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17세기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인조실록을 중심으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7 ㅣ No.1140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17세기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중심으로*

 

 

국문초록

 

후대에 방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진왜란 이후 외교관계가 재개된 일본을 통해 17세기 이후 일본 가톨릭교회에 대해 많은 역사적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 또 일본 그리스도교인들이 핍박을 받거나 핍박에 항거하기도 하고 국외, 특히 마카오나 중국으로 탈출하거나 거기로부터 다시금 잠입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국외로 탈출하거나 잠입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에 표류하게 되어 외교문제를 유발시키고 효종 때에는 이런 일로 영의정까지 귀양을 가게 되는 외교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본 논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역사를 처음 다루기 시작한 17세기 《인조실록》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호칭의 변화(吉利施端, 吉伊施端, 吉利是段에서 耶蘇宗文으로), 당시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정황, 한·중·일 관계에 그리스도교가 끼치는 정치·외교적 영향, 《인조실록》에 묘사된 혹은 비변사가 인식하는 조선의 그리스도교인관 등에 대해 고찰해 보면서 이를 교회사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한다. 《인조실록》에 나타난 17세기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에 관한 정보 자체가 일본 쓰시마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수집되고 있기 때문에 그 기록이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태까지 지레짐작한 것과 달리 우리나라 조정이나 사대부들이 17세기에는 중국보다 일본으로부터 더 많은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보를 얻었음이 확실하다.

 

 

I.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교는 언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을까? 확실한 유물 · 유적이나 사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라나 고려 때부터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 1558-1600) 진영에서 1594년부터 1595년까지 1년간 몰래 종군한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1-1611) 신부에 의한 접촉1)이나 당시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 중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순교하기도 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2)이 일본에 다소 존재한다. 하지만 조선통신사를 통해 돌아온 포로들 중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혹은 자신의 몇 대 조상이 이런 신앙을 가졌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에 대한 기록을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를 처음 소개한 최초의 기록3)은 아마도 이수광(李睟光, 1563-1628년)의 《지봉유설(芝峰類設)》에서 마테오 리치(Mateo Ricci,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중우론(重友論)》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것일 것이다.

 

구라파국歐羅巴國을 대서국大西國이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이마두利瑪竇(마테오 리치, Matteo Ricci)라는 자가 있어서, 8년 동안이나 바다에 떠서 8만 리의 풍랑을 넘어 동월東粤에 와서 10여 년이나 살았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 2권이 있다. 첫머리에 천주天主가 처음으로 천지를 창조하고 편안히 기르는 도道를 주재主宰한다는 것을 논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영혼은 불멸의 것으로 금수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논하였으며, 다음에는 육도윤회설六道輪回說(선악善惡의 응보에 의해 육도六道를 유전流轉한다는 불설佛說)의 잘못과 천당 · 지옥 · 선악의 응보를 변론하고, 끝으로 인성人性은 본래 선善하다는 것과, 천주天主를 존경해 받드는 뜻을 논하고 있다. 그 풍속에는 임금을 교화황敎化皇이라고 일컬으며, 혼인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교황의 지위를 승습承襲하는 아들은 없고, 어진 이를 선택하여 세운다. 또 그 풍속은 우의友誼를 소중히 여기며 사사로운 저축을 하지 않는다. 그는 《중우론(重友論)》을 저술했다. 초횡焦竑이 말하기를, “서역 사람인 이마두군이, ‘벗은 제2의 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기묘하다”라고 했다. 이 일은 《속이담(續耳譚)》에 자세히 나온다.4)

 

이수광은 실학의 선구자로서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使行)의 경험(1588년, 1563년, 1611년)을 통해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에서 다양한 문화를 보고 배우고, 예수회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그 결과 “전통과 세계를 껴안은 문화 백과사전”5)인 《지봉유설》의 집필을 1614년에 완성하였고,6) 이를 그의 두 아들 이성구와 이민구가 《지봉선생집(芝峰先生集)》과 함께 1633년(인조 11년)에 20권 10책 목판본으로 펴냈다.7)

 

그런데 이 《지봉유설》의 《천주실의》와 《중우론(重友論)》 소개가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교지(敎旨)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일회성에 불과하다면(물론 이것이 그 뒤 한국에의 서학과 가톨릭교회 전래에 끼친 이수광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바는 아니다), 당시 방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진왜란 이후 외교관계가 재개된 일본을 통해 17세기 이후 일본 가톨릭교회에 대해 많은 역사적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 또 일본 그리스도교인들이 핍박을 받거나 핍박에 항거하기도 하고 국외, 특히 마카오나 중국으로 탈출하거나 거기로부터 다시금 잠입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국외로 탈출하거나 잠입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에 표류하게 되어 외교문제를 유발시키고 효종 때에는 이런 일로 영의정까지 귀양을 가게 되는 외교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II. 선행연구 돌아보기

 

1633년부터 1636년까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5회에 걸쳐 ‘간에이(寬永)의 금령(禁令)’을 내린 이후 1639년(인조 17년)에 일본이 쓰시마(對馬島)를 통해 조선에 ‘야소종문금제(耶蘇宗門禁制)’를 요청하면서 아마도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소개되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를 중심으로 소수의 학자들이 일본의 중세 한일 외교사로 먼저 다루었다.8) 다나카 다케오는 일본 중심의 사료인 《야소종문엄금서한(耶蘇宗門嚴禁書翰)》 등만을 인용하면서9) 야소종문금제 요청을 일본의 외교적 성과로만 평가하고 있다.

 

이후에 야마모토 히로후미(山本博文)가 조선에 대한 그리스도교 금제요청과 표착 이국선(異國船)의 처리 과정을 일본의 연해방비체제의 일환으로서 파악했으나, 그 역시 이것이 일본 중심의 국제적인 체제를 조선이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10) 비록 그가 조선의 국가 주체성에 대한 일단의 배려를 하고는 있지만, 이른바 일본의 쇄국과 연해방비 체제를 극단적으로 강조하였고, 그 결과 당시 조선과 일본간의 외교적 행위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잘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일이 앞으로 조선에 표착하는 모든 이국선을 일본으로 인도하는 관행의 시초가 되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11)

 

다음으로 일본에서 연구한 한국의 학자들에 의해 일본 사료뿐만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인용하여 이를 연구하고 있는데, 전반적인 연구 검토보다는 인조 22년(1644년) 진도(珍島) 표착 한선(漢船) 등 일부의 인용에 불과하고 여전히 한일간 외교문제에 치중하고 있다. 신동규는 야소종문금제를 둘러싼 한일외교관계12)와 진도 표착 이국선 처리13)를 다루면서 여기에 나타난 조선의 능동적 외교관을 강조하고 있다. 손승철은 1644년 야소종문 압송에 대한 일본의 요청건과 1653년 하멜 표류 시기 야소종문에 대한 조선의 시각 그리고 1686년 제주도 표류 이양선 압송건 등14)을 다루고 있다. 최근 기무라 가나코(木村加奈子)는 야소종문금제 요청의 배경에 깔려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밀입국 시도와 조선의 대명, 대청, 대일관을 잘 비교하고 있다.15) 이상의 많지 않은 선행연구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동아시아 외교사 및 일본사의 차원에서 취급되어진 것이며,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전반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역사를 처음 다루기 시작한 17세기 《인조실록》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호칭의 변화, 당시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정황, 한·중·일 관계에 그리스도교가 끼치는 정치 · 외교적 영향 등에 대해 고찰해 보면서 이를 교회사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한다.

 

 

III. 《인조실록》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호칭의 변화


1. 길리시단(吉利施端), 길이시단(吉伊施端), 혹은 길리시단(吉利是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관백이었을 때, 기리시탄이라고 하는 남만인들이 일본에 와 살면서.16)

 

대군이신 도쿠가와 이에미추는 기리시탄의 가르침을 엄하게 금지하여.17)

 

너희는 서양의 기리시탄인가?18)

 

아마도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길리시단(吉利施端), 길이시단(吉伊施端), 혹은 길리시단(吉利是段) 등 여러 갈래로 불렀던 것은, 일본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통칭하던 기리시탄(吉利支丹 혹은 切支丹)이란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한문으로 그대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말로 발음이 거의 같거나 유사한 ‘리(利)’와 ‘이(伊)’, 그리고 ‘시단(施端)’과 ‘시단(是段)’이 혼용되고 있는 듯하다.

 

 

2. 야소종문(耶蘇宗文)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가 지금은 이암포로 옮겨왔는데.19)

 

지난번 일본인이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일로 우리에게 자못 소망한 것이 있었으니.20)

 

즉 그들이 비록 그 내막을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일 때문에 온 것이라고 했다.21)

 

지난해에 귀국이 잡아 보낸 중국배 안에 과연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가 다섯 사람이나 있었으므로.22)

 

지난해에 귀국에서 잡아 보낸 광동선 가운데 다섯 사람이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이었다.23)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가 천천영결 등과 교결하여 심복이 되어 일본을 엿보고 있다.24)

 

인조 22년 이후에는 특별한 경우, 예를 들면 효종 때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 일행을 심문할 때 일본어를 아는 사람을 통해 그들을 심문하는 경우 등을 제외하면 모두 야소종문(耶蘇宗文)으로 통일되어 나온다. 아마도 이 시기에는 비변사 관료들이나 사관들이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그들이 예수를 믿는 혹은 따르는 무리라는 의미를 알고 있는 듯하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할 특징이라면, 중국에서는 예수 혹은 예수종문을 지칭할 때 초기에 야소(耶穌)라고 표기하다 일시 야소(耶蘇)로 고쳐 쓴 다음 후대에 야소(耶穌)로 고착되는 것에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야소(耶蘇)로 표기하다 일시 야소(耶穌)로 고쳐 쓴 다음 후대에 야소(耶蘇)로 쓰는 차이가 있다.

 

 

IV. 《인조실록》에 나타난 17세기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1. 일본 가톨릭교회에 대한 정황

 

《인조실록》에는 먼저 대마도 사신 즉 차왜(差倭)들을 통해 일본 그리스도교, 특히 당시 일본 가톨릭교회가 일시적으로나마 성행하였고, 부분적이지만 서구 유럽과 여전히 통상활동을 영위하고 있는 규슈(九州)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황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가 얼마나 간악한가 하는 경각심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전하고, 만약 한반도에 표류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거나 그들이 몰래 승선했을 것 같은 중국배가 있으면 압송해 일본에 보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그리스도교 금지령 및 그리스도교인 학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관백이었을 때, 기리스탄이라고 하는 남만인들이 일본에 와 살면서 단지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만 일삼고 세상의 일은 폐하였다. 또한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기뻐하며 혹세무민하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들을 잡아다 남김없이 죽여버렸다.25)

 

1639년(인조 17년) 일본이 쓰시마를 통해 조선에 야소종문금제를 요청하기 최소한 1년 전, 1643년 쓰시마 도주가 동래부사 앞으로 사법(邪法)을 금하였다는 것과 조선에서도 엄칙해 달라는 정식 서계26)가 전달되기 최소한 5년 전에 이미 차왜를 통해 일본 가톨릭교회의 전교 상황 및 박해 소식이 풍문으로 조선에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인조실록》 인조 16년(1638년)의 기록은 조선 사료에 나오는 일본 가톨릭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라 말할 수 있다.27)

 

(2) 시마바라 · 아마쿠사의 난(島原 · 天草の亂, 1637-1638년)

 

이 때에 이르러 시마바라 지방의 조그만 동네에 두서너 사람이 다시 그 술수를 전파하느라 마을을 출입하면서 촌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더니, 드디어 난을 일으켜 국사인 히고노카미를 죽였다. 이에 에도의 집정 등이 그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28)

 

시마바라 · 아마쿠사의 난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시대인 1637-1638년 규슈 북부 마츠쿠라 가츠이에(松倉勝家, 1597-1638)가 소유한 시마바라번(島原藩)이 있던 시마바라 반도와 데라자와 가타타카(寺沢堅高, 1609-1647)가 소유한 가라츠번(唐津藩)의 아마쿠사(天草) 제도의 농민 기리시탄들이 가혹한 노역과 세금 부담에 대한 불만과 기리시탄에 대한 박해 그리고 기아로 말미암아 두 번에 걸쳐 일으킨 복합적인 원인의 농민봉기였다.

 

시마바라는 기리시탄 다이묘였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1567-1612)의 영지여서, 그곳 대다수 주민들이 그리스도교를 신봉했는데, 게이쵸(慶長) 19년(1614년)에 아리마가 타지로 봉직되면서, 그를 대신하여 야마토 고조(大和五條)에서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 1574-1630)가 부임해왔다. 그는 에도성의 개축을 담당하기도 했던 책임자였는데, 부임하자마자 다시 시마바라성을 신축하면서 백성들로부터 많은 세금과 과중한 노역을 부여했다. 또 강력하게 기리시탄도 탄압하여 세금을 내지 못하는 농민과 개종을 거부한 기리시탄에게는 고문과 처형도 서슴치 않았다. 다음 번주인 마츠쿠라 가츠이에도 시게마사의 혹독한 정치행태를 그대로 답습하여 농민과 기리시탄에 대한 가혹함이 계속 이어졌다. 아마쿠사는 원래 기리시탄 다이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영지였지만, 1600년 세키가하라(関が原)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에게 패배한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廣高, 1563-1633)가 부임하였는데, 다음 세대인 데라자와 가타타카의 시대까지 시마바라처럼 압정과 기리시탄 탄압이 지속되었다.

 

당시 여러 기록에는 이 난의 주된 원인을 가혹한 세금에서 찾았는데, 시마바라 번주였던 마츠쿠라 가츠이에는 자신의 폭정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매개로 결속한 것을 구실 삼아 이것을 기리시탄의 폭동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도 이 난을 기리시탄 탄압의 구실로 이용하기 위해 시마바라 · 아마쿠사의 난은 기리시탄들의 반란이라고 평가하였다. 1637년 10월부터 1638년 2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친 이 봉기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 한 사람도 용서치 않는다는 방침으로 막부는 잔인한 진압에 나섰고, 진압 후 더욱 강화된 그리스도교 금제정책을 실시하여 1639년에는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던 포르투갈과의 외교를 단절하여 이른바 쇄국정책 또는 해금정책을 펼쳐 나갔다. 나아가 조선과 청나라에까지도 그리스도교 금제정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그 결과 시마바라 · 아마쿠사의 난은 그리스도교 금교라는 일본 외교의 근간을 최종으로 확인시킨 분기점이 되었고, 그나마 생존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막부정권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되어 가쿠레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29)

 

(3) 포르투갈의 위협(1647년)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가 천천영결 등과 교결하여 심복이 되어 일본을 엿보고 있다. 지난해 9월에 천천의 큰 배 두 척이 나가사키에 와서 정박하고 있었는데, 한 척에 1천여 명씩 타고 있었다. 여러 배들을 출동시켜 그들을 수색하여 체포하려 할 즈음에 그들은 돛대를 올리고 달아나 되돌아갔다.30)

 

여기 천천(天川)은 당시 일본에서 마카오를 일컫던 지명이며,31) 영결(永決)은 영결리국(永決利國)의 줄인 말로 영국을 지칭한다.32)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를 믿는 무리들이 마카오와 영국과 결탁하여 일본을 겁박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지난해 1647년에는 마카오 혹은 마카오의 종주국인 포르투갈이 1천여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 두 척을 나가사키로 보내어 일본을 위협하였다는 말이다.

 

1549년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가 도착함으로 시작된 일본의 "그리스도교 한 세기(the Christian Century)"는 도쿠가와 이에미추가 1639년 모든 포르투갈 상인들을 일본으로부터 추방함으로 공식적으로 막이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포르투갈 본토는 이미 1580년 스페인에 병합되어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이베리아 연합국의 한 주에 불과하였다. 사실 펠리페 2세(Felipe II, 재위 1598-1621)는 포르투갈의 귀족들을 회유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포르투갈 귀족을 스페인 왕궁에서 우대하는 한편, 리스본의 수도지위 유지와 포르투갈의 독자적인 법률, 통화, 정부조직의 유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본토가 아닌 아소르스(Azores) 제도라든지 마카오 등지에서는 스페인 왕을 포르투갈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60년 지배를 버텼다.

 

펠리페 2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4세(Felipe IV, 재위 1621-1640)는 1637년 시작된 카탈루냐인들의 마누엘리뇨 반란 진압을 위한 전비 조달을 위해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과세를 매기는 한편,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에 마드리드에서 파견한 스페인 귀족이나 친스페인 성향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등용해 포르투갈 국내에선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런 가운데 포르투갈의 귀족들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기로 결의하였고, 마침내 1640년 12월 7일 포르투갈 귀족들의 정예부대가 총독부가 있는 리스본의 히베이라궁을 탈취하여, 이른바 “갈채혁명”을 완성하였다. 그리고는 귀족들의 대표 브라간사 공작이 리스본 대주교 브라가의 대관을 받아 주앙 4세(João IV, 재위 1640-1656)로 등극하여 단절된 포르투갈의 왕위가 다시 계승되었다.

 

이러한 것에 힘입어 포르투갈은 1647년 커다란 함선 두 척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단절된 일본과의 외교적, 무역적, 종교적 관계를 무력으로라도 회복해보려고 노력하였다. 이 1647년 일본에 대한 포르투갈의 위협은 일본의 일반 역사에 잘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이덕무(李德懋)나 정약용(丁若鏞) 등 우리나라의 많은 실학자들에 의해 일본이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꾸민 거짓말이라고 하였으나 나가사키 현지에는 이에 대한 기록과 당시 경비도가 남아 있다.33)

 

 

2. 한반도에 표류한 동아시아 가톨릭교인으로 인한 외교마찰

 

본래 한반도에 표류하는 중국배는 그것이 조난선이든지 무역선이든지, 거기에 승선한 모든 사람들을 육로로 중국에 송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때가 명청교체기이고, 1636-1644년 청이 북경을 공략하여 점령한 이후에도 일정기간 남경 이하에 남명(南明)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특히 한반도에 표류하는 무역선이 주로 광저우(廣州)와 나가사키(長崎)를 왕래하는 배들이었기 때문에, 조난선을 수리해주고 물과 땔감을 공급한 후 목적지인 나가사키로 보내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장차 이것이 조선과 청 사이에 외교 마찰이 되어 효종 때에는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까지 의주(義州)의 백마성(白馬城)으로 유배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 표류한 중국배를 나가사키로 보냄

 

전라 감사 목성선이 다음과 같이 치계하였다: ‘중국배 한 척이 진도군 남도포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군수 이각이 그 배댄 곳에 달려가서 그들을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채만관, 이국침, 임이사, 진경 등은 문자를 약간 알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광동성 광주부 남해현 사람들로, 장사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배를 타고 나가사키[일본에 있는 지방이다.]로 향해 가던 도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비변사가 그 치계에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중국 사람이 표류하여 우리나라 지경에 이르게 되면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지난번 일본인이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일로 우리에게 자못 소망한 것이 있었으니, 이 배가 본래 나가사키로 향했던 것이고 보면, 여기에서 대마도를 거쳐 거기로 보내는 것이 순편할 듯합니다. 그러니 영리한 역관을 별도로 뽑아, 그들을 풀어서 대마도로 넘겨주고, 또 중국배로 하여금 돌아갈 길을 얻게 하소서." 그러자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34)

 

1644년 5월 심지명(沈之溟)이 동래부사이었을 때에 차왜 源成長이 예조참의 앞으로 남만의 사법종지(邪法宗旨)를 잡아서 보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하였다.35) 이에 대해 예조에서는 참의의 명의로 답서를 보내어, 근해의 여러 섬을 수색하여 사종요술(邪宗妖術)의 무리를 잡아 보낼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쓰시마로부터 이러한 요청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해 8월에 광동성 광주부 남해현의 배가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진도군 남도포 앞바다에 표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비변사에서는 52명의 표착 중국인들을 배와 함께 쓰시마로 보냈다.

 

당시는 중국에 있어서 명청 교체기로 청에 대한 남명 정부의 저항이 계속 되고 있었으며, 중국 대륙에서의 전란 상태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남중국의 한인(漢人) 곧 남명 정부의 사람이 조선에 포착해 왔을 경우, 조선에서는 청과 남명 정부 사이에서 어떠한 조처를 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갈등이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과 책봉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아직 남명 정부가 존속하고 있어서 이 광동선 표류민을 어느 쪽에 송환한다 하더라도 중국과의 외교문제를 발생시킬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일본으로부터 그리스도교 금제에 대한 협조 요청이 있어서 조선의 비변사에서는 이 광동선을 표류민들과 함께 일본으로 인도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이 광동선에 야소교도가 타고 있었다는 확신을 비변사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일회유책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36) 그러나 광동선의 선원 모두를 확실하게 일본에 넘겨주기 위해서, 야소교도들이 거기 숨어 섞여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죄목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표착한 선원들이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하지만 그 배가 여태까지 보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는 모양의 선박으로 인하여 그 말을 믿을 수가 없고, 또한 야소교도들이 위장하여 서로 섞여있을 위험성이 있는데, 조선은 그 판별이 불가능하니, 일본에게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 측에서 그리스도교와의 연관성이 없다면 왜관에서의 광동선 인수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 조선은 그들이 야소교도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고 처리할 능력도 없었겠지만, 일본과의 관계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쓰시마번에 일임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의구심이 드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37)

 

(2) 중국배에 승선한 그리스도인 5인을 처형함

 

지난해에 귀국이 잡아 보낸 중국배 안에 과연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가 다섯 사람이나 있었으므로.38)

 

지난해에 귀국에서 잡아 보낸 광동선 가운데 다섯 사람이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이었다.39)

 

지난 번에 이상한 중국배를 잡아 보내주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쓰시마에 있을 때에 집정 등을 통하여 대군 도쿠가와 이에미추께 이를 보고 드린 다음, 그 배를 나가사키로 보내어 배에 타고 있던 52인을 규찰한 결과, 그 가운데 예수를 믿는 다섯 사람이 섞여서 숨어 있다가 마침내 그들의 죄를 승복하였습니다. 귀국의 간절하신 후의의 공효가 가상히 여길 만했습니다. 그래서 집정 등이 우리들에게 그 결행을 높이 사고, 감격하며 권장하는 취지를 귀국에 전달해서 선린의 후의를 칭상하게 하였으므로, 이에 사신을 보내어 자상하게 사례 말씀을 드립니다.40)

 

일본은 조선이 52명의 표착 중국인들을 쓰시마로 보낸 다음 해인 1645년 3월과 5월에 이들 중 5명이 야소종문이었음을 알려왔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예조참의의 명의로 만선포송(蠻船捕送)의 일은 양국의 성신에서 나온 것이며, 대군께서 깊이 감사하다 하니 대군의 은혜가 한량없고 또한 사술(邪術)이 대중을 미혹하는 것은 마땅히 함께 미워할 바라서 이후에도 예외의 이선(異船)이 도항간에 난입하면 즉시 잡아서 압송하겠다고 약속하였다.41) 이것은 야소종문에 관해서는 일본과 조선 양국이 공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당시 조선의 대외정책을 반영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42)

 

(3) 영의정 이경석의 유배

 

이경석과 조경을 의주의 백마성에 유배하였다. 이경석이 유배를 떠날 드음에 조정을 떠나는 깊은 뜻을 상소로 올리며 인하여 경계하는 뜻을 언급하였다. 임금이 이에 다음과 같이 친필로 회답하였다: ‘덕이 부족하고 사리에 어두운 내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오늘과 같은 일이 있게 되었으니, 너무나 통탄스럽다. 관하가 아득히 멀어 그리움이 간절하겠지만, 하늘의 도리가 밝으니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자중자애하라. 상소문의 내용은 내가 가슴에 새기겠다.’ 이어 임금이 표피와 납약을 내렸다. [당시 청의 사신이 관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별감을 시켜서 전하게 하였다.] 임금이 연경에 가는 인평대군에게 청에 가서 잘 말하도록 하였는데, 석방을 허락받고 돌아왔다. 임금이 친히 불러 만나서 간곡히 위로하고 이어 귤을 내렸다. 얼마 뒤에 청의 사신이 다시 온다는 말을 듣고 임금이 그를 지방으로 나가 피해 있게 하였다. 이경석이 춘천으로 떠나려 하자, 임금이 사관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유시하였다: ‘내가 듣건대, 경의 아들이 지금 안협의 수령으로 있다 하니, 경은 우선 그곳으로 가서 편히 조리하라.’ 이경석이 고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강원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계속 지급하게 하였다.43)

 

영의정 이경석(1595-1671)은 인조 22년(1644년)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반청적인 성향을 보이던 봉림대군이 인조를 뒤이어 효종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 1년(1650년)에 권력을 잃은 김자점(金自點, 1588-1652)의 모함으로 의주의 백마성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런데 그가 유배를 가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청나라에서 온 조사관이 앞서 언급한 1644년 진도군 남도포 앞바다에 표착한 광동성 광주부 남해현의 배와 거기 타고 있던 52명의 중국인들을 청나라로 보내지 않고 일본으로 보낸 바로 임금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영의정으로서 책임을 전담하였기 때문이다.

 

 

3. 인조실록에 묘사된 혹은 비변사가 인식하는 조선의 그리스도교인관

 

(1) 그리스도교의 발상지

 

남만과 섬라 사이에 섬 하나가 있는데, 그 섬에 있는 사람들의 형상이 마치 달자와 같이 생겼다.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가 여기에서 일어났는데.44)

 

당시 남만(南蠻)은 일반적으로 포르투갈45)을 지칭하는데, 그렇다면 섬라(暹羅)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이수광은 이 나라가 불교를 숭상하는 “사방 천여 리里나 되는 나라”로 바다 가운데에 있고, 여러 산들이 높이 솟아 둘러져 있고, 땅은 낮고 습기가 많으며, 기후는 바람과 더위가 일정하지 않다고 하였다.46) 후대에 와서 이곳은 남천축(南天竺) 안에 있는 나라로 여겨지며, 불교와 연관지어 생각할 때 태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당시 조정이나 비변사가 그리스도교의 발상지가 남만과 섬라 곧 포르투갈과 태국 사이에 위치한 오늘날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음을 나타내는 바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당시 그리스도교의 총본산이라고 여겼던 바티칸 혹은 그 바티칸을 포함하는 이탈리아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섬라와 마찬가지로 이곳을 섬으로 여겼다는 것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지리상 이해의 여건으로는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겠다.

 

(2) 그리스도인은 살을 찔러 피를 내서 약을 만들어 삼킨다

 

예수를 믿는 무리들의 당파가 여기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요술을 부려 살을 찔러 피를 내서 약을 만들어 삼키며, 맹세하며 사람들을 속여 꾀는 바,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관병이 그들을 거의 다 토벌하여 죽였으나 그 잔당이 아주 없어지지 않아서 흩어졌다가 다시 합해졌는데.47)

 

이것은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미사 혹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이미 알고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당시 공공연하지 못했던 일본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런 기록은 그들이 잔을 나누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성찬을 한두 차례나마 지켜본 듯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열심히 살지 않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관백이었을 때, 기리스탄이라고 하는 남만인들이 일본에 와 살면서 단지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만 일삼고 세상의 일은 폐하였다. 또한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기뻐하며 혹세무민하였는데.48)

 

그리스도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을 비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잘 묘사한 느낌이 드는 기록이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존재하는 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저 세상에 관하여 논하며 그것만을 헛되이 바라보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 곧 순교까지도 불사하며 이 믿음을 이웃에게까지 전하고 권하고 있으니,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그들의 판단에도 일리가 있다.

 

이상 단편적으로 보이는 《조선왕조실록》의 몇몇 기록만으로도 조선사회의 지배계층이나 지식인들은 나름 야소종문으로 일컬어지는 당시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에 대한 선이해가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 나가는 말

 

후대에 방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임진왜란 이후 외교관계가 재개된 일본을 통해 17세기 이후 일본 가톨릭교회에 대해 많은 역사적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 또 일본 그리스도교인들이 핍박을 받거나 핍박에 항거하기도 하고 국외로 탈출하거나 거기로부터 다시금 잠입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국외로 탈출하거나 잠입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에 표류하게 되어 외교문제를 유발시키고 효종 때에는 이런 일로 영의정까지 귀양을 가게 되는 외교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이 논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역사를 처음 다루기 시작한 17세기 《인조실록》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호칭의 변화(吉利施端, 吉伊施端, 吉利是段에서 耶蘇宗文으로), 당시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정황, 한·중·일 관계에 그리스도교가 끼치는 정치 · 외교적 영향, 《인조실록》에 묘사된 혹은 비변사가 인식하는 조선의 그리스도교인관 등에 대해 고찰해 보면서 이를 교회사적으로 재해석하였다.

 

《인조실록》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17세기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에 관한 정보 자체가 일본 쓰시마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수집되고 있기 때문에, 그 기록이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태까지 지레짐작한 것과 달리 우리나라 조정이나 사대부들이 17세기에는 중국보다 일본으로부터 더 많은 동아시아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보를 얻었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사나 아시아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사료에 목말라하는 학계에 연구 영역의 지평을 조금이라도 확장시켜 주었다는 것으로도 이 논문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1차 사료

 

《同文彙考》.

《宣祖修正實錄》.

《仁祖實錄》.

《孝宗實錄》.

《寬永正保之度耶蘇宗門御嚴禁二付朝鮮國御往復御書翰寫》(東京大學史料編纂所藏).

《正保4年葡萄牙船入港二付長崎警備図》(長崎歷史文化博物館藏).

이수광 저, 남만성 역, 《芝峰類設 1》 서울: 사단법인 올재, 2016.

 

2차 사료

 

De Medina, Juan G. Ruiz. Origenes de la Iglesia Catolica Coreana desde 1566 hasta 1784. Roma: Institutum Historicum S. I., 1986.

De Medina, Juan G. Ruiz. Translated by John Bridges.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its Origins, 1566-1784. Roma: Istituto Storico S. I., 1991.

De Medina, Juan G. Ruiz 저. 박철 역. 《한국천주교 전래의 기원(1566-1784)》. 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1989.

Wu, Zhiliang, and Jin Guoping. “The Evolution of Spelling of ‘Macau’”, Macao: Cultural Interaction and Literary Representations(New York: Routledge, 2014

KBS 역사스페셜. 〈임란포로 빈센트 권은 왜 화형 당했나?〉 2012. 3. 8 방영.

木村可奈子. 〈十六-十八世紀東アジア多国間関係史の研究〉. 京都大 博士學位論文, 2017.

木村可奈子. 〈日本のキリスト教禁制による不審船転送要請と朝鮮の対清·対日関係〉. 《史學雑誌》 124-1(2015): 1-39.

山本博文. 《鎖国と海禁の時代》. 東京: 校倉書房, 1995.

손승철. 〈17세기 耶蘇宗門에 대한 朝鮮의 認識과 對應〉. 《史學硏究》 58·59(1999): 859-879.

신동규. 〈近世 東아시아 속에서 日本의 ‘國際秩序’論 考察〉. 《全北史學》 35(2009): 203-243.

신동규. 《근세 동아시아 속의 日·朝·蘭 국제관계사》. 서울: 경인문화사, 2007.

신동규. 〈近世 日本의 그리스도敎 禁制政策과 珍島 표착 異國船의 처리〉. 《日本文化硏究》 24(2007): 147-174.

신동규. 〈近世 日本의 ‘島原·天草의_亂’에 보이는 天草四郞의 神格化와 그影響〉. 《日本思想》 13(2007): 123-163.

신동규. 〈耶蘇宗門禁制를 둘러싼 朝日外交關係〉. 《江原史學》 13·14(1998): 221-248.

田中健夫. 《中世對外關係詞》.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94.

 

……………………………………………………………………………………

 

1) 이에 대해서는 Juan G. Ruiz de Medina, Origenes de la Iglesia Catolica Coreana desde 1566 hasta 1784 (Roma: Institutum Historicum S. I., 1986)를 참조하라. 이 책은 John Bridges에 의해 영역되었으며(The Catholic Church in Korea: its Origins, 1566-1784[Roma: Istituto Storico S. I., 1991), 박철에 의해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한국천주교 전래의 기원(1566-1784)》[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1989]).

 

2) 이에 대해서는 KBS 역사스페셜, 〈임란포로 빈센트 권은 왜 화형 당했나?〉(2012. 3. 8)를 참조하라.

 

3) 《宣祖修正實錄》 宣祖 15年(明 萬曆 10年; 1582年) 1月 1日 庚申-3(“遼東 金州衛人趙元祿等, 福建人陳原敬, 東洋人莫生哥, 西洋人馬里伊, 自海船漂到本國, 順付進賀使鄭琢, 奏聞皇朝.”)에 나오는 “西洋人馬里伊”를 마리아란 이름의 유럽 여성이며 이것이 한국에 소개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통용되던 “서양”이란 개념이 취안저우(泉州) 또는 광저우(廣州)를 기점으로 보고 수마트라 동부를 종점으로 하여 양자를 잇는 선의 서쪽에 있는 바다를 서남해(西南海) 즉 서양이라 하였음을 잘 알지 못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西洋人馬里伊”는 아마도 필리핀 혹은 인도 출신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

 

4) 이수광 저, 남만성 역, 《芝峰類設 1》(서울: 사단법인 올재, 2016), 138-139.

5) 이수광 저, 남만성 역, 《芝峰類設 1》, 14.

6) 이수광 저, 남만성 역, 《芝峰類設 1》, 34.

7) 이수광 저, 남만성 역, 《芝峰類設 1》, 20. 

8) 田中健夫, 《中世對外關係詞》(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94), 260-269.

9) 이에 대해서는 《寬永正保之度耶蘇宗門御嚴禁二付朝鮮國御往復御書翰寫》(東京大學史料編纂所藏)를 참조하라.

 

10) 이에 대해서는 山本博文, 《鎖国と海禁の時代》(東京: 校倉書房, 1995)을 참조하라. 이 책의 제2장 “沿海防備体制とキリシタン禁制”는 그의 두 선행 논문인 〈鎖国と沿岸防備体制〉(《国際交流》59, 1992年 9月号)와 〈日本の沿岸防備体制と朝鮮〉(《歴史評論》 516, 1993年 4月号)을 보안 수정한 것이다.

 

11) 이에 대한 반론은 신동규, 《근세 동아시아 속의 日·朝·蘭 국제관계사》(서울: 경인문화사, 2007), 212-213을 참조하라.

12) 신동규, 〈耶蘇宗門禁制를 둘러싼 朝日外交關係〉, 《江原史學》 13·14(1998): 221-248.

13) 신동규, 〈近世 日本의 그리스도敎 禁制政策과 珍島 표착 異國船의 처리〉, 《日本文化硏究》 24(2007): 147-174.

14) 손승철, 〈17세기 耶蘇宗門에 대한 朝鮮의 認識과 對應〉, 《史學硏究》 58·59(1999): 859-879.

 

15) 木村可奈子, 〈日本のキリスト教禁制による不審船転送要請と朝鮮の対清 · 対日関係〉, 《史學雑誌》 124-1(2015): 1-39. 또한 그의 〈十六-十八世紀東アジア多国間関係史の研究〉, 京都大 博士學位論文, 2017을 참조하라. 특히 그는 이 박사논문에서 우리 학계가 허구의 섬이라고 믿어왔던 《仁祖實錄》 仁祖 22年/明 崇禎 17年/1644年 5月 21日 戊申-1(戊申/東萊府使沈之溟馳啓曰: “差倭 原城長持書契來以爲: ‘耶蘇宗文之黨, 今則移來于里菴浦. 所謂里菴浦在中原, 朝鮮兩間海中, 貴國須着意捕送, 以答關白護還漂海人之意.’ 云.” 備局回啓曰: “關伯慮此賊之漂到我國, 有此捕送之請. 其間事情, 雖未能料度, 彼旣來言, 在我不可不酬答. 宜令承文院, 撰出文書, 答以嚴飭瞭望之意.” 上從之.)에 나오는 “里菴浦”를 중국 해안에 실제하는 “りやんほう=リャンポー(寧波の双嶼)”라고 주장한다.

 

16) “日本關白家康時, 有南蠻人稱以吉利施端, 來在日本”(《仁祖實錄》 仁祖 16年/明 崇禎 11年/1638年 3月 13日 丙子-1).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을 참조하였으나 일본사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 관직명 등 전문용어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필자가 크게 수정 보완하였다.

 

17) “大君痛禁吉伊施端之法”(《仁祖實錄》 仁祖 18年/明 崇禎 13年/1640年 9月 19日 丁酉-3.

18) “爾是西洋吉利是段者乎”(《孝宗實錄》 孝宗 4年/淸 順治 10年/1653年 8月 6日 戊辰-2).

 

19) “耶蘇宗文之黨, 今則移來于里菴浦”(《仁祖實錄》 仁祖 22年/明 崇禎 17年/1644年 5月 21日 戊申-1). 여기 “里菴浦”에 대해서는 註 15를 참조하라.

 

20) “在前倭人以耶蘇宗文事, 頗有意望”(《仁祖實錄》 仁祖 22年/明 崇禎 17年/1644年 8月 8日 癸亥-1).

 

21) “則雖不明言其曲折, 而爲耶蘇宗門之事而來云”(《仁祖實錄》 仁祖 23年/淸 順治 2年/1645

年 2月 18日 辛未-2).

 

22) “前年貴國捕送唐船中, 果有耶蘇宗門之黨五人”(《仁祖實錄》 仁祖 23年/淸 順治 2年/1645年 3月 7日 庚寅-2).

23) “上年執送廣東船中五人, 宗門之黨也”(《仁祖實錄》 仁祖 23年/淸 順治 2年/1645年 5月 21日 壬寅-3).

24) “耶蘇宗文之黨, 與天川永決等, 結爲心腹, 窺覘日本”(《仁祖實錄》 仁祖 26年/淸 順治 5年/1648年 4月 16日 庚戌-2).

 

25) “日本關白家康時, 有南蠻人稱以吉利施端, 來在日本, 只事祝天, 廢絶人事, 惡生喜死, 惑世誣民, 家康捕斬無遺”(《仁祖實錄》 仁祖 16年/明 崇禎 11年/638年 3月 13日 丙子-1).

 

26) 《同文彙考》 附編 卷25 邊禁 2, 〈對馬島主告禁斷南蠻商船仍請釜山貿易書〉.

27) 손승철, 〈17세기 耶蘇宗門에 대한 朝鮮의 認識과 對應〉, 《史學硏究》 58·59(1999), 865.

 

28) “至是島原地小村, 有數三人, 復傳其術, 出入閭巷, 誆誘村民, 遂作亂殺肥後守。 江戶執政等勦滅之云”(《仁祖實錄》 仁祖 16年/明 崇禎 11年/1638年 3月 13日 丙子-1).

 

29) 신동규, 〈近世 日本의 ‘島原·天草의_亂’에 보이는 天草四郞의 神格化와 그 影響〉, 《日本思想》 13(2007), 124-125.

 

30) “耶蘇宗文之黨, 與天川永決等, 結爲心腹, 窺覘日本. 前年九月, 天川之二舡, 來泊長崎, 一船載千餘人, 發船搜捕之際, 掛帆回走”(《仁祖實錄》 仁祖 26年/淸 順治 5年/1648年 4月 16日 庚戌-2).

 

31) Wu Zhiliang and Jin Guoping, “The Evolution of Spelling of ‘Macau’”, Macao: Cultural Interaction and Literary Representations (New York: Routledge, 2014), 8.

 

32) 이수광 저, 남만성 역, 《芝峰類設 1》, 138.

33) 이에 대해서는 《正保4年葡萄牙船入港二付長崎警備図》(長崎歷史文化博物館藏)를 참조하라.

 

34) “全羅監司睦性善馳啓曰: “漢船一艘來泊於珍島郡 南桃浦前洋. 郡守李恪馳到泊船處招問, 則其中蔡萬官, 李國琛, 林理思, 陳璟等稍解文字, 盡是廣東 廣州府 南海縣人, 以商販爲業, 乘船指向長崎, [在日本地方.] 遇風漂到于此云.’” 備局回啓曰: ‘漢人漂到我境, 處置極難. 在前倭人以耶蘇宗文事, 頗有意望, 此船原向長崎, 則自此轉送似爲順便. 別定伶俐譯官, 解付馬島, 且使漢船, 得其歸路.’ 上從之“(《仁祖實錄》 仁祖 22年/明 崇禎 17年/1644年 8月 8日 癸亥-1).

 

35) 《同文彙考》 附編 卷25 邊禁 3, 〈島主請伺捕南蠻書〉.

36) 신동규, 《근세 동아시아 속의 日·朝·蘭 국제관계사》, 237.

37) 신동규, 《근세 동아시아 속의 日·朝·蘭 국제관계사》, 239-241.

38) “前年貴國捕送唐船中, 果有耶蘇宗門之黨五人”(《仁祖實錄》 仁祖 23年/淸 順治 2年/1645年 3月 7日 庚寅-2).

39) “上年執送廣東船中五人, 宗門之黨也”(《仁祖實錄》 仁祖 23年(淸 順治 2年; 1645年) 5月 21日 壬寅-3).

 

40) “前回錮送異船事, 我儕在州時, 旣因執政等, 以達尊聽, 遣彼舡於長崎, 糺察所乘, 或五十二人, 其中耶蘇五人, 雜僞隱匿, 果伏其罪. 貴國懇厚之效, 可以嘉焉. 執政等諭告我儕, 傳達感奬之趣, 於貴國賞其善隣, 故聘价丁寧演之”(《仁祖實錄》 仁祖 23年/淸 順治 2年/1645年 5月 21日 壬寅-3).

 

41) 《同文彙考》 附編 卷25 邊禁 7, 〈禮曺參議答書〉.

42) 신동규, 〈耶蘇宗門禁制를 둘러싼 朝日外交關係〉, 246-248.

 

43) “配李景奭, 趙絅于義州 白馬城. 景奭將行, 箚陳去國之懷, 仍及規戒之意. 上以手札答之曰: ‘寡昧不能爲國, 致有今日, 予極痛歎焉. 關河杳杳, 雖切戀思, 天道昭昭, 相見有日, 卿須自愛. 箚中之辭, 予當體念焉.’ 仍賜豹皮及臘藥。[時, 淸使在館, 使大殿別監來傳.] 上於麟坪大君赴燕之行, 使之言於淸國, 淸國許令放釋. 旣還, 上召見之, 慰諭備至, 仍賜柑. 未幾, 聞淸使又至, 上令出避於外. 景奭將赴春川, 上遣史官諭之曰: ‘聞, 卿子方宰安峽, 卿姑往就, 以便調養.’ 景奭固辭, 不許, 令本道繼以食物”(〈孝宗實錄〉 孝宗 1年/淸 順治 7年/1650年 3月 13日 丙寅-1).

 

44) “南蠻暹羅之間, 有一島焉, 其島有人, 形如㺚子. 耶蘇宗門之黨起於此”(《仁祖實錄》 仁祖 23年/淸順治 2年/1645年 3月 7日 庚寅-2).

 

45) 이에 대해서는 “불랑기국佛狼機國(포르투갈)은 섬라暹羅의 서남쪽 바다 가운데 있으니, 서양의 큰 나라이다. 그 나라의 화기火器를 불랑기佛狼機라고 부르니, 지금 병가兵家에서 쓰고 있다”(이수광 저, 남만성 역, 《芝峰類設 1》, 137)도 참조하라.

 

46) 이수광 저, 남만성 역, 《芝峰類設 1》, 121.

 

47) “耶蘇宗門之黨起於此, 挾以妖術, 刺肌出血, 合藥呑之, 作誓誑誘, 徒衆至數萬. 官兵幾盡討殺, 而餘黨未殄散而復合”(《仁祖實錄》 仁祖 23年/淸 順治 2年/1645年 3月 7日 庚寅-2).

 

48) “日本關白家康時, 有南蠻人稱以吉利施端, 來在日本, 只事祝天, 廢絶人事, 惡生喜死, 惑世誣民”(《仁祖實錄》 仁祖 16年/明 崇禎 11年/1638年 3月 13日 丙子-1).

 

* 이 논문은 2017년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학술지 교회사학 vol 14, 2017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석주(장로회신학대학교 아시아교회사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22362&Page=4&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파일첨부

1,13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