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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알도록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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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7 ㅣ No.556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알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온 물건은 자기를 만들어낸 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저는,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여긴 것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래서 삶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의 비참하고 좌절한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 때문에 자살하는 암담한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건강을 잃는다든지, 재산을 잃는다든지, 또는 가정을 잃는다든지 해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기에 더 살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실제 건강, 돈, 가정 모두 사람에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그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고,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실입니다.

지금 제가 다행히 건강하게 살고 있지만, 언제 건강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적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중요한 것들을 막상 잃었을 때에도 그때의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이 인생의 행복과 아주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위한 출발점은 내 삶이 누군가로부터 주어졌음을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태어나고 삶이 주어집니다. 삶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삶의 시작부터 인간은 누군가에게 의존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은 자명할 뿐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은 인생의 행복과 직결됩니다.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엉뚱하게 살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수동성에 기초한 삶의 운영, 삶의 경륜이 모든 사람에게 요청됩니다.

수동성으로 특징되는 인간의 삶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의 능동성, 주체성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 충돌을 겪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인생의 보편적 갈등 문제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계획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의 전부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수동성을 깨우치는 데 혼란과 큰 충격이 따르기도 합니다. 끝내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깨달음을 인생에 대한 총체적 ‘관점의 전환’이라고 불러도 좋을 텐데 누군가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혁명적 전환이 되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누구나 큰 어려움 없이, 되도록이면 일찍 깨우쳐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져봅니다.

그 깨달음을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내 삶에 대해서 나 아닌 누군가가 주체로서 존재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를 저는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지어내셨고, 저에게 삶을 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이 고백은 저의 종교적 고백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과 이 종교적 고백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가깝고 밀접한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삶의 자명한 점에서 출발했는데 거의 동시에 ‘그 누군가?’의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래서 삶과 종교의 밀접함, 인간과 하느님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나 가까운지?

하느님은 각각의 모든 사람 안에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심어두셨습니다. 그 능력을 주고서야 ‘인간’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드러냄을 계시라고 하는데, 이 신적 계시를 수용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목적이 ‘사랑’이라면, 둘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고,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려면 서로에 대한 앎이 가능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온전한 상대가 될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의 내면에 하느님을 찾는 마음, 하느님을 찾는 심성이 심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종교심을 왜 심어두셨는가?

의미와 이유를 찾는 데서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인간입니다. 이유를 모르면 계속 답답함을 느끼고, 나아가 그것이 공포심으로까지 발전합니다. 그래서 이유를 모르고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그런데 인간의 지식만으로는 온전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묻기만 하고 답을 얻지 못한 채 답답해하는 그 상태로 죽어가야 하는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바가 사랑과 행복이기에, 가장 궁극적인 차원의 행복을 위해서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이유를 하느님을 통해 찾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꼭 찾아야 행복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의 숨바꼭질

인간은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술래입니다. “우리 둘이 숨바꼭질할까요. 아하~ 그래 두 눈을 감아요. 저기저기 풀잎 속에 숨었나, 흘러가는 구름 속에 숨었나. 아니야 뒤에 있잖아. 다시 한 번 너를 찾아서.”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이 노래가 떠올라 여러 차례 흥얼거렸습니다. “나 찾아봐라~.” 하시는 ‘하느님의 숨바꼭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숨어계시고, 인간에게는 숨어계신 하느님을 찾는 술래의 임무가 맡겨져 있습니다. 이 임무를 꼭 해내야만 인간이 허무에 빠지지 않고 자기 존재의 기초를 튼튼하게 할 수 있습니다. 찾는 것이 어렵지도 않습니다. 무수히 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하느님, 꼭꼭 숨으세요. 머리카락 다 보입니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간

두꺼운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제1편 제1장의 첫 문단을 인용하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본연의 사명이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능력을 이용해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소명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꼭 해야 할 숙제입니다. 자기의 갈망으로 하느님을 찾아내야 합니다.

* 허우영 안드레아 - 광주대교구 신부. 현재 오치동본당 주임으로 있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허우영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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