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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조선시대의 고문 - 삶에의 유혹, 고문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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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102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조선시대의 고문

 

삶에의 유혹, 고문의 고통

 

 

박해시대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신앙하는 일 자체를 범죄행위로 여겼다. 범죄는 흔히 사회의 규범을 어기는 일탈행동을 말한다. 천주교 신앙 자체는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받들던 사회에서 ‘그릇된 가르침’, 곧 사학(邪學)으로 간주되었다.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천주교 신도는 곧 사학도였고, 그들은 언제나 범죄자일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를 다스릴 때 조선왕조는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범죄자 취급을 당했던 신도들은 신문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자 아니면 순교자가 되었다. 순교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하였다. 순교자들이 당했던 고문의 고통은 그들의 용덕을 빛내주는 일로 기억되었다.

 

 

조선왕조에서의 고문

 

조선왕조에서는 범죄자를 다스리는 데에 법으로 허용된 다섯 가지의 형벌이 있었다. 신체에 고통을 주는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이 있었고, 자유를 구속하는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이 시행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범죄에는 생명형에 해당하는 사형(死刑)을 집행하였다. 이 가운데 태형과 장형은 일종의 고문이었다. 조선왕조는 죄인에 대한 신문이나 처벌의 방편으로 고문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태형과 장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부과되었다. 태형은 손가락보다 가는 가시나무 회초리로 형틀에 묵인 죄인의 아래옷을 내리고 10대를 기본단위로 하여 최대한 50대까지 볼기를 때리는 형벌이었다.

 

반면에 장형은 손가락 굵기 정도의 가시나무 회초리로 죄질에 따라 60대부터 100대까지 때렸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은 흔히 남용되기 마련이었다. 죄인을 다스리던 회초리는 몽둥이로 변했고, 죄인의 엉덩이는 오금 아랫부분을 포함한 몸 전체로 확대되어 갔다.

 

그밖에 법에는 없었던 여러 형벌들로 죄인을 다스렸다. ‘주뢰형’은 법정형인 태형이나 장형과는 달리 법외형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이 주뢰형이 천주교 탄압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주뢰형에는 가위주뢰, 줄주뢰, 팔주뢰 등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중 가위주뢰는 사람의 양다리를 함께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몽둥이를 넣어 가위를 벌리듯 좌우로 벌려 고통을 주는 방법이다. 집행자들이 노련하면 뼈가 휘기만 하지만, 경험이 없는 풋내기일 때는 뼈가 대번에 부러진다. 주뢰형을 받으면 죄를 면하고 풀려난다 해도 불구가 되기 쉬운 참혹한 형벌이었다.

 

이 때문에 영조 8년(1732년)에는 “가위주뢰는 매우 혹독하여 만일 이 형벌을 사용하면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이를 영원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과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던 이가환이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의 배교를 유도하고자 이 주뢰형을 시행하였고, 그 뒤 천주교 신자들에게 다시 일반적으로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순교자들이 당했던 고문

 

신문관들은 천주교 신도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원하는 답변을 재촉하는 방법으로 각종 형벌을 사용했다. 신도들은 대부분 태형이나 장형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신문에서는 2대부터 30대의 곤장이 가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아예 수형자를 땅바닥에 엎어놓고 힘센 장정이 아주 단단한 참나무 곤장을 들고 수형자의 다리오금 밑을 힘껏 쳤다고 했다. 이 곤장은 길이가 너댓 자, 너비가 예닐곱 자, 두께가 한 치가웃이고, 몇 대만 맞으면 피가 솟아오르고 살점이 떨어져 산산이 날며, 열두어 대 때리면 곤장이 드러난 뼈에 부딪쳐 울린다고 했다.

 

한편, 김대건 신부는 순교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고통을 이겨냈는지를 알리고자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쇠망치로 이빨을 깨고 뺨을 때리며 매질하고 구타하고 돌로 치는 등등 이 밖에 다른 형벌이나 그 당시 널리 쓰이던 욕보임은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주뢰질, 치도곤, 학춤, 삼모장, 톱질 등 신도들이 당했던 고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치도곤’은 참나무로 만든 형벌도구로 길이는 5자이고 손가락 세 개 정도를 합친 굵기로서, 넓적다리를 뒤에서 때리면 뼈까지 부러지게 된다고 했다.

 

‘주장질’은 팔과 머리털을 뒤에서 엇갈리게 묶고,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 양쪽에서 형리들이 다리를 두들겨 패는 형벌이었다.

 

‘학춤’은 양팔을 뒤로 엇갈리게 묶어 높이 매달아놓고, 네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등나무 줄기로 쳤다. 몇 분이 지나면 거품으로 뒤덮인 혀가 입 밖으로 늘어지고 얼굴은 검붉은 빛이 된다. 만일 수형자를 내려서 쉬게 하지 않으면 이내 죽었으므로, 잠깐 쉬게 한 다음 다시 시작했다.

 

‘삼모장’은 나무칼이나 나무 곡괭이로 다리 부분의 살점을 저며내는 형벌이었다.

 

‘톱질’은 말총으로 꼰 줄을 넓적다리에 감고 양쪽에서 당겼다 놓았다 하는 형벌인데, 줄이 살을 파고 들어가 살점이 찢어지게 된다.

 

 

남은 말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이문우 요한 성인은 자신이 당한 고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형관 앞에 출두하여 무지막지한 곤장을 맞았습니다. 제 힘만 가지고는 어떻게 그것을 견디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님의 힘과 성모 마리아와 천신과 성인들과 우리 모든 순교자들의 전구하심으로 지탱되어 거의 괴로움을 당하지 않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은혜를 갚을 날이 거의 없으니, 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고 했다. 그는 고문을 잘 참아냈고, 그 고문의 현장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자리가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왔던 1784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여러 나라의 일반 재판이나 종교적 이단자에 대한 신문에서 고문이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종교재판관이 이단자를 고문한 것은 이단을 포기하고 ‘참신앙’에로 돌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고집스런 이단자들은 마녀재판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화형에 처해 죽어가기도 했지만 유럽 교회에서 이단자로 판정을 받은 ‘마녀’가 마지막으로 화형에 처해진 때는 1793년이었다.

 

조선의 관리들은 신도들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고문을 가했다. ‘정학’이라는 진리를 보호한답시고 참신앙을 관철하려던 신자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어났던 학살이나 유럽의 어느 곳에서 이루어졌던 그 모든 고문은 근본주의적 종교신앙에 대한 집착이 파생시킨 인류의 추악한 탈선행위였다.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는 지배자의 그 탈선행위의 과정에서도 순교자들의 용기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기에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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