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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가톨릭 평신도들, 아시아 백성들의 유익을 위한 희망의 증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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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9-11 ㅣ No.144

아시아 평신도 대회

2010년 8월 31일 - 9월 5일, 서울

폐회연설 (9월 4일 09시 30분)


가톨릭 평신도들, 아시아 백성들의 유익을 위한 희망의 증거자들

 

스타니스와프 리우코 추기경(교황청평신도평의회 의장, 바티칸)

 

 

1. 아시아 평신도 대회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이 대회를 통해 저희 각자가 그리고, 아시아 교회가 받은 선물에 대해 우리들의 마음은 기쁜 감사로 가득합니다. 저희가 함께 지낸 이 기간은 진정 주님으로부터 축복 받은 날들이었고, 교회 친교를 깊이 체험한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주교, 사제, 남녀 수도자, 평신도들이 모두 아시아 교회의 역사적인 특별한 이 순간,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8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인해 주는 성령강림의 분위기를 거의 만질 수 있듯이 느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저희는 성인들과 순교자들, 성인품에 오른 아시아의 고백자들 그리고, 단지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만 그들의 이름을 아시는 아시아에서 “하느님의 대의를 위한 알려지지 않은 모든 전사들”(요한바오로 2세)의 무리가 저희를 영적으로 동반해 주었음을 느낍니다. 또한 이 광활한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하느님의 종 마태오 리치와 같은 위대한 선교사들의 빛나는 모범은 저희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눈 앞에는 저희들의 성찰의 리듬을 맞추어 준 감명 깊었던 전례의 영상들이 떠오르며 들었던 체험담, 많은 개인적인 대화, 회의들, 원탁회의의 연설들이 저희 안에서 다시 울려 퍼집니다. 이 대회에서 저희는 아시아 교회의 선교와 그 삶에서 의외의 면을 발견했습니다. 그 내용의 다양함과 풍요로움 앞에서 저희는 이 기간 동안 드러난 경험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이며, 이 대회의 주요노선은 무엇이었나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답은 “희망”이라는 한 단어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목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에게 이 대회가 모든 것에 앞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라는 교서에서 훌륭히 말씀하시는 그 희망의 학교였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지닐 줄 모르는 고통으로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의 인류는 하느님을 잊고, 근세기의 이데올로기가 약속한 거짓된 천국의 실패로 상처받아 깊은 상실감을 드러내며 드물지 않게 자신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현실적 허무주의의 희생자가 됩니다. 인간은 왜 희망 없이 살 수 없을까요!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수많은 희망을 품을 수 있더라도 결국 삶 전체를 지탱하는 위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에페 2,12 참조). 어떤 절망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대하고 참된 희망은 오로지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다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사랑하시는 하느님뿐이십니다(요한 13,1;19,30 참조)>[1].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이 희망은 나만을 위한 개인적인 희망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이고, <‘백성들’과 실존적으로 일치하는데 달려 있으며, 이 삶은 ‘우리’안에서 각자에게 실현되기> 때문이라고 교황님은 설명하십니다.[2]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는 바로 이 희망을 세상에 증거함으로써 현 시대의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봉사를 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성 베드로께서는 당신의 첫번째 서간에서 그 수취인들과 우리 모두에게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로 3,13-15). 그럼,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 앞에 펼쳐지는 위대한 선교는 어떤 것일까요: 그들이 갖고 있는 희망에 대해 답하는 것입니다. 이 대회의 결론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은 무엇일까요: 이 대륙에 희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14,6)이시다>[3] 라고 쓰셨듯이 그리스도인 각자의 말과 삶을 통해 이 선포가 다시 울릴 수 있고, 다시 울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항상 가능하며,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을 때도 가능합니다. 그럼, 이제 희망이라는 빛으로 이 대회 동안 다루었던 몇 가지 문제의 열쇠를 함께 살펴봅시다.

 

 

2. <교회는 오늘날 자신의 복음화 노력에 있어서 대약진의 거보를 내디뎌야 하며, 자신의 선교 활력에 있어서 역사의 새 시대로 들어서야 한다>.[4]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이 확언은 지금도 매우 현실적이며, 가톨릭 평신도들이 지닌 대체할 수 없는 역할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마태 20, 3-4)라는 그리스도의 초대는 이 대회 기간 동안 라이트모티브로 다시 울렸습니다. 이는 더 많은 남녀 평신도들이 교회의 사명과 삶에 대한 책임에 있어 그들 고유한 부분을 맡아야 한다는 분명한 호소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초대는 이 광대한 대륙에 퍼져있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교구와 본당)의 사명과 삶에도 라이트 모티브가 됩니다. 평신도들의 복음화 활동의 참여로 교회 생활이 이미 바뀌고 있고[5], 이는 아시아 교회에 큰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거룩한 스승께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처럼, 복음적 결실의 방대함은 선교를 위한 파견이 이 대륙에 시급하다는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도 상대주의적인 정신이 만연하여 선교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모든 입장이 동등하다는 대화를 선교와 교체시키려는 경향; 사람들이 더 인간다워 질 수 있고 각자의 종교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신념으로 복음화를 인간 생활 향상을 위한 단순한 사업으로 축소하려는 경향; 다른 이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에 있어 잘못된 개념으로 인해 그들이 회개할 필요성을 거부하게 하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이런 오류와 다른 교의적 오류에 대해 「교회의 선교 사명」이란 회칙이 먼저 답을 주었고, 신앙교리성의 「복음화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한 교의적 고찰」과 「주님이신 그리스도」라는 선언이 이에 답했습니다. 이런 모든 문서들은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의 명백한 파견인 복음화는 부가적인 활동이 아니라 교회가 구원의 표징이 되는 이유입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선교는 믿음의 문제이며, <그리스도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믿는 우리 믿음의 정확한 지표이다>[6]라고 확언합니다.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그러므로, 말과 삶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명시적으로 선포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복음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7]라고 강조하는 것이 시기 적절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승보다 증인을, 가르침보다 경험을, 이론보다 삶과 행동을 더 신뢰 하기>[8]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계속 교회의 선교 사명을 인용하는데 ?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과 종교 간에 대화하는 것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이것들을 외방 선교의 차원에서 조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의 깊은 관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차이점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혼동하거나 분별없이 선교 방법으로 사용하거나 서로 맞바꿀 수 있는 동등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9]

 

 

3. 우리의 선교 사명의 지침으로 2000년에 있었던 한 회의에서 미래의 베네딕토 16세께서 복음화의 3가지 기본 지침을 말씀하신 것은 매우 유익한 것으로서 이를 여기서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당시 요셉 라칭거 추기경께서 수용원칙이라고 부른 것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대의를 위한 겸손한 종들입니다. 성 바오로는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2코린 4,5) 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라칭거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선교는 단순히 말하는 형태가 아니라 삶의 형태입니다. 경청하는 삶이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은 것만 이야기하시며”라고 주님께서는 성령에 대해 말씀하십니다(요한 16,13) […] 주님과 성령께서는 교회를 이루시고, 교회에서 통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함은 교회의 목소리 안에서 그분의 소리를 듣는 것을 전제합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선교 안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10] 그러므로 복음화는 그 이면에 항상 하느님과 교회가 있기 때문에 절대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라칭거 추기경은 <우리는 사람들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사람들을 얻어야만 합니다. 기도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복음화의 방법은 헛된 것입니다. 선포의 말은 항상 열심한 기도 생활에서 배어 나온 것이어야만 합니다>.[11]이런 확신은 우리에게 큰 버팀목이 되고 세상이 교회의 선교 사명에 던지는 도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힘을 줍니다.

 

복음화의 두번째 원칙은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마르 4,31-32) 라는 겨자씨의 비유에서 드러납니다. <큰 현실은 겸손하게 시작합니다>[12], 라고 당시 라칭거 추기경은 강조합니다. 하느님은 작은 이들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있습니다: “남은 작은 이스라엘”은 모든 선택된 민족을 위한 희망의 전달자입니다; 제자들의 “작은 양떼”에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촉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바로 그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2,32 참조). 겨자씨의 비유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이는 겸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즉각적인 결과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양의 원칙은 교회의 원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확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그분께서 씨가 자라는 방법과 시기, 리듬을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사도께서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2코린 9,6)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선교에 우리의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을 배제시키지 않으면서도, 이 원칙은 우리가 선교활동 중 느끼는 실패감에서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복음화의 세 번째 원칙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요한12,24 참조)의 원칙입니다. 복음화에는 항상 십자가의 논리가 있습니다. 라칭거 추기경은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말로가 아니라, 당신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수난은 세상의 삶에서 마르지 않는 원천입니다. 수난은 그 말씀에 힘을 줍니다>.[13]  여기에 바로 믿음의 순교자들이 증거를 통해 복음화 한 중요성이 있습니다. 테르툴리아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더욱 많아지고 결실을 맺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14] 더 잘 알려진 것은: “순교자들의 피는 고백자들의 씨앗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인해 견고해진 신앙의 증거는 아시아 교회의 큰 영신적 자산이고 그 미래를 위해 희망의 밝은 징표가 됩니다. 아시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바오로 사도와 함께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8-10)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있어 믿음과 문화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특별히 수천년의 문화와 종교의 요람인 아시아에 더욱 해당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 중 위대한 인물인 예수회 회원 마태오 리치는 이를 잘 이해했고, 베네딕토 16께서는 그의 업적에 대해 <복음 선포와 그 민족의 문화와의 대화가 잘 이루어진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 민족에게 교의적으로 분명함과 동시에 사목활동에 있어 조심스러움에 균형을 이루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15] 여기 평신도들의 선교에 있어 굳건하고 깊은 신학적 준비가 요구되는 광대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장이 열립니다. 그리스도교 선포의 토착화는 강한 교의적 가치를 지닌, 효율성의 논리에 다시 이끌릴 수 없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최근의 교황님들은 이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역사적인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인간의 문화나 문화들을 단지 장식적으로, 다시 말해 겉치장으로가 아니라 문화의 근원에 까지 깊이 결정적으로 복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16]라고 쓰셨습니다. 교황님은 또한 <복음과 문화의 단절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비극임이 분명합니다>[17] 라고 덧붙이십니다. 공경하올 하느님의 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 큰 주의를 기울이셨는데, 이 주제에 대해 <신앙이 다른 어떤 문화와도 같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신앙은 모든 문화에 있어 독립적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로, 신앙은 모든 문화에 스며들어 있고 그 문화를 고취하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매일의 삶의 구체적인 면에서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문화가 되지 않는 믿음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전체적으로 숙고되지 않은, 충실하게 실천되지 않은 신앙입니다>.[18] 이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문서인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와 같은 맥락으로 토착화를 <인간 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수용됨으로써 그 문화의 참된 가치의 내적인 변모가 이루어지는 것과, 여러 가지 인간 문화 안에 그리스도교가 삽입되는 것>[19]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교회의 숙고와 실천을 포함하기 때문에 아주 심각하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과정은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유성과 순수성을 손상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것이다>[20]라고 덧붙이십니다. 사실, 믿음과 토착화 라는 국제신학협회의 문서에서 <한 민족의 성스럽고 참된 문화 유산을 존중해야 함은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문화 유산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복음이 “유다인이게는 스캔들이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는 것을 누구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21]라고 지적한 것처럼 항상 혼합주의와 화협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께서도 신앙교리성 장관일 때부터 토착화에 대해 기념적인 문서를 작성하는 데 헌신하셨습니다. 홍콩에서 열렸던 아시아주교회의의 한 회의에서 추기경께서는 <이젠 사실 문화의 접목(=토착화)란 말 대신 문화들끼리의 만남 또는 - 다른 표현으로 ? 문화 상호성 (inter-culturalita’)이란 말을 써야 옳겠다. 접목(토착화)에는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발가벗은 신앙이 종교적으로 늘 차별두지 않는 (무관심한) 문화 속에 섞여 들어간다는 것을 전제한다 […] 그렇지만, 이런 발상은 우선 인위적이면서 또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세상에 문화와 동떨어진 신앙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요 또 현대의 기술 문명을 빼면 종교와 동떨어진 문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22] 그리고, <맨 먼저 못 박아 확인해야 할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신앙 자체가 문화란 사실이다. 온전히 순수한 신앙, 그저 다른 것 하나 섞이지 않은 신앙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란 누구이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신앙은 문화를 만들어 내고, 그 스스로가 문화가 된다 […] 따라서 소위 문화 이전의 또는 탈문화화한 그리스도교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리스도교 고유의 역사적 의미를 상실한 채 그저 사상이나 모아 놓은 공허한 이념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23]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교회에 들어서는 사람은 그 고유의 역사와 발전을 이룬 상호 문화성을 지닌 고유한 문화 주체 속에 들어서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일정한 엑소더스(탈출기), 즉 기존 생활로부터의 벗어남, 단절 없이는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없다>.[24] 이 마지막 단언은 중요하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시켜줍니다. 이런 개인적인 만남은 스승께서 제자들에게 세례 때 주시는 삶의 경이로운 새로움에 대한 심오한 놀라움과 발걸음을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에서 모든 것은 우리의 “신앙의 아버지” 아브람의 삶처럼 탈출기에서 시작됩니다: “너의 땅에서 떠나 가거라…”. 그러므로, 복음의 토착화에 대해 말할 때 신앙은 다른 어떤 문화와도 같지 않으며, 모든 문화에 스며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5. 이 대회의 핵심 과제 중 하나에는 자신의 성소와 세상과 교회에서의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는 성숙한 평신도 교육에 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시노드 교부들은 평신도들에 대해 <평신도 교육이 교구의 우선 순위 가운데 포함되어야 하고, 전공동체(성직자, 평신도, 수도자)의 노력이 이 목표에 집중되도록 사목 활동 계획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25]고 당부했습니다. 사실 교육은 평신도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26] 이는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교회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세상에서 교회가 지닌 사명에 그들이 공동책임자로서 계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사목자들은 세례받은 이들에게 합당한 일과 봉사, 과제를 평신도들에게 맡기면서,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교회 안에서 여성의 능동적이고 책임 있는 현존에 대한 이론상의 인정을 실제로 실현시킬 필요가 있다>[27]고 확언한 것처럼 여성들의 기여와 참여를 더욱 존중하면서 본당 내에서 이런 과정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평신도들의 협력이 이루어지는 분야에서는 <거룩한 교역의 성격과 사명, 그리고, 평신도의 소명과 세속성을 보호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평신도들은 사목자와 ‘협력하는 것’이지 ‘대신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28]는 것을 상기시키는 성청 상호간의 훈령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사제들이 평신도들과 참된 협력 관계를 맺지 못하게 위협하는 “성직자적 의식”에 반대해야 합니다. 가톨릭 평신도성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만 머무는 것을 피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각 나라의 민법이 허용하는 한, 평신도들은 그들의 세속적 본성에 의해 교회의 사회 교리서 요약편[29]에 잘 정리된 원칙에 따라, 사회에 그들의 고유한 기여를 하도록 불리었습니다. 이는 복음화 사명에 속하는 것입니다.[30] 그러므로, 교육은 평신도, 사제,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인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그들에게 해당하는 공의회 문헌을 공부하길 바라는데 특히, 평신도들은 그들에게 대헌장으로 여겨지는 사도적 권고인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잘 알길 바랍니다.

 

평신도들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으뜸가는 장소는 그리스도교 삶의 참된 기둥이고, 중요한 기준점이며, 신앙의 친교와 증거의 학교인 본당입니다. 본당에서 교회는 의미 있는 사회적 실체로 육화됩니다. 아시아에서도 역시, 세상이 교회에 던지는 도전 앞에서 오늘날 본당들은 작은 그룹으로 예를 들면, 인정받고 있는 “소공동체”로 신앙을 교육하는 사명에 있어 힘과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여기서 저는 오늘날 교회를 위한 큰 희망의 원동력이 되는 새롭고 활력 있는 평신도들의 단체를 언급하고 싶습니다.[31]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근자에 많은 교회에서 선교 열의로 충만한 ‘교회적 운동’의 대단한 진전을 새로운 사실로 상기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운동이 지역 교회의 생활에 겸손되게 참여하고, 주교나 사제들에 의하여 교구나 본당 구조에 수용될 때에, 이것들은 복음화와 고유한 의미의 선교 활동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 하느님의 종께서는 덧붙이시길 ? 나는 이런 운동들이 확산되고,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용되어, 신자들이 교류하고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의 다양성 안에서 그리스도교 생활과 복음화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권고하는 바이다>.[32] 성령께서 교회에 풍성히 내려주신 새로운 카리스마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 성인, 젊은이들이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가요!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선교를 향한 용기와 열정을 되찾았는가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이 새로운 단체들 안에서 교회의 삶안에 성령의 항상 새로운 물결을 식별하시며 사목자들이 더욱 이 큰 선물에 자신들을 열도록 촉구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공의회 이후 성령께서는 “운동들”을 선사하셨습니다. […] 젊은이들, 성인들이 운동들에 참여하면서 오늘날 삶의 기회로서 신앙의 모델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큰 사랑을 지니고 운동들을 대하길 바랍니다. 운동들은 이곳 저곳에서 본당이나 교구에 수용되고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 고유의 카리스마는 존중되어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삶이 되는 신앙의 형태가 생기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33] 그러므로, 이 대륙에서 일하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와 운동들의 대표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대회에서 나누어 준 소중한 증언과 아시아의 교회에서 하는 모든 봉사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교회는 새로운 카리스마들을 존중하면서,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의 소중한 징표인 이 성령의 선물에 사목적 애덕으로 항상 활짝 열려있으면서 유익함을 끌어낼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양성의 모든 과정에서 최종 목표는 성덕입니다.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들의 많은 대표들이 참석한 이 대회의 결론에 성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이 기간 동안 우리들은 성인들, 순교자들, 아시아 신앙의 고백자들의 도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이 분들에게 헌정된 아름다운 성지에서 한국 순교자들을 기린 미사 때 특별히 그들이 가까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성인들은 그리스도교인의 삶의 큰 스승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그 하느님의 중심성을 말해줍니다. 성인들은 하느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내 걸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그들의 증거로서 그런 삶이 가치 있고, 기쁨을 준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니, 성인들은 우리가 우리의 안전한 둥지로부터 벗어나도록 촉구하며, 세상의 사고 방식으로 편하게 지내려는, 의미 없고 보이지 않는, 오늘날 여기 아시아에도 이미 널리 퍼진 문화와 타협하려는 경향으로 기우는 평범함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촉구합니다. 성인들은 우리에게 소금은 맛을 내고, 등불은 빛을 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시켜 줍니다. 스승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선택이 필요하며, 이는 주님이 부르시는 그곳에서 시대의 사조를 거슬러가고, “반대의 표적”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성인들은, 특히 순교자들은 일치의 특별한 건설자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순교자들의 에큐메니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 개신교, 동방정교회 신자들인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종파를 너머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데,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하느님의 도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멸시하기까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인들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며, 성덕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례받은 이들에게 제시하시는 매력적인 목표라는 확신을 지니도록 합시다. 이것이 이 대회를 통해 얻게 되는 희망의 또 다른 동기입니다.

 

 

6. 그리스도인들의 삼천년기의 시작에 교회가 아시아에서 직면하게 되는 과제는 우리로 하여금 부족하고 무력함을 느끼게 합니다. 여러 징표의 대립하는 힘은 하느님의 대의와 세상의 복음을 끊임없이 제어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께서는 희망의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스위스 주교들의 사도좌 방문 때 했던 “하느님의 실패”에 관한 강론에서 <처음부터 하느님은 항상 실패하십니다. 계속해서 “아니오”라고 하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합니까? 무엇보다 하느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끊임없이 “실패하시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통해 더 큰 자비를 끌어내시며, 그분의 상상력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당신의 큰 집을 더 많은 이들에게 열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항상 찾으시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으십니다>.[34]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후계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확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인간들을 부르시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으시고 당신의 봉사자로, 사절로서 우리를 당신의 곁에 있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3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방인들의 사도께서 권고하신 말씀을 빌어 저의 이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콜로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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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네딕토 16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n.27.

[2] 베네딕토 16세, 같은 책, n.14.

[3] 요한 바오로2세, 권고,「평신도 그리스도인」, n.34.

[4] 요한 바오로2세, 같은 책, n.35.

[5] 요한 바오로 2세, 회칙,「교회의 선교 사명」, n.2.

[6] 위와 같은 책, n.11

[7] 요한 바오로 2세, 권고, 「아시아교회」, n.19.

[8]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n.42.

[9] 위와 같은 책, n.55.

[10] 요셉 라칭거, 새 복음화, “L’Osservatore Romano”, 2000년 12월11-12, 11쪽

[11] 위와 같은 책

[12] 위와 같은 책

[13] 위와 같은 책

[14] 테르툴리아노, 『호교론』(Liber apologeticus) 50,13

[15] 베네딕토16세, 마태오 리치의 죽음 400주년을 맞아 마르케 교구의 알현에서 한 연설, “L’Osservatore Romano”, 2010년 5월 30일, p.8.

[16] 바오로6세,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n.20.

[17] 위와 같은 책

[18] 요한 바오로 2세,「문화계 교회 운동 전국 대회 참석자들에게」, “Insegnamenti” V, 1 (1982), p.131.

[19]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n.52.

[20] 위와 같은 책.

[21] 국제신학협회, 문서 1969-2004, Edizione Studio Domenicano 2006, p.373.

[22] 요셉 라칭거, 『신앙,진리,관용 - 그리스도교와 세계의 종교들』, 정종휴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9, 70쪽.

[23] 위와 같은 책, 74쪽, 77쪽.

[24] 위와 같은 책, 78쪽.

[25] 요한 바오로 2세, 권고,「평신도 그리스도인」, n.57.

[26] 위와 같은 책, n.63

[27] 위와 같은 책, n.51

[28] 평신도의 사제 교역 협력 문제에 관한 훈령,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10쪽.

[29] 『가톨릭교회 사회 교리서 요약편』, 교황청정의평화 의원회, 2004

[30]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 n.5. 참조

[31] 요한 바오로 2세,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n.29. 참조

[3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n.72.

[33] 베네딕토 16세, 독일연방공화국의 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사도좌 방문”에서 한 연설, “Insegnamenti” II,2 (2006), p.637.

[34] 베네딕토 16세, 스위스 주교들과 공동집전한 미사의 강론 중에서, “Insegnamenti” II,2 (2006), pp. 570 e 573.

[35] 위와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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