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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서소문 밖: 최대의 순교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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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91

서소문 밖 - 최대의 순교 성지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창업 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서경]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서소문 밖 형장은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지금의 사직 공원에 위치)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양의 성문 밖이란 점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우리의 순교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렇듯 잔인한 대우와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첫 순교자들로부터 80여 년 뒤인 1887년에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사적 제 252호)이 완공되었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알렉산델)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이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소문 밖은 분명 한국 교회 최대의 순교 성지였다. 103위 성인 중 44명이 이곳에서 순교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교회 측에서는 시성식이 이루어지던 1984년에 순교 기념탑을 서소문 공원 안에 건립하였으니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훼손된 상태이다.

 

역사는 우연일 수 없다. 우리의 복음사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섭리를 말하곤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체포, 투옥,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형벌, 서소문 밖에서의 죽음, 이들은 모두 복음의 고리를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섭리요 한국 순교사의 맥이다. 따라서 형리들이 채찍질하는 수레의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수만은 순교자들이 '착하게 살고 영생의 복락을 얻기 위해 올바른 길을 걷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삶을 살아왔다면, 순교 성지 서소문 밖 형장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결코 초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목, 1999년 3월호, pp.93-95,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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