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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57-60: 박 토마스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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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7) 박 토마스 주교 I
사제가 된 후 선교회 사제로서는 매우 예외적으로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유학하여 교회법을 전공했고, 1954년에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훗날 그가 한국에서 ‘박(朴)’ 씨 성을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우리나라 교회에는 흔치 않았던 박사학위를 지닌 신부로서 ‘박사 신부’로 불렸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선교지 한국으로 임명을 받고 그 다음 해인 1955년에 입국하여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운 다음, 춘천교구 관내의 선교사로 파견되어 1956년 횡성 본당 보좌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초 원주 학성동 본당 2대 주임으로 전임되었으며, 같은 해에 잠시 횡성 본당과 간성 본당의 주임으로도 사목활동을 하였다.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8) 박 토마스 주교 II
박 토마스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후 임명된 한국천주교회의 첫 주교로서 무엇보다도 공의회의 정신을 반영하고 실천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비록 외국인으로서의 한계가 있었지만, 젊은 주교로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구의 사제들이나 교우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하나 되고 사회 안에서 그 책임을 다하며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와의 ‘선교 사제의 인사권 위임에 관한 계약’은 1969년 2월 24일자 포교성성의 훈령에 ‘또한, 효과적인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지방 교구장들과 선교회는 그들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라는 조항에 따라 이루어진 협약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 골롬반회 출신이지만 춘천교구의 교구장인 박 토마스 주교는 성 골롬반 선교회와의 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회법에 능통한 박 토마스 주교는 위의 계약을 통해 교구의 선교 활동을 위해 선교사들에 대한 완전한 인사권을 갖게 되었고 더욱 활기차게 사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3월 1일 사순 제1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59) 박 토마스 주교 III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사목활동과 교구 사제들을 위한 생활비, 그리고 신학생 학비 마련 등을 위한 재정 확보를 하는 일은 박 토마스 주교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해마다 교황청과 성 골롬반 선교회를 통한 재정적인 큰 도움과 은인들의 도움으로 여러 사업에 대한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성 골롬반 선교회 총장과 재정 담당 신부와 나눈 서신의 내용을 보면 박 토마스 주교가 얼마나 교구의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 중에 선교회에 보낸 감사 편지의 내용을 소개한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와의 ‘선교 사제의 인사권 위임에 관한 계약’은 1969년 2월 24일 자 포교성성의 훈령에 ‘또한, 효과적인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지방 교구장들과 선교회는 그들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라는 조항에 따라 이루어진 협약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 골롬반회 출신이지만 춘천교구의 교구장인 박 토마스 주교는 성 골롬반 선교회와의 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회법에 능통한 박 토마스 주교는 위의 계약을 통해, 교구의 선교 활동을 위한 선교사들에 대한 완전한 인사권을 갖게 되었고 더욱 활기차게 사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본당과 공소를 위해 25,000달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25,000달러를 기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중략- 또한, 한국의 행복한 가정 운동에 쓰라고 보내주신 10,000달러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헌신적인 선교사들과 선교를 위해 많은 자금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공급해 주는 선교회의 그 한없는 너그러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보답할 길은 더욱더 없습니다. 우리는 사제들이 하느님의 왕국을 넓혀나가기 위해 더욱더 많은 노력을 하도록 하고 재원을 잘 사용하도록 독려할 수밖에 없습니다.”(1976년 3월 16일 아일랜드 총장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020년 3월 8일 사순 제2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60) 박 토마스 주교 IV
1982년 2월부터는 교회의 홍보 활동을 위해 춘천교구 월 소식지인 <회중>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2월 28일부터는 그동안 본당 별로 발행하던 주보를 통합한 <춘천주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많은 행사를 주관했는데, 1982년 10월 9일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 기념 전국 신앙대회 겸 제3차 민족 복음화 대회>가 춘천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여러 주교와 전국의 모든 교구가 참석한, 우리 교구가 주최한 최초의 전국 행사였다. 1983년 4월에는 200주년을 앞둔 사제들의 쇄신을 위한 <특별 연수회>가 한 달간 개최되었고, 교구 내 모든 구성원이 참석하는 <사목회의>를 열기도 했다. 1988년 5월 5일에는 춘천 실내 체육관에서 <인간 생명권 수호 대회>를 거행하여 낙태와 전쟁, 테러와 기아 등으로 죽어가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수호 의지를 천명했다. 일 년 뒤인 1989년 5월 5일에는 <춘천교구 설정 50주년 및 성체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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