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ㅣ 봉헌생활
유럽 수도원 기행: 시칠리아의 산 마르티노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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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도원 기행] 시칠리아의 산 마르티노 수도원
친절한 아빠스
시칠리아의 주도州都인 팔레르모Palermo 공항에 내렸을 때는 “오, 뜨거운 시칠리아의 태양이여!” 하며 마중 나온 수사한테 너스레를 떨었다. 차를 타고 산기슭으로 삼사십 분쯤 올라가는데 숲속 공기가 에어컨을 틀어놓은 듯 시원했다. 산길을 굽이굽이 돌며 오를 때마다 여기저기 모퉁이 주위로 서너 집씩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마한 동네들이 나타났다. ‘매의 부리’라는 이름을 가진 산악 진입로를 넘어 가자 녹음이 짙은 기슭으로 들어섰고, 갑작스런 방문객에 놀란 듯 수도원이 부스스 눈을 뜨고 동행한 박 블라시오 신부와 나를 맞아주었다. 약 700년쯤 된 성당은 복원 공사 중이었는데, 교통사고 환자마냥 철골 구조물로 고정된 채 시멘트가 반창고처럼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수도원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자 몬떼까시노 수도원 복도처럼 거대한 복도들이 전후좌우로 펼쳐져 있었다. 일반인들이 마치 박물관을 둘러보듯 수도원 복도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여기저기 어수선한 분위기에 놀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어디선가 아빠스께서 나타나셨다. 살바토레 아빠스, 2년 전 왜관 수도원 100주년 행사 때 한국에서 처음 뵈었던 분이다. 한국을 다녀가신 뒤로 이탈리아 수도원들을 다니시면서, 한국 자랑을 그렇게 많이 하셨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아빠스는 인정 많고 구수한 동네 아저씨처럼 몸소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수도원을 소개해 주었다. 수도원 복도에 문화재 복원 학교와 본당이 함께 있었고, 여러 복도 중 하나만을 따로 구분해서 수도원 봉쇄구역으로 쓰고 있다. 참 이상한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수도원의 역사에 대해 나중에 설명 듣고 나니 좀 이해가 되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6세기 때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뜻으로 이곳에 수도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9세기 들어 사라센인들의 침략을 받아 수도원도 파괴되어 사라졌는데, 14세기에 들어 옛 수도원 터 위에 자리한 몬레알레Monreale 대교구가 다른 곳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을 초대했다. 이때 수도원이 재건축되었고, 수도원 이름도 걸인에게 자기 망토를 잘라준 일화로 유명한 성 마르티노의 이름을 땄다. 그 무렵 이탈리아의 베네딕도회 수도원들 안에서 가난과 복음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자체 개혁운동이 일고 있었는데, 성 마르티노 수도원도 그 영향으로 처음부터 거룩하고 가난한 수도승답게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창설자는 훗날 복자품에 오르고, 수도원은 수사들로 넘쳤으며,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수도원에 헌납한 땅과 재산도 갈수록 늘어났고, 수도원의 규모 또한 점점 커져갔다. 영성과 탄탄한 인맥에다 재력까지 겹쳐지니, 이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이곳 수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 그 당시 몬레알레 대교구는 부유한 교구로 전서방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는데, 성 마르티노 수도원이 교구와 재력을 놓고 막상막하였다고 하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참 재미있는 수도원
‘참 재미있는 수도원이군’ 하고 생각하면서 식당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데, 아빠스께서 우리 곁으로 다가오셔서 뭔가 머뭇머뭇하시는 태도로 말씀하셨다. “우리 수도원에 정신이 조금 이상한 수사님이 한 분 계신데, 식당에서 자꾸 큰소리를 내시거든, 빠코미오, 블라시오, 그러니까 이따가 이분이 고함을 치셔도 절대 놀라지 마.” 이게 또 뭔 소린가 싶었는데, 식당에서 정말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었다. 식사를 시작하고 한 5분쯤 됐을까, 갑자기 한 70대쯤 돼 보이는 수사 한 분이 포크를 든 손을 마구 떨면서 “아빠스!!!” 하고 고함을 쳤다. 순간 나도 맞은 편을 바라보았다. 젊은 수사 한 명이 그 노인 수사 옆에서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드시기 좋게 잘라 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스!!! 여기 좀 봐! 고기가 없. 잖. 아.” 나는 놀라 아빠스를 바라보았다. 아빠스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긴 했지만 이런 일이 일상사가 됐는지 그냥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했다. 이제 한 번 소리치고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갑자기 또 큰 소리가 들려왔다. “XXX!!!”. 참 듣기 민망한 육두문자였다. 다른 수사들도 민망했는지, 애써 태연한 척했다. 아빠스도 우리 쪽 얼굴 한 번 보고, 욕쟁이 수사 얼굴 한 번 보고 그러시면서 계속 식사를 이어가셨다. 보다 못한 다른 한 노인 수사가 이제 그만 식사하라고 조용히 나무라시자 욕쟁이 수사는 다시 순한 양이 되어 식사에만 열중했다. 이런 광경이 식사 때마다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이것도 자꾸 보니까, 처음의 당황스럽던 감정은 다 사라지고 나중에는 공짜로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부활 성야를 마치고 본당 신자들과 어울려 다 같이 샴페인을 터뜨리고 양고기를 뜯던 자리에서도 이분은 여전하였다. 모든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아빠스에게 다시 한 번, “XXX!!!” 하고 욕 한 방을 날리셨다. 회중의 눈치를 쓱 살펴보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다. 아빠스며 여러 신자들이 오히려 그 욕쟁이 수사 곁으로 와서 샴페인을 따르며 부활 축하를 드렸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내가 더 놀랐다.
열심히 살기보다는 바르게 살아야
[분도, 2011년 여름호, 글 최종근 파코미오 신부, 사진제공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0 2,090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