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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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아! 어쩌나: 왜 성당에 다녀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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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7 ㅣ No.506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61) 왜 성당에 다녀야 하나요?

 

 

Q. 저는 철들기 전부터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다녔습니다. 무슨 의미를 알고 다닌 게 아니라 부모님을 따라 거의 습관적으로 다녔습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이 특별히 무슨 도움이 되는지도 잘 모르고 다녔는데, 결혼하자 남편이 저를 보고 비아냥거립니다. “성당에 가면 돈을 주냐 밥을 주냐” 하면서요.

 

남편은 신자가 아닌데다 골수 무신론자입니다. 그래서 늘 종교를 비난하고, 제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저 자신이 별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탓에 남편의 그런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A. 자매님은 이중으로 정신적 고생을 하시는가 봅니다. 외적으로는 배우자가 스트레스를 주고, 내적으로는 경직된 신앙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자매님이 가진 신앙관부터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적은 돈이지만 돈을 들여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반대급부를 기대합니다. 이것을 경제용어로 투자라고 하지요. 우리 인생은 어쩌면 끊임없는 투자의 연속인지 모릅니다. 성당을 다니는 분들 역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을 내서 미사참례를 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투자행위인 것입니다.

 

자매님이 주일미사 한 대를 참례하기 위해서 들이는 정성이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일요일에 다른 약속을 다 접고 적어도 미사 한 시간 전부터 씻고 입으며, 그리고 나서 차를 타거나 혹은 걸어서 성당으로 향합니다. 미사 후에는 다시 집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정리를 하는데 다시 한 시간 정도가 걸릴 것입니다. 적어도 세 시간을 들여 미사참례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렇게 정성을 들여 성당에 다닌다면 당연히 얻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저 종교적 의무로 혹은 고해성사 보기 싫어서 등 수동적 자세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발걸음이 무겁고 짜증이 나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무엇인가 얻으려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자매님 생각은 편견에 지나지 않기에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개운치 않으면 마태오복음 7장 7-11절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자매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이번에는 남편에게 전할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성당에 가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고 합니다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는다’고 대답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정신건강에 상당히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아라 노렌자얀 교수는 “단체로 전례를 거행하면 소외감을 줄여주고, 신자들 간의 네트워크와 격려하는 분위기가 사람들의 행복감을 증진시켜준다”고 했습니다. 특정한 종교모임을 통해 자주 모이는 것은 서로의 가치에 동의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믿음과 결속력이 남다르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심리학자 존 가드너는 “신앙생활은 사람들이 가진 기존의 동정심을 더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강화된 동정심은 사람을 더 강건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었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데, 사실 내 손의 것을 다른 사람 손에 쥐어 주었을 때 더 많은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자선행위를 통해 내가 지역사회와 연결돼 있고, 사회의 한 구성원임을 자각함과 동시에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숙고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믿음이 강한 분들은 아무리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완충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하느님 현존을 믿으면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집니다.

 

전에는 몸으로 사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신앙인이 되면 내가 사는 인생은 내 인생의 일부일 뿐이고, 삶의 힘겨움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려는 신의 섭리의 일부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정신적 재산들을 얻기 위해 다른 것들을 뒤로하고,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0년 7월 11일, 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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