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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마카오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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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세자요한 신부 [john1004] 쪽지 캡슐

1999-08-11 ㅣ No.35

최초의 조선선교사 배출한 마카오 신학교

방상근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지금으로부터 1백90여년 전인 1836년 5월께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M.E.P) 극동 대표부. 대표부의 대표신부인 르그레즈와(Legregeois·1801∼1866)는 서둘러 대표부 안에 신학교를 개설하고 ‘조선 신학교’라 명명하였다.

이 학교는 바로 조선에서 오는 3명의 신학생들, 즉 최양업(崔良業·토마스)과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과 최방제(崔方濟·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조선 선교사로 활동하던 모방(Maubant·羅) 신부는 각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이 세명의 신학생들을 선발한 뒤,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교육을 위임했던 것이다.

성김대건, 최양업이 신입생으로 선발돼 공부하던 마카오의 신학교 모습. 이 학교의 공식 명칭은 파리 외방전교회 대표부였으며, 현재 이 건물은 아파트로 바뀌어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마카오는 1576년 포르투갈의 교구가 설정된 곳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는 1732년에 설치됐다. 본래 모방 신부는 이곳이 아닌 조선에 가까운 만주의 요동(遼東)에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에 박해가 계속됐으며, 신학생들이 시간을 들여 필수적으로 중국어를 배워야 하고, 신학교의 존재가 알려지면 조선에서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학생들을 마카오로 보내게 된 것이다.

 

마카오의 신학교는 따로 교사(校舍)가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전담 교수가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칼르리(Callery·1810∼1862) 신부가 임시로 교장을 맡고, 대표부의 신부들과 임지로 가기 전에 그곳에 잠시 머물던 중국 선교사들이 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또 신학생들의 거처와 교실은 모두 대표부 안에 있는 작은 방들에 불과했다. 조선 신학생들은 최방제가 이곳에서 생활한 지 5개월여 만인 1837년 11월 열병으로 사망함으로써 두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839년 4월 신학생들은 칼르리 신부를 비롯하여 몇몇 선교사들과 함께 소서양(小西洋)으로 불리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했다. 마카오에서 아편으로 인해 소요가 일어난 때문이었다. 당시 마닐라에 있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이들을 받아들여 마닐라에서 70여km 떨어진 롤롬보이(Lolomboy) 수도원으로 가서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1839년 11월 마카오로 귀환한 뒤 가장 관심 있게 조선 신학생들을 지도한 사람은 다음해 9월 이곳에 도착하여 생활하다가 1841년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는 매스트르(Maistre·1808∼1857) 신부였다. 그는 신학생들의 교육을 맡고 나서 파리의 외방전교회 참사회에 건의하여 교육 여건을 올바르게 조성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때까지 신학생들은 라틴어를 비롯하여 교리·철학·성가·프랑스어·신학 등과 함께 선교사들의 생활 습관을 배우게 됐다.

 

최양업은 1842년 7월 마카오를 떠나면서 그곳의 조선 신학교와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귀국로를 탐색하는 사이에 주로 만주 장춘의 서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는데, 만주교구장 베롤(Verolles) 주교는 1년 전에 이곳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고 성당과 교우촌을 건립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1844년 12월 부제품(副祭品)을 받았다.

 

현재 마카오에 있던 외방전교회의 대표부 건물은 아파트로 바뀌어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반면에 조선 신학생들이 잠시 거처하던 필리핀의 롤롬보이 수도원 한쪽에는 조선 교회의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1986년에 건립한 김대건 신부의 동상도 있고, 최양업과 김대건이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었다는 자리에는 오래된 ‘망향의 망고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편 소팔가자의 옛 성당과 상해의 예수회 신학원은 훗날 폐허가 되었는데, 소팔가자 성당은 의화단 사건이 지나간 1908년에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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