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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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28: 김진후 비오, 김종한 안드레아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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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3-09 ㅣ No.1083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28) 김진후 비오ㆍ종한 안드레아 부자

대를 이은 빛나는 순교 가문 김대건 신부에서 꽃 피우다



- 신앙 선조 김진후와 김종한 부자, 김대건 신부 등이 대를 이어 살았던 신앙의 터전 솔뫼성지에 2004년 복원한 생가. 1998년 7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 생가터 1587.60㎡(450평) 대지에 정부 지원금 4억 2000여만 원을 들여 세워졌다. 생가는 전통 한옥 구조로, 당시 내포 양반층이 살던 집 형태를 근거로 건립했다. 최근엔 생가 일부를 성체조배실로 꾸며 순례자들이 성체신심을 다지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믿음은 대를 잇고 복음의 씨앗은 세상에 퍼져나간다. 김진후(족보명 운조, 비오, 1739~1814), 아들 김종한(일명 한현, 안드레아, ?~1816), 손녀 성 김 데레사(1779~1840), 손자뻘인 첫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안드레아, 1821~46) 신부…. 훗날 믿음의 뿌리가 된 내포평야 한 가운데에 자리한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를 터전으로 살아온 김해김씨 일가는 숱한 순교자를 냈고, 빛나는 영광의 가문이 된다. 그들 순교자 생가는 이제 솔뫼성지로 복원돼 내포교회(대전교구)에서 신앙의 모범이 됐다.

김대건 신부에서 꽃을 피운 솔뫼 김해김씨 집안의 첫 신앙인은 그러나 김진후가 아니라 그의 맏아들 종현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이냐시오)이 훗날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린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운 '종현'이었다.(「일성록」 기해 8월7일 ; 「추안급국안」 기해 8월 13일) 그로부터 김대건 신부의 할아버지인 둘째 택현, 셋째 종한 등 가족들이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 탁희성 작 제111도 '김진후 비오의 옥중신공'.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그는 10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면서도 기쁨 속에서 기도로 옥중생활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지천명의 나이에 신앙 받아들여

그렇지만 김진후는 입교를 거부하다가 자식들의 계속된 권유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훗날에는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됐다.

이후 박해 때마다 솔뫼 김씨 집안은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특히 김진후는 체포와 석방, 형벌, 유배를 번갈아 당하다가 1814년에 옥사로 순교한다. 그럼에도 집안의 신앙은 오히려 굳건해졌고, 언제든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춘다.

물론 김진후가 처음부터 신앙에 열심이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평소 미신 행위와 풍수지리에 몰두했다. 은총의 길에는 마음을 닫고 오직 세상 영예만을 갈망했다. 지방 군수 곁에서 작은 관직도 얻었다. 가톨릭 신앙에 귀의할 것을 권하는 아들 종현의 간청도 계속 뿌리쳤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영예를 버리고 천주교에 입교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느님 은총'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관아에 불려나가 신앙을 고백한 이후 그는 풀려났다가 잡혀가기를 거듭했다. 끌려간 곳도 한두 곳이 아니다. 홍주(현 홍성)와 청주, 공주 관아에 끌려가 신문과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엔 체포돼 유배를 갔는데, 그 와중에 한 번 배교해 목숨을 보존했던 듯하다.

유배에서 돌아왔지만 1805년 다시 체포돼 해미 진영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가 천주교 신자로서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로 알려져 있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박해는 공식 박해가 아니었기에 사형선고를 받지 못한 채 재판이 무한정 길어졌고,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서 그는 옥중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신중한 성품과 품위 넘치는 처신으로 주위 사람들, 특히 해미 아전이나 옥리들에게서 존중을 받았으며, 드러내놓고 신앙을 실천하고 신앙의 본분을 지켰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모범적이면서도 끝없이 인내하는 옥중생활 끝에 그는 1814년 12월 1일 해미읍성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76살이었다. 아무리 신앙에 따른 인내가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딜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가 숨을 거둔 이유가 지병 때문이었는지, 굶주림 때문이었는지, 혹독한 심문과 매질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당한 고난과 옥중에서의 신앙과 삶으로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또 그의 신앙고백으로 그의 후손들 가운데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가 나왔다.

탁희성 작 제136도 '옥중에서 서한을 쓰는 김종한 안드레아'. 옥고를 치르면서도 그는 형과 친지들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을 권면하고 순교의지를 다졌다.


"순교의 은혜 받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김진후의 셋째 아들 종한은 아버지와는 또 다른 신앙적 삶의 양상을 보인다. 솔뫼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체포와 석방을 거듭했던 것과는 달리 가족과 함께 충청도 홍주(홍성)를 거쳐 경상도 영양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이주, 오랫동안 숨어살며 신앙 실천에 열심이었다.

그의 삶은 그러나 수덕적 삶에 그치지 않았다. 우련밭에서의 삶은 그래서 '덕행 실천'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을 보였다.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이웃을 향한 애긍 실천, 신심을 함양하기 위한 극기가 그의 일상이었다. 낮이면 천주교 서적을 필사해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밤이면 신자들을 자신의 집에 모아놓고 가르쳤다. 또 미신자들에겐 복음을 전하는 데 전심전력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산속에 있게 된 이후로 그의 식사는 익힌 조와 소금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부족하면 산나물과 나무뿌리, 도토리 등으로 생존했다. 이처럼 가난한 삶에도 그는 늘 항구한 기쁨을 보였지 조금도 고생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도 쌉싸래하고 행복했던 우련밭에서의 17년은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나면서 막을 내린다. 그해 5월 그는 관헌들에게 붙잡혀 안동으로 끌려간다. 끌려가는 와중에서도 그는 신앙살이를 멈추지 않는다.

우연히 배교한 뒤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던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을 만난 그는 짧은 시간이지만 적극적으로 신앙을 권면했고, 그의 말에 감동된 김윤덕은 군수에게 되돌아가 배교를 취소하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신앙을 증거한다. 그의 언사와 열심, 평소 삶이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동에서 한 차례 신문을 받은 뒤 경상도 수부(首府) 대구에 이송된 그는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지만 그 고문이 그의 신앙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다.

감옥에서의 삶도 신앙을 증거하는 여정이 됐다. 수감 중에도 아전들은 그가 천주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찾아왔고, 그는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기꺼이 토론을 벌였다. 그의 신앙적 증거가 얼마나 명료했는지 관헌들은 "제아무리 이름이 높은 자라 할지라도 그(김종한)에게 대적할 수 있는 학자는 없다. 그의 언사는 조선에서 가장 저명한 사람들의 언사에나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처럼 토론을 벌이는 와중에 2년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임금의 회신이 도착했고, 또 다른 순교자 6명과 함께 대구감영에서 참형을 받는다. 1816년 12월 19일의 일이다. 순교 뒤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들과 교우들에 의해 이장됐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따르면, 그가 옥중에서 형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 중 한 통에 그의 한 생애 믿음살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저는 순교를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감히 이 마지막 은혜를 바라기까지 합니다. 제가 만일 이 훌륭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후에는 어떻게 삼구(三仇, 육신과 세속과 마귀)에 대적해 나가겠습니까? 육신이 나약할 때 영혼은 강해집니다. 그러나 영혼이 나약하면 육신이 영혼을 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육신이 안온하니 제가 영원한 죽음의 희생자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기에 저는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또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총 안에서, 그리고 모든 교우들의 기도 안에서 순교하기를 바랍니다. 그러하니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순교의) 결실을 맺도록 온 마음을 다해서, 온 힘을 다해서 날마다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감히 형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전적으로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3년 3월 10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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