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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조선 신학생들의 발길이 머문 곳: 마카오, 롤롬보이, 소팔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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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88

조선 신학생들의 발길이 머문 곳 - 마카오, 롤롬보이, 소팔가자

 

 

190여 년 전인 1836년 5월경,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는 르그레즈와 대표 신부의 명으로 서둘러 신학교를 개설하고 '조선 신학교'라 명명하였다. 이 학교는 바로 조선에서 오는 3명의 신학생들, 곧 최양업(토마스)와 김대건(안드레아)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성인 모방(Maubant, 羅) 신부는 신학생들을 선발한 뒤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교육을 위임하였다.

 

마카오는 1576년에 포르투갈의 교구가 설정되었고, 파리 외방 전교회의 극동 대표부는 1732년에 설치되었다. 본래 모방 신부는 이 곳이 아닌 조선에 가까운 만주의 요동 땅에 신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인데다가 신학생들이 시간을 들여 중국어를 배워야 할 것이고, 신학교의 존재가 알려지면 조선에서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보내게 되었다.

 

마카오의 신학교는 따로 교사(校舍)가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전담 교수가 임명된 것도 아니었다. 칼르리 신부가 임시로 교장을 맡고, 대표부의 신부들과 임지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던 중국 선교사들이 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또 신학생들의 거처와 교실은 모두 대표부 안에 있는 작은 방들에 불과하였다. 조선 신학생 수는 최방제가 이 곳에서 생활한 지 5개월여 만인 1837년 11월 27일에 열병으로 사망함으로써 두 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839년 4월 6일에 신학생들은 칼르리 신부를 비롯하여 몇몇 선교사들과 함께 소서양(少西洋)으로 불리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마카오에서 아편 때문에 소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닐라에 있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는 이들을 받아들여 마닐라에서 70km 남짓 떨어진 '롤롬보이'(Lolomboy) 수도원으로 가서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칼르리 교장 신부는 이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신학생 일행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고, 훗날 외방 전교회를 탈퇴하고 말았다. 롤롬보이 농장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지도한 선교사는 마카오 부대표였던 리브와 신부와 사천(四川) 선교사 데플레슈 신부였다.

 

1839년 11월 그들 일행이 마카오로 귀환한 뒤 가장 관심을 가지고 조선 신학생들을 지도한 사람은 다음해 9월 이곳에 도착하여 생활하다가 1841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는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였다. 그는 신학생들의 교육을 맡고 나서 파리의 본부 참사회에 건의하여 교육 여건을 올바르게 조성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 때까지 신학생들은 라틴어를 비롯하여 교리, 철학, 성가, 프랑스어, 신학 등과 함께 선교사들의 생활 습관을 배웠다.

 

현재 마카오에 있던 외방 전교회의 대표부 건물은 아파트로 바뀌어 옛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반면에 조선 신학생들이 잠시 거처하던 필리핀의 롤롬보이 수도원 한쪽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사적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1986년에 건립한 김대건 신부의 동상도 있고, 최양업과 김대건이 고향에서 온 편지를 잃었다는 자리에는 오래된 '망향의 망고나무'가 자라고 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1842년 7월에 마카오를 떠나면서 그 곳의 조선 신학교와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귀국로를 탐색하는 사이에 주로 만주 장춘의 서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소팔가자'(小八家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드넓은 만주 벌판, 온통 옥수수 밭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농촌 소팔가자. 그래도 음식점과 상점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을 정도로 다른 마을보다는 제법 큰 편이다. 소팔가자는 길림성 제일의 도시 장춘에서 서북쪽으로 약 75리 정도 떨어져 있는 교우촌으로, 지금도 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신자이다. 현재 소팔가자에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성당 뒤편에는 서울 가락동 본당 신자들의 희사로 조성된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또 1999년에는 소팔가자 진입로가 '대건로'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였다.

 

만주 지역은 본래 북경교구 관할 지역이었다가 1838년에 요동교구(훗날 만주교구가 됨)가 분리 설정되면서 그 관할이 되었다. 이 때 초대 요동교구장으로 임명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배롤(Verrolles, 方) 주교는 소팔가자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과 부속 건물들을 건립하고, 북쪽 전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 후 처음의 성당은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파괴되었으며, 현재의 성당은 1908년에 재건되었다.

 

김대건은 이 곳 교우촌에서 1843년 4월부터 1844년 말까지, 최양업은 1842년 11월부터 1846년 12월까지 머무르면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고, 김대건은 이 곳을 발판으로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44년 12월 10일경 소팔가자 성당에서 둘이 함께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에게 부제로 서품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의 일이다. 조선 선교사 매스트르 신부도 한때 이 곳에 머무르며 최양업과 김대건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부제품을 받기 직전 최양업 신학생은 스승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박해받는 조선 교회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그러면서 인자하신 아버지께 "당신 종들의 피가 마치 아벨처럼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신세가 딱합니다. 저는 정말 부끄럽습니다! 이렇듯 훌륭한 제 동포들이며, 이렇듯 용감한 제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저도 신부님들의 노고와 제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우고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최양업 신부의 1844년 5월 19일자 서한).

 

[사목, 2000년 3월호, pp.77-80,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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