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예수님 흔적 따라 장벽을 넘다2: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심 - 야곱의 우물(나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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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85

[예수님 흔적 따라 장벽을 넘다] (2)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심 - 야곱의 우물(나블러스)


가장 핍박받는 이들에게 나타나신 주님, 그곳에…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3km 떨어진 나블러스는 아름다운 고대 도시로 구약에서 세켐(Shechem)으로 부르던 곳이다. 광야에서 모세가 저주를 선포했던 북쪽의 에발산과 축복했던 남쪽의 그리짐산 (신명 11,29 ; 27,12-13)을 사이에 두고 동ㆍ서로 길고 기름진 계곡 사이에 놓여 있다. 나블러스는 두 갈래 고대 상업길이 만나는 통로로 하나는 샤론 해안과 요르단 계곡을 잇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는 갈릴래아, 남쪽으로는 유다로 가는 길이다.

 

야곱의 우물 전경. 우물 위로 두레박과 줄이 보인다.

 

 

이 아름다운 고대 도시 나블러스는 현재 10여 개의 검문소로 둘러싸여 있다. 팔레스타인 땅이면서도 외국 여권 소지자들은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허가증 없이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다. 2000~2004년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기간 동안 나블러스에서만 팔레스타인 주민 400명이 사망했다. 2002년 3월 이스라엘 매쩌 키부츠에서 일어났던 자살 폭탄테러로 유다인 5명이 사망한 사건 이후 이스라엘 군대는 나블러스 시내 안에 있는 구 시가지(Old City)와 발라타(Balata) 난민촌을 테러리스트의 본거지로 지목하고 특별 감시하고 있다.

 

 

나블러스로 향하다

 

그날 '야곱의 우물'에 갈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전날 밤에 있었던 이스라엘 군인들의 나블러스 발라타 난민 캠프 점령과 수색 작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으며 가옥이 파괴됐다는 연락을 받고는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사례를 모으기 위해 국제연대운동(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 나블러스 현장 활동가들과 함께 발라타 난민 캠프에 가야 했다.

 

도착한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으나 발라타 난민촌은 1000여 명의 무장한 이스라엘 군에 의해 완전히 봉쇄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군과 긴 실랑이를 벌였지만 언제 통제가 풀릴지 알 수 없었다.

 

- 야곱의 우물이 있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 전경.

 

 

나블러스에서 머무는 한 달 동안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밤은 하루도 없었다. 낮에는 비교적 평온하던 도시가 밤이면 엄청난 포탄 소리와 함께 공포의 도시로 변했던 것이다. 낮 동안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군인들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지만 밤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팔레스타인 유격대 검거를 목적으로 수시로 도시를 점거했다.

 

 

아름다운 성당

 

통행금지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발라타 난민촌 입구를 서성이다 길 건너 편에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이 야곱이 하모르의 아들에게 산 땅(창세 33,19)에 판 우물,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한 야곱의 우물 (요한 4,1-42) 위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라는 것을 듣고는 주저없이 길을 건넜다.

 

돌담을 따라 아치 모양 입구로 들어서니 커다란 떨기나무와 올리브나무, 다양한 꽃들로 잘 가꾸어진 아랍식 정원이 나왔다. 정원은 고즈넉하다 못해 적막했다. 거리 하나를 두고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제대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바닥과 그리스 정교회의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치형 방 한가운데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자연 그대로의 바위들이 있고 20m 깊이 물 표면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석회암 덩어리들이 부드럽게 닳아 있고 물 긷는 줄에 골이 파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 야곱의 우물.

 

 

야곱의 우물 앞에서

 

약 2000년 전 어느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시던 말씀이 들리는 듯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자가…'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하고 말씀하셨다.…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요한 4,1-28).

 

이스라엘 점령 정책으로 장벽과 검문소에 갇혀 순례자의 발길도 끊긴 '야곱의 우물'의 적막함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시고자 하는 '생명수'를 우리는 얼마나 절박함과 절실함으로 그분께 청하고 있는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시며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을 직면하게 해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불의에 관심을 갖도록 이끄시는 것은 아닐까? 한때 억울하게 학살당하고 나라 없이 온 세상을 나그네로 떠돌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의 고통을 생명의 원리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군사력을 앞세워 팔레스타인 민족을 점령하고 짓밟고 있는 모순의 현장에서 인간의 이기적 욕심과 욕망을 보아야 한다.

 

- 발라타 난민촌에서 만난 소녀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는 숨겼왔던 메시아의 비밀을 북이스라엘 멸망 이래로 혼혈인종이 돼 버린 사마리아인들(2열왕 17,24-41), 그래서 유다인들이 그토록 경멸하고 인간 대접을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한 여인에게 드러내셨음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억압과 고통 속의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이곳에서 만날 수 없다면 '야곱의 우물'은 그저 역사 속의 돌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발라타 난민촌에서

 

'야곱의 우물' 건너편 발라타 난민촌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소녀들의 모습은 2000년 전 예수님이 만났을 사마리아 여인과 다르지 않았다. 자기들 땅에서 허가증 없이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이들, 불순자 검거를 이유로 한밤중 잠자던 방에서 비 오는 거리로 쫓겨 나야 하는 사람들, 테러리스트(혹은 독립운동가)를 숨겨준 보복으로 하루아침에 집이 철거돼 오갈 곳 없이 된 가족들, 아들이 검거된 후 생사를 알 수 없어 절규하는 어머니, 이스라엘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지다 총에 맞은 어린이들…. 이스라엘 군사 점령 아래에서 겪는 이들의 고통은 모든 인류의 양심을 향한 외침이다.

 

차별과 소외 속에 살아야 했던 한 여인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며 생명의 진리를 깨우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가장 핍박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며 인류에게 깨달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다. 야곱의 우물이 있는 나블러스와 발라타 난민촌은 바로 그 현장이었다. 그래서 그 현장은 팔레스타인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로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평화신문, 2008년 6월 1일, 이승정(한국 카리타스 대북지원 실무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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