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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35: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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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09 ㅣ No.754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35)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공로

은총의 빛으로 피어나는 선행의 꽃

 

 

5세기에 은총과 자유 의지에 관한 펠라기우스 논쟁이 일단락됐음에도, 그리스도인이 초자연 질서에 참여하기 위해 어떻게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난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열매의 좋고 나쁨을 통해 행위 주체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고(마태 7,15-20 참조),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께서 사람의 행실을 보고 그를 판단하실 것(로마 2,6; 2코린 11,15 참조)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성화되고자 할 때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하느님 은총에만 의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습니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선을 추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지탱해 주시지 않으면 선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도와 줄 조력 은총이 존재한다고 강조하면서(「신학 대전」, 제2부 제1편 제111문 참조), 인간의 의지를 은총의 영역 안에서 고찰했습니다. 그럼에도 중세 후반에 라인 강변이나 스페인 등지에서 출현한 영성 공동체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더욱 강조점을 두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매우 소홀히 하는 경향을 나타내며 이단적인 색채를 띠기도 하였습니다.

급기야 16세기에 종교 개혁주의자들이 ‘오직 은총만으로’라고 하며 강력하게 주장했던 주제는 가톨릭 교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16세기에 스페인에서 ‘조명주의자’들이 나타났고 17세기에 프랑스에서 ‘정적주의자’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하느님과 합일하는 체험을 위해서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일반적인 수덕 생활뿐 아니라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마저 거부하고 고요히 머물기만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아주 단순화시킨 방법으로 기도 생활을 실천하기는 하였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서 잘못 이해한 까닭에 결국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단죄됐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은총은 초자연적인 것이므로 우리의 감각 기관에 감지되지 않으며, … 우리의 감정이나 업적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받았다고 추론할 수 없다”(2005항)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하느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2007항).

하지만 “최초의 은총을 받은 뒤 우리는 성령과 사랑의 인도를 받아, …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있다.”(2010항)라고도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세우는 모든 공로의 원천이”(2011항)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공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은총에 협력하도록 자유로이 안배하셨다는 사실에서 기인”(2008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실천하는 주입덕행은 ‘무언가를 행한다’는 측면에서 외적으로 습득덕행과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이 노력한 공로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윤리덕(사추덕)의 경우에도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 사이에 밀접한 유사성이 있음을 드러내기에 표면적으로는 인간이 반복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으로 비칩니다.

하지만 주입덕행의 모든 행위는 그 덕행을 활동케 하기 위해 선행되는 조력 은총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조력 은총은 주입덕행을 활성화시키고 완성하여 영혼 안에 초자연 생명의 증가와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이고, 또한 대죄로 인하여 주입덕행이 상실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혹시 주입덕행을 잃었다 하더라도 주입적 습성을 다시 받아들이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화를 완성하기 위해 선을 향하는 행동이라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여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의지가 앞서는 공로 같지만 이미 하느님께서 은총 속에 배려하고 계시기 때문에, 덕행 실천은 우리가 초자연 질서에 참여하는 데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1월 10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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