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57) 게다가 일본에는 자신들의 종교전통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그리스도교의 종교성을 내세우기보다 귀족들과 집권자들의 욕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하비에르는 그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은 물론이거니와 상업과 무역을 도구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비에르의 서간에 나타난 것처럼 귀족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선교의 주요 대상으로 간주된 것이 아니라, 평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적 전략이었던 것이다. 하비에르는 오우치로부터 대도사(大道寺)를 하사받고 선교에 착수하여 2개월간 5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551년 4월까지 하비에르의 일본 경험에서 나온 귀족 중심 선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에서는 의복을 잘 갖추어 입어야 하고, 가난한 옷차림으로는 상대방에게 경멸받는다. 둘째, 일본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유럽의 사도적 청빈이나 겸손의 태도는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의식과 겉치레가 중시되고 여기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야마구치 체류 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별한 복식’을 입고 2~3인의 수행 종을 동반하고 총독과 주교의 신임장과 진귀한 선물을 바치니, 포교허가를 얻고 사찰을 증여받았다. 하비에르는 일본의 고위 승려의 복식과 습속을 받아들임으로써 청빈과 겸손이 아니라 외견과 권위를 중시하는 적응방침을 수립하게 된다.58) 일본 사회에서 승려는 귀족 지배계층을 위한 통치와 행정에 협력하는 문관으로서 인정되었고, 이러한 엘리트 승려의 아비투스는 하비에르와 예수회원들에게 받아들여짐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귀족 엘리트 선교[儒敎文人]로 발전하게 된다.

 

2) 불교의 대립물로서의 그리스도교 : 종교적 엘리트주의

 

적응주의라는 것이 선교지 문화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선교지 종교장(宗敎場)에서 토착종교와는 수용과 부정, 타협과 경쟁이라는 긴장 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다. 선교의 목표는 선교지 종교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 선교지 문화의 종교장(宗敎場)을 바꾸는 데 있다.59) 선교지의 문화 상징인 토착종교의 규범과 외형적 상징체계를 일정 부분 수용하거나 변용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그리스도의 절대적 유일성(보편성)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초기 동아시아 적응주의 선교의 규범을 세운 하비에르는 동아시아의 민중종교인 불교의 의례, 복장, 용어와 같은 문화적 상징 자원을 수용하면서도, 불승과 교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고, 이러한 태도는 후일 중국과 조선의 선교사들에게도 유지되었다.60) 초기 근대 동아시아의 그 어떤 선교사들도 불교와 또 다른 민중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았다. 하비에르는 강력한 신학적 보수주의를 내세웠다.

 

하비에르의 교리의 문화적 융합 과정의 한 예로 ‘다이니치(大日) 논쟁’을 들 수 있다. 하비에르가 하느님인 ‘데우스’(Deus)를 설명하기 위해 민중불교의 절대신인 ‘다이니치’라는 용어를 차용했으나, 나중에 이 용례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어 불교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여기서는 데우스와 다이니치를 동일시했던 배경과 이를 둘러싼 하비에르의 신학적 보수주의에 대해 살펴본다.

 

하비에르는 고등종교와 문명을 담지한 일본 문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 사회의 문화 상징으로서 기성종교의 용어와 원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가장 중요한 유일신 개념 즉 하느님을 일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종교의 신관이 가지고 있는 정수가 신에 대한 명칭에 담기기 때문이다. 하비에르는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말라카로부터 하비에르를 수행했던 안지로와 몇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여, 하느님의 일본식 명칭을 불교 진언종의 본존불을 지칭하는 ‘다이니치 뇨라이(大日如來)’로 하기로 했다. 이미 일본에 오기 전 하비에르는 진언종의 ‘다이니치’를 삼위일체 유일신인 것처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61) 그래서 가고시마에 하비에르 일행이 도착했을 때 진언종의 승려들은 기뻐하며 하비에르 일행을 환영하였다. 이것은 아마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 된 안지로의 그리스도교 이해에 기초하여 나온 결과였을 것이다. 야마구치의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그리고 그의 후계자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가 발행한 ‘대도사(大道寺)’에 대한 설립허가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서역에서 온 승려, 불법 전파를 위해 그의 사찰을 창건할 만한 이유가 있다.” 즉 오우치 가문은 그리스도교를 불교의 한 일파로 이해하였다.62) 이후에도 많은 일본 대중들은 그리스도교를 불교의 일파로 상상하였다.63)

 

다이니치를 ‘데우스’와 동일시한 것이 심각한 오류가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다. 이 시대에는 정토진종(浄土真宗)과 같은 민중불교가 유행하였는데, 이 종파는 기존의 불교나 전통 신도 신앙과는 다른 신관을 가지고 있었다. 13세기에 신란(親鸞)이 창시하고, 16세기에는 ‘일향종(一向宗)’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정토진종은 숭배의 대상을 ‘유일불(唯一仏)’인 아미타불(阿弥陀仏)로 삼았고 아미타불은 ‘다이니치’와 같은 존재였다. ‘아미타(阿弥陀)’라는 이름(나무아미타불, 南無阿弥陀仏)을 암송하는 것으로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복잡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염불을 반복하여 입으로 소리 내 외우는 것만으로 족했다. 이러한 간단한 기도는 어떤 일을 하면서라도 할 수 있다. 산에 틀어박혀 장기간 엄격한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농업과 어업, 수렵 등 일상생활을 하면서, 쉽게 ‘구원’이 실현된다는 정토진종은 삶의 어려움에 지친 민중의 종교로 급속히 전파되었다.64) 그런데 이 민중불교의 숭배대상은 일신론적인 특징을 담지하고 있었다. 일신론적인 주신숭배신앙인 ‘아미타일불(阿彌陀一佛)’에 대한 배타적 믿음이 견지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신론적 주신숭배사상은 그리스도교와 닮은 점이 많았다. 이런 신앙체계에서 신의 권능은 배타적으로 강하고 그 신 앞에 선 피조물들은 상대적으로 평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도 약화되며, 구원은 신의 주도에 의해 가능해진다. 즉 신에 의해 전면적인 구원의 은총이 있을 뿐이며, 신의 뜻을 준수하기 위해 일정 부분 윤리적 행위의 올바름도 부과된다.65) 이러한 민중불교는 그리스도교에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먼저 예수회가 유일신 신앙을 전달하는 데 이러한 불교적 유일신 관념이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반대로 비슷한 신관을 담지한 기존 토착종교는 대단히 강력한 경쟁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비에르는 기존 토착불교의 ‘다이니치’ 신관념에 그리스도교의 ‘데우스’ 하느님이 포섭될 수 있다는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하비에르는 제2차 야마구치 체류 중(1551년 7~8월), 불교 정토 진언종 승려들과 논쟁했다. 이 논쟁은 ‘다이니치(大日)’가 주요 테마였다.66) ‘다이니치’와 관련된 야마구치에서의 종교논쟁을 프로이스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마에스트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다시 이 왕국을 방문했을 때, 대단히 크게 만들어지고, 호화로운 삽화가 들어가 있는 성경과 새로운 또한 아름답고 화려한 주석서를 가지고 왔다. 이 서적들 가운데 우리 모두의 거룩한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그(분고국왕, 요시타카)에게 보여주었다. (…) 거기에는 몇 명의 불승이 동석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큰 존경을 받는 자들이어서 대접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결코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하비에르에게 당신이 숭배하는 데우스에게는 형태나 색채가 있냐고 물었다. 하비에르는 “데우스에게는 어떠한 형태나 색깔도 없고 또 어떠한 우연적인 속성도 없다. 왜냐하면 데우스는 일체의 원소나 질료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실체이다. 아니 (그러한 세상만물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불승들은 또 그 데우스는 어디에서 기원하느냐고 물었다. 하비에르는 대답했다. ‘데우스는 스스로 존재하고 만물의 원리이고, 전능, 전지, 전선하며 시작도 끝도 아니다.’

 

이들 불승은 진언종이라고 하는 ‘큰 태양[大日]’의 의미를 지닌 대상을 숭배하는 종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이 ‘대일여래(다이니치 뇨라이, 大日如來)’에게 신적 성질을 갖는 다양한 존경과 속성을 부여하였다. 이 종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다이니치’가 우리 유럽 철학자들에게 ‘제1질료’(Prima materia)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지만 불승들은 다이니치를 최고의 무한한 신이라고 부르고, 많은 오류와 모순에 빠져 있다. (…) 사제(하비에르)는 어떠한 방법으로 악마가 아름다운 이름 하에 많은 더러운 업을 동반하며, 저주하는 종파를 창조해 왔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안 페르난데스 수사에게 길거리에서 다이니치(대일)에 대해 빌어서는 안 되고, 다이니치 뇨라이(대일여래)를 신(神)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또한 저 종파는 일체의 다른 일본 종파와 마찬가지로 거짓되어 믿을 수 없는 가르침인 것이고, 악마가 고안한 교설이라고 말했다.67)

 

프로이스는 다이니치와 데우스의 차이를 부각하며 불교와 대립하게 된 사례를 하비에르의 권위를 빌려 보도하고 있다. 하비에르와 선교사들은 불교의 다이니치 명칭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념과 관련된 교의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68) 더욱 심각한 것은 그리스도교를 불교의 한 지파로 인식시키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선교 가능성이 좌절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하비에르와 선교사들에게 공유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이니치’라는 명칭으로는 창조주 하느님을 제시하기엔 문제가 있었고 하비에르는 라틴어 음역인 ‘데우스(デウス)’로 대체할 것을 선포하고 ‘다이니치’라는 용어의 사용을 금지시켰다.69) ‘다이니치’에서 ‘데우스’로 하느님의 명칭을 변경한 것은 진언종 불승들의 반감을 샀고,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이후 대립하게 된다. 하비에르 시대에 불교는 적응을 위한 준거이자, 경쟁자라는 이중적 가치를 담지한 실재로 간주되었고, 그 이후 시대에도 그러한 관점은 유지되었다.

 

3) 상업 · 무역의 선교적 이용 : 경제적 적응주의

 

16세기 초부터 포르투갈은 아시아 각지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여 광범위하게 무역을 전개했다. 무역수익의 일부는 교회의 선교자금으로 유입되기도 했다. 1543년 이후 타네가시마(種子島)를 오가던 포르투갈 사람들의 배는 경제적으로도 일본인들의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일본 국내의 관점에서도 1526년 이와미(石見) 은광의 발견으로 세계 은의 1/3이 일본산이 되는 계기가 되었고, 동중국해 무역질서의 기본을 바꾸며 국내 문화의 호황기를 낳을 만큼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 당시 정부나 정치 가문과 특수 관계를 갖고 이권을 취하는 상인을 ‘세이쇼(政商)’라 불렀고, 정치와 관계를 맺고 이권을 행사하는 종교를 ‘교우쇼(敎商)’라 불렀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선교사들이 정치와 특수 관계를 맺고 이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일본인들이 만든 표현이다. 예수회는 선교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상업을 방법론적 전략으로 삼았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극동의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상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 선교의 재원조달을 위해서, 둘째, 포르투갈과 일본 정치권력의 이익 때문에 무역 중개권을 행사하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업의 행위는 선교의 성과로 나타났다.70) 이렇게 예수회가 선교를 위해 적극적인 상업 · 무역활동을 하게 된 시초도 역시 하비에르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하비에르가 일본 가고시마로 들어와 체류하면서 수립했던 선교계획 중 하나가 센슈(泉州)의 사카이(堺)에 포르투갈 상관(商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71) 일반적으로 포르투갈 국왕이 부과하는 관세 상당 부분을 예수회의 수입으로 하여 선교비로 충당하는 체계의 발단이 하비에르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비에르는 1549년 11월 5일 말라카에 있는 총독이자 아프리카 ·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의 아들 돈 베드로 다 시루바(Dom Pedro da Silva da Gama)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관(商館) 설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미야코(京)에서 이틀 거리에 일본의 중요한 항구가 있는 사카이(堺)에 하느님의 뜻이라면 물질적으로 막대한 이익이 되는 상관을 설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항구이므로 거기에 일본의 금과 은 대부분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장대하고 일본에 없는 물건을 보기 위해 일본 국왕이 인도에 대사를 파견하도록 움직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인도 총독과 일본 국왕과의 만남에서 앞서 말한 상관 설치를 협의하게 됩니다.72)

 

하비에르는 포르투갈 국왕의 선교보호권이 있었음에도 교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였다. 국왕은 국고의 손실을 막기 위해 세금징수의 규정을 세워, 선교사들을 직접 돕기보다, 세금으로 돕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포르투갈 관세법을 이식하여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상관에서 얻는 관세수입을 일정 부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착안하여 하비에르는 일본선교 초기부터 무역법령에 있었던 ‘관세규칙’을 통해 예수회의 활동자금 마련을 생각해 내었다.73) 이것은 일종의 경제적 적응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경제적 구조와 선교활동이 연계되면서, 성공한 상인이었던 알메이다(Luis de Almeida, 1525~1583)가 예수회에 입회하면서 예수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후 자금을 말라카-일본 간의 무역에 직접 투자하게 되고, 1579년 마카오와 예수회 간의 아루마산74) 조약이 현실화된다. 이러한 하비에르의 생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첫째 선교지의 자금 확보를 원활하게 함으로써 선교가 확대될 수 있었다. 둘째, 일본의 무역을 촉진함으로써 농업을 넘어, 초기 근대 상업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5. 나가는 말

 

이 글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계획이 어떠한 경위와 인식으로 수립되었는가를 조명하며, 그 계획이 실천적으로 출현하면서 나타난 적응주의의 형상들의 성격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하비에르가 교황대사와 국왕 순찰사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타 수도회와 협력하고자 했던 점, 베르제와 선교계획을 논의했던 점을 검토하며 하비에르의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배경과 동아시아 선교 구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후 안지로와의 만남으로 동아시아 선교의 첫 번째 목적지를 일본으로 삼았고, 일본에서 파악한 동아시아 문화적 특성을 기준으로 선교지 문화에 적응적인 태도와 규범을 생산하게 된다. 그 규범은 엘리트주의로 특정할 수 있는데,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담지한 하비에르의 적응주의 전략은 세 개의 제도적 수준에서 관찰된다. 그것은 정치제도에서의 귀족 중심 선교(톱다운 선교), 종교제도에서 보이는 토착종교화의 경쟁적 대립, 경제제도에서 보인 상업·무역의 선교적 이용을 들 수 있다.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계획과 일본에서 안출된 엘리트주의적 선교정책은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복음화의 적응전략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하비에르는 계획대로 3년의 일본선교가 끝나자 중국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올해 1552년 지나 국왕이 있는 북경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크게 전파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들의 신앙이 받아들여진다면 일본인들이 믿었던 제(諸) 종파는 불신될 것입니다. 지나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닝보(寧波)75)에서 일본까지 해로가 80레구아(448km)밖에는 안 됩니다.”76) 하비에르는 일본과 중국을 동질적 문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식에 입각한 중국선교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하비에르는 1551년 11월경 중국선교에 뜻을 두고, 일단 인도의 고아로 돌아가 이듬해 1552년 5월 말라카를 경유하여 상추안(上天島)에서 중국 대륙을 목전에 두고 11월 2일 선종하였다.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선교적 호기심, 안지로와의 만남, 동아시아 선교계획의 수립, 일본선교 여행과 적응주의 선교정책의 초안 수립, 그리고 상추안(上天島)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적이고 체계적으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의식이다.

 

마태오 리치의 제자인 세메도(Alvaro Semedo, 1586~1613)는 중국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노선을 알리고 후원과 지지를 받기 위해 중국에 대한 문화보고서 「중화제국(Imperio de la China)」을 썼는데, 여기서 동아시아 중국 예수회의 역사와 적응주의 선교방식의 기원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로 소급하고 있다.77) 이러한 그의 엘리트주의적 적응주의의 유훈은 이후 동아시아 선교의 전범으로 간주되었고, 30년 후 입국한 예수회 동인도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에 의해 더욱 정교한 선교 규범으로 발전되었다. 하비에르의 동아시아 선교 프로젝트와 그 과정에서 탄생한 엘리트주의로서의 적응주의적 전략은 교회를 넘어 서구와 동아시아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촉발시켰다. 또한 문명교류의 매개자로서 그는 서구의 다양한 문화적 자원을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문화에 적응시킴으로써 동아시아 초기 근대의 사회변화를 추동하는데 기여하였다.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S1A5A2A03037412). 

 

 

참고문헌


1.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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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성)는 계몽주의 시기 서구의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민 계층이 형성되면서 새롭게 재구성된 사람들의 의식, 생활방식을 일컬으면서 태동한 개념이다. 문명 역시 서구 근대의 새로운 사회질서의 총체를 지시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러한 서구 근대의 문화적 체계와 질서를 담지한 문명론은 늘 근대성과 같은 말로 이해됐다.

 

2) 하비에르 이후 일본선교 추진은 남만 무역과 그 운명을 함께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포르투갈 무역선을 유치하여 가고시마(鹿児島), 분고(豊後), 히젠(肥前)의 항구로 들어왔다. 히젠의 남만 무역항이 히라도(平戶), 요코세우라(横瀬浦), 후쿠다(福田)나 나가사키(長崎), 구치노츠(口之津)에 있다(安野眞幸, 『敎會領長崎: イエズス会と日本』, 東京: 講談社, 2014, 3~4쪽).

 

3)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06년 4월 7일 에스파냐의 나바라 지방 팜플로나에서 가까운 하비에르 성 영주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부였던 숙부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여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에스파냐 바스크 지방에서 온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1591~1556)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하비에르는 이냐시오와 함께 종교개혁으로 위기에 봉착한 교회를 쇄신하기 위해 1534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예수회를 결성한 첫 7명 중 하나였다. 독신과 가난한 생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기로 서약했다. 1537년 6월 하비에르는 베네치아에서 다섯 동료들과 사제로 서품되었다. 얼마 후 포르투갈 국왕은 식민지 인도의 고아에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하비에르와 다른 한 명의 형제가 파견되었다(1542년 6월 5일). 하비에르는 고아에서 선교사로서 활동하였고, 고아의 총독 알폰소 디 소자는 그에게 인도 동남부 진주해변에 교회를 세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비에르는 그곳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했는데 외적으로 20,000~30,000명이 세례를 받았다(1542~1544). 이후 활동 범위를 코친, 말라카 그리고 몰루카로 넓혔다(1545~1549). 한편 1547년 12월 일본 사무라이 출신 망명객 안지로(安次郞)를 통해 일본 정보를 입수하고 1549년 8월 15일, 토레스(Comes de Torres, 1510~1570) 신부와 페르난데스(Juan Fernandez, 1526~1567) 수사 그리고 안지로 일행과 가고시마로 들어와 2년 반(1549년 8월 15일~1551년 11월 4일) 동안 선교했다. 가고시마에 도착한 하비에르는 하라도, 교토, 야마구치 그리고 분고에 이르는 선교여행을 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선교를 준비하면서 광동 남쪽의 섬 상추안(上天島)에서 (1552년 12월 3일) 운명을 달리했다(Klasu, Schatz, Art. “Fanz Xaver”, Lxeikon für Theologie und Kirche, Bd. 4, Hg. Walter Kasper, Freiburg: Herder, 1995, pp. 55~56 ; 김혜경,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2, 156~162쪽).

 

4) Charles Ralph Boxe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 Berkely and Los Angeles: Univ. of California, 1951.

 

5) 동인도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는 유럽의 예수회 본원에 보고하면서 일본(동아시아) 문화는 유럽과 정반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럼에도 복음화의 주요 대상으로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촉구하기도 한다(Valignano, Alejandro S.J., Sumario de las cosas de Japón(1583), Adiciones del sumario de Japón(1692), Editados por José Luis Alvarez-Taladeiz. Tome 1, Tokyo: Sophia University, 1954 ; 松田毅一他 訳, 『日本巡察記』, 東京: 平凡社, 1973, 3~4쪽).

 

6) 예컨대 17세기가 되면 인문화와 종교개혁을 통해 계몽으로 나아가던 유럽인들은 중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호기심 어린 타자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유럽인들에게는 ‘신의 모상’인 종교가 ‘자비’와 ‘동정심’에 기반을 둔 동양의 유교를 접하며 근대 인본주의의 전거가 되었다. 동아시아에 온 예수회 지식인들이 매개가 된 동서문명의 상호작용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야기했다. 예수회원들은 동아시아 지식을 유럽에 전함으로써 유럽의 군주와 학자들에게 선교 사업에 대한 지지기반을 이끌어내기 위해 동아시아 정보 특히 중국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계몽주의 인본사상과 민주주의 정치규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서구인들에게 유교도는 이신론자들로서 그들의 신앙은 최고의 신성보다는 자연권에 기반을 둔 이성을 따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유교정치는 전제군주의 개인적 관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법을 통해 인민의 복지와 사회의 질서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David E. Mungello, Curious Land: Jesuit Accomodation and the Origin of Sinology, University of Hawaii, 1989).

 

7) 深津容伸, 「日本人とキリスト教」, 『山梨英和大学紀要』 第5号, 2006, 17~25쪽.

 

8) Orazio Torsellini, De Vita Francisci Xaverii…Quibus accesserunt eiusdem Xaverii Epistolorum Libri quatuor, Romae: ex typographia Aloysij Zanneti, 1596 ; Pierre Poussines, Sancti Francisci Xaverii e Societate Iesu Indiarum Apostoli Epistolarum Liber Quintus sive Epistolae, Novae ⅩⅧ, Roma, 1661(Roma: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Iesu, 1667) ; Pierre Poussines, Sancti Francisci Xaverii e Societate Iesu Indiarum Apostoli Novarum Epistolarum Libri Septem, Roma, 1667(Roma: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Iesu, 1667).

 

9) 예수회 역사편찬 기획물인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Iesu’의 16~18권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자료는 67~68권에 들어 있다(Georg Shurhammer, G. Schurhammer et J. Wicki , S.J., Epistolae S. Francisci Xaverii aliaque eius scripta, TomusⅠ,Ⅱ, Monumenta Soc. Jesu. R, Romae: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Iesu, 1944-1945). 이 문헌은 단행본 형식으로 고우노 요시노리에 의해 일본어로도 번역되었다(河野純德 訳,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東京: 平凡社, 1985). 한편 예수회 역사편찬 기획물의 대표편집자인 쉬르하머가 다시 하비에르 관련 작품을 4권의 전집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Georg Schurhammer S.J., Francis Xavier, his Life, his Times, Vol. Ⅰ-Ⅳ, trans. M. Joseph Costelloe S.J., Roma: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Iesu, 1667, 1973-1982).

 

10) 五野井隆史, 『日本キリシタン史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2002, 24~55쪽.

 

11) 岸野久, 『ザビエルと東アジア』、東京: 吉川弘文館, 2001.

 

12) 이 당시 중국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포르투갈인은 해산물을 건조시키는 핑계로 마카오에서 상주하게 되었고, 무역이익 때문에 중국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포르투갈인의 꿈이었다. 1517년 포르투갈 주 동인도 총독의 위탁을 받은 왕실 의사 피레스(Tome Pires)는 중국 북경을 처음 방문한 서방의 사절이었다. 1521년 피레스는 베이징에 도착하여 무종 황제를 만났으나, 이 방문은 실패로 돌아갔다. 원인은 세 가지였다. 첫째, 말라카국의 사절이 베이징에 포르투갈인의 침략행위를 고발했다. 둘째, 그들을 허락한 무종 황제가 죽었다. 셋째, 사절의 중개인이었던 화자아삼(火者亞三)이 베이징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평판이 나빴다. 베이징 정부는 화자아삼을 처형하고, 피레스와 사절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이들의 생사는 불분명하게 되었다(张西平, 『欧洲早期汉学史』, 北京: 中华书局, 2009, 36쪽).

 

13) 岸野久, 앞의 책, 108쪽.

 

14)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60, 281~282쪽.

 

15) 알바레스는 하비에르의 요청으로 1547년 12월경 이미 일본의 지형, 동식물, 어패류, 의식주, 사회제도와 생활풍습,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그 내용은 비체계적이고 인상비평적이긴 하지만 일본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東京大學史料編纂所 編, 『イエズス会日本書翰集』, 訳文編之一(上), 東京: 東京大學出版会, 1991, 3~23쪽).

 

16) 란치롯트는 안지로와 면담하며 일본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군사에 대해 듣고, 인도의 포르투갈 총독에게 보고하였다. 따라서 안지로가 살았던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 지역의 정보에 국한된다고 볼 수 있다(東京大學史料編纂所 編, 같은 책, 35~53쪽).

 

17) 이것은 그가 안지로와 만나고서 44일 후의 서간이다. 물론 안지로를 만나기 이전에 하비에르는 상인들로부터 일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하비에르가 일본에 오기 이전 일본에 대한 서구인의 인식과 정보에 대해서는 기시노 히사시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岸野久, 『西欧人の日本發見: ザビエル來日以前日本情報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1989 ; 『ザビエルと日本』, 東京: 吉川弘文館, 1998).

 

18) 1543년에 포르투갈인들이 가고시마에 표류하면서 무역이 시작되었다.

 

19)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59, 272~274쪽.

 

20) 五野井隆史, 『日本キリシタン史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2002, 26쪽.

 

21) “유럽의 예수회원에게 보내는 편지”, 1552년 1월 29일 코친發,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96, 543~544쪽.

 

22) 인도나 아프리카 선교지역과 달리 동아시아 지역의 학문과 문자의 발달은 ‘문서선교’에 의해 효율적이고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회의 동아시아 문서선교 구상은 하비에르가 최초의 모티브가 된다고 생각한다.

 

23) 천축은 석가의 나라로 인도 지방인데 하비에르는 천축을 석가의 나라로 해석하고 있으나 자신이 있는 현재의 인도 지역이라는 의식은 없었다.

 

24)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70, 340~341쪽.

 

25) 인도에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현지문화에 대한 인식과 적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고 유럽의 문화적 자원을 이식하려는 시도밖에 없었다

 

26) 하비에르 서간에서 교황대사와 관련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1549년 1월 20일 부 코친 발 시몬 로드리게스 前, ② 1549년 2월 20일 부 코친 발 시몬 로드리게스 前, ③ 1552년 6월 마카오 발 조안 수아레스 前 탄원서, ④ 1552년 7월 21일 부 싱카푸라 해협 발 가스발 바르제우(베르제의 포르투갈 이름) 前, ⑤ 1552년 11월 13일 부 상추안 발 프란치스코 페루스 前.

 

27) Wolfgang Reinhard, “Nuntiaturberichte”, Lxikon für Theologie und Kirche, Bd. 7, Hg. W. Kasper et al., Freiburg: Herder, 1998. pp. 948~949 ; A. Bues, “Acta Nuntiaturae Polonae”, ZOF 41(1992), pp. 386~398.

 

28) 여기에 ②번 교령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추가되었다. 1) 교회 공증인을 지명하는 것, 2) 혼인장애를 면제해 주는 것, 3) 살인이나 상해죄를 지은 성직자의 벌을 관면해 주는 것, 4) 이단자나 이교도를 사면해 주는 것, 5) 수도원, 교회, 그 밖의 자선기관 건설을 허가하고 도와주는 것. 하비에르는 교황대사로서 아시아 교회 모든 신자들의 신앙을 보호하고 감독할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 도착하고 난 후 자신의 권한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기면서 로마 교황에게 추가적인 권한을 요청하였다. 또한 고아에서 1542년 9월 20일 이냐시오에게 쓴 편지에 이 추가 요청 사항이 나온다. 첫째, 성 바오로 학원 제단(altar)과 성직자에게 부여하는 은사나 특권. 둘째, 총독 및 그 가족에게 베푸는 은사. 셋째,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의 거행. 넷째, 병자나 간호인에 대한 관면. 다섯째, 수도회 입회와 정결의 다른 행위로 대체. 여섯째, 일요일 및 축일에 복수의 미사 실시. 일곱째, 교황의 권한을 갖고 코레지오 건설(岸野久, 『ザビエルと東アジア』, 23~29쪽).

 

29) 岸野久, 『ザビエルと東アジア』, 77~91쪽.

 

30) G. Schurhammer et al., Epistolae S. Francisci Xaverii aliaque eius scripta, Tomus II(1549-1552), p. 262.

 

31) 예컨대 하비에르 이후, 분고국의 오토모 소린(大友義鎮)은 포르투갈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사제를 서구 권력(교황, 왕, 인도 총독)의 주요한 중개자로 인식하게 되었다(Luis Frois, Historia de Japan, pp. 58~60[Japanese] ; フロイス, 松田毅一, 川崎桃太 訳, 『日本史』 券6, 東京: 中公文庫, 2015, 58~60쪽).

 

32)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이후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에 들어왔고, 이들을 사목하기 위해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포르투갈 교구 사제들이 함께 왔다. 교구 사제들은 포르투갈 정부 관원처럼 3년 임기로 교대하였고, 이들의 지적·영적 수준은 상당히 떨어졌으며 현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적응의 의지는 없었다. 16세기 전반 프란치스코회가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조직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다. 1500년 프란치스코회가 인도에 첫 선교단 8명을 파견했다. 도미니코회 역시 1503년 3명이 인도에 들어왔다(António de Silva Rego, História das Missões do Padroado português do Oriente, India Ⅰ[1500-1542], Lisboa: Agência Geral das Colónias, 1949, pp. 153~161).

 

33) 아르부케르케는 스페인 에스토레 마도우라(마듀라) 지방의 아르부케르케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프란치스코회 원류에 해당하는 ‘Observantes’에 속한다. 이 소속의 수도자들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청빈을 충실히 수호했던 자들이었고 뾰족한 모자가 한 솔로 붙은 옷을 입고 다녀 ‘카프초’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르부케르케 주교는 1500년경 포르투갈로 왔고 피에다데 관구의 창설에 공헌했고 1526년과 1532년 동 관구장을 역임했다. 당시 프란치스코회에는 ‘꼰벤뚜알파’와 ‘원시 회칙파’가 있었으나 수도원 개혁에 열심이었던 것은 후자였다. 포르투갈 국왕 조안 3세는 아르부케르케를 고해 사제로 청할 정도로 중용했다. 교황청은 어느 특정 수도회가 주교가 되는 것에 난색을 표했으나 조안 3세는 아시아 선교의 활성화를 위해 고아 주교구를 신설하고, 그의 주교 임명을 밀어붙였다. 아르부케르케는 1538년 1월 리스본에서 주교로 서품되어 9월 인도 고아에 도착했다(岸野久, 앞의 책, 57~58쪽).

 

34) 岸野久, 같은 책, 58~59쪽.

 

35) ジョアン·ロドリゲース, 池上岑夫他訳注, 『日本敎會史』 下(大航海時代叢書Ⅹ), 岩波書店, 1970, 276쪽).

 

36) G. Schurhammer S.I. et I. Wicki S.I., ed., Epistolae S. Francisci Xaverii aliaque eius scripta, Tomus Ⅰ(1535-1548), p. 420.

 

37) Archivum Romanum Societatis Iesu, Jap. Sin, 4, 15v-16.

 

38) 포르투갈어로는 ‘frade’.

 

39) 기존 연구에서 예수회와 다른 수도회 간의 협력 관계에 대해 잘 다루지 않은 이유가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선교를 둘러싼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와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예수회 창립자 중 하나인 하비에르와 탁발수도회와의 협력 등이 성립될 수 없다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하비에르 선교시대에는 인도에 있어서 예수회도 프란치스코회도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조직보다는 인간적 관계가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인도에 갔던 프란치스코회도 예수회도 포르투갈 국왕의 선교관할권(Padroado) 안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둘 간의 협력이 당연시되었으나, 16세기 후반이 되면 선교관할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즉 포르투갈계 예수회와 스페인계 프란치스코회와의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였다(岸野久, 앞의 책, 74~75쪽).

 

40) 포르투갈 이름은 가스발 바르제우라고도 하는 베르제(Jaspar Berze)는 1515년 플랑드르 태생이며 1546년 사제서품을 받고 1548년 3월 다른 9명의 예수회원과 함께 인도로 왔다. 베르제는 설교가로 명성이 있었으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설교가 및 선교사로서 그를 높이 평가하여 중국과 일본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선교의 중요 협력자로 생각하였다.

 

41) 4월 초순, “호르무즈로 출발하는 바르제우(베르제) 신부에게 보내는 훈시”, 『聖フランシス 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80, 391~408쪽.

 

42) 성 바오로 학원은 실제 동인도 지역의 예수회 거점 본부이고, 이 학원장이 인도 지역의 책임자였다.

 

43) 岸野久, 『ザビエルと日本: キリシタン開敎期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1998, 60~70쪽.

 

44) Iosephus Wicki (ed.), Documenta Indica, Vol. I(1540-1549), Romae, 1948, p. 617.

 

45) Iosephus Wicki, 같은 책, p. 643.

 

46) Iosephus Wicki, 같은 책, p. 669.

 

47) Iosephus Wicki (ed.), Documenta Indica, Vol. Ⅱ(1540-1549), Romae, 1950, pp. 84~85.

 

48) 지금까지 예수회의 중국포교 프로젝트는 하비에르가 그 효시로 알려져 왔다. 키시노 히사시에 따르면 1550년 11월 무렵, 하비에르는 야마구치에 체재했고, 그 해 11월 중순에는 교토로 향하는 도중에 있었으므로 그의 뇌리에는 중국포교의 구상은 존재는 했었겠지만, 그에 대한 구체화 등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따라서 베르제의 중국 프로젝트는 하비에르보다 구체적이고 더 계획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岸野久, 앞의 책, 144~145쪽).

 

49) 이 서간은 호르무즈로 출발하는(1549년 4월 초) 베르제가 유념해야 할 하비에르의 선교지침이 담겨있다(『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80, 391~408쪽).

 

50) 岸野久, 『ザビエルと日本: キリシタン開敎期の硏究』, 87~90쪽.

 

51)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하고 처음 한 일은 성 미카엘 대천사를 일본선교와 교회를 위한 수호자로 정한 것이었다. 성 미카엘 대천사는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교회의 수호자였기에 하비에르가 얼마가 강하게 이교 세계인 일본선교에 임했는가를 추측해 볼 수 있다(五野井隆史, 『日本キリシタン史の硏究』, 東京: 吉川弘文館, 2002, 24쪽).

 

52) 30년 후 일본에 들어온 예수회 동아시아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는 하비에르의 이러한 선교 전략을 보다 규범적이고 명확하게 확정지었다(최영균,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선교와 동아시아 적응주의」, 『敎會史硏究』 53, 2018, 7~49쪽).

 

53) 후카츠 가타노부(深津容伸)는 하비에르의 귀족 중심의 선교 방법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 박해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유럽에서 그리스도교는 귀족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종교였지만,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에게는 인간도 종교도 모두 통치자들을 따라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즉 민중이나 가신이 주군보다 그리스도교를 우선시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에게 이러한 점은 다카야마 우콘의 배척으로 드러났으며 새로운 정권을 창신한 도쿠가와 막부도 신 앞에 평등을 주창하는 그리스도교는 위험한 종교로 간주하였다. 하비에르가 시작한 귀족선교의 성공은 이후 선교사들이 본국에서처럼 정치권력자들을 염두에 두고 일본의 정치권력자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면 유럽처럼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종교로서 인정받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즉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화 된 유럽의 사회적 형상이 일본에서도 재현될 것이라는 낙관적이고 단순한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집권하며 권력자들의 생각과 자세변화는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그리스도교가 발전되어 민중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면, 박해 이외에 공존을 가능하게 할만한 다른 방법이 없었다(深津容伸, 「日本人とキリスト敎 :キリシタン伝道の場合」, 『山梨英和大学紀要』 第10号, 2011, 6~7쪽 ; 최영균, 「종교의 정치화와 좌절된 적응주의: 예수회의 나가사키 영유(領有)를 둘러싼 종교-정치의 갈등」, 곽진상 · 한민택 편, 『빛은 동방에서』,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19, 501~544쪽).

 

54) 五野井隆史, 『日本キリスト敎史』, 東京: 吉川弘文館, 1990, 39쪽.

 

55) 게다가 테몽호케의 난(天文法華の乱, 1536년)으로 교토 남부는 심한 화재로 전소되었고 북부지역도 3분의 1이 소실되었다.

 

56) “1551년 12월 24일, 말라카의 프란치스코 페레스 신부에게”,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95, 529쪽.

 

57) 알렉산드로 발리냐노 역시 1583년 『동인도에 있어서 예수회의 기원과 진보의 역사』에서 그가 야마구치를 순찰하며 과거에 이곳에 왔던 하비에르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비에르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허술하고 남루한 복장이나 세상 것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가 일본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이 방해될 것이다. 일본인은 대단히 의례적이고 외견상 화려한 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리스도교의 겸손이나 금욕적인 태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비에르는 다른 복장을 하고 이상하고 거만한 모습의 매너를 보이기로 결심했고 이와 같은 것으로 참된 자기 비하의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한해 가능한 것이다.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업신여기는 것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각지에서 사제들은 보다 높은(mejor) 신분적 복장을 하고 2~3인의 수행원(종)을 데리고 다니며 즉시 인도 총독 및 주교의 신임장과 선물을 갖고 야마구치로 돌아갔다. (…) 오우치 영주는 신부들이 특별한 복장(otro trage)을 하고 대단히 진귀한 가치가 있는 많은 선물을 갖고 온 것을 보았다. 그 선물에 만족을 표했다”(Alessandro Valignano, Historia del principio y progresso de la Compañia de Jesúen las Indias Orientales(1542-64), I. Wicki ed., Roma: Monumenta historica Societatis Iesu, 1944, pp. 176~177).

 

58) 岸野久, 『ザビエルと東アジア』, 46쪽.

 

59) Richard H. Drummond,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Japan, Grna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1971, p. 59.

 

60) 그럼에도 하비에르는 그리스도교를 일본에 전하는 데 있어 토착종교인 불교의 많은 상징 자원을 부분적으로 차용하거나 수용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동인도 지역과는 다른 태도였다(Andrew C. Ross, A Vision Betrayed: The Jesuit in Japan and China, 1542-1742, NY: Orbis, 1996, p. 28). 마태오 리치와 예수회원들이 중국에서 유교의 교리에 대해 수용적 입장을 보였지만, 그것을 신학적 다원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리치와 그에 찬동하는 선교사들은 원시유교에 있었던 上帝, 鬼神 관념을 끌어내어, 각각 데우스(Deus), 영혼(Anima)과 상응한다고 파악하는데, 이것은 불교의 교리와 상징체계를 이용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유교는 민중종교도 아니었고, 동아시아의 관료 엘리트를 위한 통치 철학이었을 뿐이므로 리치는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해 일종의 설명 도구로 사용한 것뿐이었다. 오히려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던 바티칸과 유럽 지식인들이 유교를 종교화하여 ‘조상’과 ‘공자’에 대한 제례 논쟁을 일으켰고, 동아시아의 천주교 박해가 발생했던 것이다(데이비드 E. 먼젤로, 이향만 외 옮김, 『진기한 나라 중국: 예수회의 적응주의와 중국학의 기원』, 나남, 2009).

 

61) 물론 이것은 眞言宗 교의에 대한 안지로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안지로는 ‘다이니치’(大日如來)와 불교의 조왕신[荒神]을 같은 것으로 착각하였다. 조왕신은 삼보(三寶) 즉 佛, 法, 僧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다이니치’의 유일불 사상과 결합하여 마치 위격으로는 셋이요 실체로서는 하나인 삼위일체 하느님인 것처럼 하비에르를 착각하게 만들었다(岸野久, 『西欧人の日本発見―ザビエル来日前 日本情報の研究』, 吉川弘文館, 1989, 111쪽 ; 大和昌平, 「キリシタン時代最初期におけるキリスト教と仏教の交渉」, 『キリストと世界:東京基督教大学紀要』 24券, 2014, 115~117쪽).

 

62) 安野眞幸, 『敎會領長崎: イエズス会と日本』, 東京: 講談社, 2014, 14쪽.

 

63) 이러한 인식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바테렌(사제) 추방령’을 공표했을 때도 드러난다. 히데요시는 ‘八宗九宗’을 말하며, 일본불교 八宗에 새로운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파가 더해져 ‘九宗’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는 전국시대 민중들의 지지를 얻고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무장을 갖춘 사원(寺院) 세력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히에이잔(比叡山)이나 이시야마(石山) 혼간지, 규슈의 히코산(彦山)과 비교 대상이 된다. 일본 중세에는 사원에 의해 장원이나 유통경제가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회가 승려의 의복과 습속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맞추고 나가사키에서 남만 무역을 한 것은 어쩌면 당시 민중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 민중불교 종파를 따라 한 적응주의적 태도로 볼 수 있다(黑田後雄, 『寺社勢力-もう一つの中世社會』, 東京: 岩波新書, 1980).

 

64) 이와 같은 점은 교토 등의 도시에서 번영한 법화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들도, 짧은 기도(題目, ‘남묘호렝게쿄’)를 반복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여겼다. 해마다 바쁜 민중은 이 종교에서 큰 구원을 보았다(川村信三, 『戰國宗敎社會=思想史』, 東京: 知泉書館).

 

65) 有元正雄, 『近世日本の宗敎社會史』, 東京: 吉川弘文館, 2002, 5쪽.

 

66) 야마구치의 진언종의 주요 사찰은 6곳이 있었다. 神光寺, 薬師寺, 延光寺, 端坊, 安薬寺, 永岳寺 등이었다(岸野久, 앞의 책, 254~255쪽).

 

67) 프로이스가 보도하는 이 내용이 하비에르가 한 말인지에 대한 역사적 실증이 필요하지만 16세기 중후반 불교와의 관계와 교의와 관련된 교회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フロイス, 松田毅一他 訳, 『日本史』 券六 豊後編 Ⅰ, 東京: 中央公論社, 1978, 60~63쪽).

 

68) 기시노 히사시는 프로이스가 이 글을 쓴 것은 1580년대였고, 하비에르가 다이니치 사용을 금지한 것은 하비에르 이후의 교회담론을 반영한 프로이스의 작위적 기술이라고 주장한다(岸野久, 『ザビエルと東アジア』, 253~254쪽). 프로이스는 하비에르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불교에 대해 대립적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러한 그의 논조는 그의 일본사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69) 吳伯婭, 『康雍乾三帝與西學東漸』,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2, 140~141쪽.

 

70) 高瀬弘一郞, 『キリシタン時代對外關係の硏究』, 東京: 八木書店, 2017, 487쪽.

 

71) 물론 이 계획은 하비에르 당시 실현되지 않았지만, 유훈으로서 이후 남만 무역항의 업무에 예수회가 적극 관여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즉 예수회가 중심이 된 무역항은 분고→히라도→요코 세우라→후쿠다→나가사키로 변천 과정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나가사키 항구 앞의 미사키(岬) 교회는 남만 무역의 포르투갈 상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나가사키에는 포르투갈 왕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고 상관은 있을 수 없었으나 예수회의 노력으로 상관이나 관세수입이 형성되었다.

 

72)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 94, 516쪽.

 

73) 安野眞幸, 『敎會領長崎: イエズス会と日本』, 東京: 講談社, 2014, 22~29쪽.

 

74) 1578년 예수회 동인도 순찰사이자 교황 특명전권대사(nuntio) 발리냐노가 마카오시와 계약하고 아루마산 조합의 예수회 지분을 상당 부분 확보함으로써, 예수회가 생사 무역으로부터 수입을 직접 얻는 제도를 확보했다. 그래서 고아→말라카→마카오→나가사키의 선상에서 마카오↔나가사키 양자 축으로 하는 예수회 동아시아 선교의 경제적 보급로가 확보되었던 것이다(高瀬弘一郞, 『キリシタン時代對外關係の硏究』, 1~184쪽).

 

75) 저장성에 있는 항구도시.

 

76) 1552년 1월 29일 코친발 “유럽의 예수회원에게”, 『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全書簡』, 書簡96, 544쪽.

 

77) 데이비드 E. 먼젤로, 이향만 · 장동진 · 정인재 옮김, 『진기한 나라 중국』, 나남, 2009.

 

[교회사 연구 제55집, 201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영균(수원교구 호계동 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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