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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 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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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176

성 보나벤뚜라

 

 

1. 성 보나벤뚜라의 생애

 

성 보나벤뚜라의 중부 이딸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1217/1221년에 탄생하였다. 성인께서 태어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아서 매우 심하게 아팠다. 그때 마침 성프란치스꼬께서 보나벤뚜라 성인이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가게 되었다. 성인의 어머니께서는 아기를 안고 성프란치스꼬가 지나갈 때 아픈 아기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성프란치스꼬께서 그 아기를 보자마자 단지 “Oh! Bona ventura”라고 말하였다. 이 뜻은 “오! 참 좋은 행운이여”라는 뜻이다. 그러자 아기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아기의 이름은 보나벤뚜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후 보나벤뚜라 성인은 17세에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다. 그후 빠리대학에서 수학하고 다시 그곳에서 강의하였다. 37세에 프란치스꼬 수도회 총장이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그 당시 일어났던 어려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해졌다. 그 어려운 문제들 중에서 특히 성직자의 규율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지에서의 곤란한 일 그리고 동방교회를 로마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이었다.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은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위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을 불렀다. 교황께서 부른 학자들 중에는 보나벤뚜라 성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은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으나 리용 공의회를 하면서 보나벤뚜라 성인은 운명하였다.

 

이제 보나벤뚜라 성인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자. 성인에 대해서 크게 4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교회 학자로서의 성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프란치스꼬회 들어갈 때는 청년이었다.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한 후 그는 빠리대학에서 열정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매우 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기에 빠리대학 교수였던 알렉산더는 “보나벤뚜라는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알렉산더 교수 수하에서 보나벤뚜라는 지혜와 완덕에 있어서 날로 진보하였다. 그는 27살부터 자기가 공부하던 빠리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강의를 하였다. 우리 교회에서 보나벤뚜라를 세라핌적인 학자라고 한다. 이는 그가 “지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말하였고 또 그렇게 생활했기 때문이다.

 

보나벤뚜라는 “우리 지능을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을까지 감동을 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라고 말하였다.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을 불태우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위대한 학자로서 그는 우쭐거리지도 않고 작은 형제처럼 겸손하게 살았다. 

 

어느날 그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할머니가 “보나벤뚜라가 이렇게 큰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하느님께서 잘 알고 있으니 죽은 후에 틀림없이 천당에 가게되어 하느님의 가장 앞자리에 앉으실 것입니다.”하고 말하자 보나벤뚜라는 “나보다 할머니가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한다.

 

2) 대 성인으로서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가 사람들의 정신을 지혜롭게 밝혀주며 마음을 훈계하고 하느님의 사랑에까지 이르도록 하였다.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와서 “어디에서,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배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보나벤뚜라는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또 다시 어느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뚜라를 찾아갔는데 마침 그때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전기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보고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인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성인을 방해선 안되지!”하며 발길을 돌렸다는 일화도 있다. 보나벤뚜라는 자신의 삶이기도 한 완덕으로 가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는 많은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3) 프란치스꼬 수도회 총장으로서의 보나벤뚜라

 

보나벤뚜라는 빠리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약관 37세에 수도회 총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프란치스꼬가 돌아가신지 3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프란치스꼬 성인이 세운 수도회는 날로 발전하고 커져만 갔다. 보나벤뚜라를 일컬어 “제2의 창설자”라 불릴 정도로 수도회의 조직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특히 프란치스꼬 성인이 만든 회칙을 시대 상황에 맞게끔 형제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은 형제회의 첫회헌 “나르보나 회헌”(Narbona)을 만들었다.

 

4) 알바노의 추기경으로서의 보나벤뚜라

 

성교회는 교회에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보나벤뚜라의 지혜와 성덕을 높이 사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나벤뚜라는 그 직책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회칙의 정신에 따라 순명할 수밖에 없었다. 추기경 임명장을 가지고 왔던 전달자는 보나벤뚜라를 부엌에서 만났다고 한다.

 

1274년 추기경으로써 제2차 리용 공의회에 참석 중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2. 성 보나벤뚜라의 연보

 

작은 형제회는 사부 성 프란치스꼬 이래로 별처럼 빛나는 많은 성인을 배출하였다. 비록 드러남이 없는 숨겨진 생활 속에서도 그분들이 끼친 성덕의 향기는 작은 형제회를 더 향기로운 단체로 만들고 있다.

 

뭇별들 가운데서 샛별만이 다른 별들이 모두 잠든 새벽까지 찬란한 빛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나벤뚜라 성인은 작은 형제회 안에서 시대의 흐름에도 구애됨이 없이 빛나는 샛별과 같은 존재이다.

 

그분의 겸허한 수도자로서, 학자로서, 총장으로서 서로 조화시키기 힘든 상반된 면모를 훌륭히 결합시켜 후세의 모범이 되었으니 비록 총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아래서도 작은 형제로서의 모습을 조금도 손상함이 없이 겸손과 고행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셨으며, 자칫하면 학문을 업신여기기 쉬운 작은 형제들의 생활에서도 수많은 저술과 강의로서 수도생활의 활력은 물론 교회 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특히 토마스 일변도의 사변 위주로 흐르는 중세 신학에 정적 사랑의 훈기를 불어넣음으로 경화되기 쉬운 교회에 넘치는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학자인 성인은 철학자로서 보다 신학자로서 더 유명하니 단테의 신곡 천국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등한 자격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신비 신학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체계에서 철학적인 요소만 추출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철학의 목적과 신학의 목적 사이에 일련의 연속성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철학이 비록 제한을 받는 상태이긴 해도 독자적인 자유성으로 진실을 추구하고 있으며 철학이 가져오는 지식은 인간의 마음을 가없이 상승시켜 진리에 이르게 하는 무대로 보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꼬와 같이 신비적인 방법에 의하여 성취된 하느님께 대한 지식만이 생명을 낳아 참된 지식으로 보았다. 총장으로써 그는 너무나 어렵고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으니 초창기에 적은 수였던 형제회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급히 성장함에 따라 예기치 못했던 많은 어려움 들이 야기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요아킴 원장의 사건인데 그의 과격한 신비적 이단사상에 많은 형제들이 동조하고 심지어는 전임 총장이었던 파르마의 요한까지 여기에 동조하자 형제회가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탁월한 덕행을 겸비하고 그 성덕을 인정하는 전임 총장을 단죄한다는 것은 크게 난처한 일이었으나 성인은 과감히 단죄함으로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르보나 회헌을 작성하여 형제회의 기초를 굳혔으며 당시 여러 가지로 나돌고 있던 사부 프란치스꼬의 전기로 인한 분쟁을 일소하기 위하여 새로운 전기를 만들기로 하고 아씨시와 라베르나에 몸소 가셔서 아직 생존중인 사부님의 동료들을 만나 그분들의 진술을 참고해서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부님의 전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성인은 현대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방법, 즉 연대기적인 형태로 서술하기보다는 사부님의 영적인 초상화를 그림으로서 모든 이에게 성덕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제까지 수도자로서 학자로서 총장으로서 성 보나벤뚜라의 면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오늘날 어느 시대에 비길 수 없을 만큼 고전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는데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탁월한 이유중의 하나는 비록 오늘 우리가 지닌 지혜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찰나적이며 편리한 것보다는 영성적인 것의 우위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라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성 보나벤뚜라를 고찰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믿으며 성인의 생애와 사상 이해에 다소나마 보탬이 될까하여 아래에 성인의 연보를 간략하게 기재하다.

 

1217  이탈리아 박뇨 레지오에서 출생 

1226  소년시기에 병이 들었으나 그의 어머니가 프란치스꼬에게 전구하여 병이 회복됨 

1235-1243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 득할 때까지 수학함 

1243  파리에 있는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고 로마관구에 등록함 수도원에서 알렉산더 할레스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고 그의 사망 후 (1245) 오도네 문하에서 연구를 계속함 

1250-1252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룸바르두스이 명제집” 저술 

1253-1257 파리대학에서 교수생활을 계속하면서 그의 사상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작품인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3편의 토론집을 완성함 

1254-1257 작은 형제회 신학교의 책임자가 됨. 로마에서 교황 알렉산더 4세가 참석한 회의에서 프란치스꼬회 총장으로 선출됨 

1257.4  작은 형제회 첫회헌 작성(파리에서) 

1259  프랑스 관구 총회 개최. 라베르나산에서 “영혼의 여정” 저술 

1260  라르보네 총회(나르보네 회헌 작성). 성녀 글라라 귀천 

1261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거주 

1262  “성 스테파노의 발견” 강론 

1263  빠도바의 성 안또니오 귀천 

1265  클레멘스 4세가 대주교로 임명했으나 사양함. 파리에서 총회 개회(여기서 유명한 “성 프란치스꼬에 대하여” 강론)  

1267  독서 강화집 “십계명에 대하여” 저술 

1268  독서 강화집 “성령칠은에 대하여” 저술 

1270  스페인과 독일에서 체류 

1272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대관식에 참석 리용총회 참석 

1273  독서 강화집 “창조의 여섯째날” 저술. 후에 인노첸시오 5세가 된 도미니꼬회의 뻬드로네프란타샤와 후에 요한 21세가 된 빼뜨로 히스파뇨와 함께 알바뇨의 주교겸 추기경으로 임명됨 

1274  총회 개최 여기서 예로시모 형제가 총장으로 선출됨. 제4차 리용 공의회 참석 

1274.7.15 공의회 도중 귀천. 리용의 프란치스꼬 수도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교황이 주례하고 공의회에 참석했던 모든 고부들이 참석 

1482  교황 식스또 4세는 칙서 "천상 고향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라를 성인품에 올림 

1587  교황 식스또 5세는 칙서 "환호하는 예루살렘"으로 보나벤뚜에게 "교회박사"의 칭호를 내림

 

[출처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홈페이지, 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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