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교육ㅣ심리ㅣ상담

[피정] (12) 부활의 신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42

제12강의 : 부활의 신비(5월 13일 오후)

 

 

주님,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소서.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의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 아멘.

 

이제까지 수난과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강론으로 부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성경 말씀은 말씀 그대로 우리가 이승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살면서 그분과 함께 죽으면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아도 십자가를 깊이 체험한 사람은 주님의 부활도 깊이 맛보게 되고, 그 부활의 기쁨을 이미 이승에서도 체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 안에서 볼 수 있겠고, 신자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사는 분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예를 든 사형수들, 그들은 정말 사형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평화는 밖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평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육신으로 볼 때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 놓인 사형수인데 그러면서도 얼굴이 그렇게 밝고 기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 오래되었습니다만, 1966년 4월 18일에, 대구에서 사형수 한 사람의 사형 집행에 입회한 일이 있습니다. 최월갑이란 사람, 젊은 사람이었는데 아주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긴 헌병 출신의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민간 재판을 받아서 살인강도로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본래는 교도소에 들어와서 개신교 신앙을 가졌었는데, 나중에 자신이 책을 읽어보니까 가톨릭이 진교(眞敎)라고 깨닫게 되어서, 어느 날 죽더라도 죽는 날까지는 진교를 믿으며 살고 싶다고 해서 천주교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수녀님을 통해서, 이미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천주교 교리에 관계된 것만 배우고 있었고, 세례는 아직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주교 임명을 받고 교도소에 나가지 않게 되었지만 제가 교도소장에게 '만일 최월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할 때에는 꼭 나에게 알려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통지를 받고 교도소에 갔는데 그 사람은 이미 형장에 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필요한 법적 절차가 먼저 있었고, 저에게 시간을 주어서 그 사람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교수대 앞이라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세례를 준 목사님이 거기 함께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근본 믿음을 물은 다음, 임종할 때 잘 죽으라고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조건부 세례를 주고 요한 복음에서 라자로의 부활 대목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대목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유언을 들었는데 참으로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감방 안에서도 전교를 해서 누구는 어느 정도까지 신앙을 갖게 되었고 하는 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계한 다음, 자기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교회 묘지에 묻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요점은 이제 그렇게 모든 절차가 다 끝나고 그 사람이 교수대에 올라갔는데 아주 태연하게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만 교수대가 고장이 나서 부러지는 바람에 그 사람이 그대로 묶인 채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교도소 소장은 '최월갑이가 아주 태연하게 올라갔지만 사실은 심장마비로 죽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떨어진 자리에서 아무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으니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간수 한 명이 와서는 최월갑이가 지금 밑에서 아주 싱글싱글 웃고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놀라서 그쪽으로 가보았더니 몸이 묶인 채로 바닥에 굴러 떨어져 있으면서도 얼굴이 어떻게 그렇게 밝을 수 있는지, 누가 얼굴 두건을 벗겼는데 아무 아프다는 말도 없이 정말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도소 소장이 교수대를 고치고 사형 집행을 다시 하라고 명령을 내리니까 그 사람을 끌어올리고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교수대를 고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모두가 젊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도 있고 정말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아주 태연하고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였습니다. 그 때 그가 우리에게 한 말이 "여러분도 믿음을 가지십시오. 특별히 저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죽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활의 기쁨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새로운 참된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같은 자세로 사형 집행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제가 주교로 임명된 것을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저보고 '주교님, 지금 몇 시입니까?'라고 물어서 제가 '몇 시쯤이다'라고 하니까, '앞으로 30분 후면 저는 천당에 가 있겠습니다. 제가 주교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거기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우리가 최월갑이를 위로해야 되는데 그가 우리를 위로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저는 교도소 문을 나오면서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는가, 저렇게 죽을 수 있다면...'하는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만, 우리 교구 신부 중 김재문 신부라고 옛날에 신부된 지 1년도 안된 신부가 신부전증으로 양쪽 눈을 실명을 하고 죽었습니다. 신부된 지 겨우 1년 된 사람이 실명하고 난 다음에 '그리스도는 나의 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다'라는 것을 굉장히 강하게 느껴서 그 말을 할 때, '그리스도는 길이다'라는 것을 마치 제가 체험하는 것처럼 그것을 진정으로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길이시다. 나는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또 '두 눈을 잃었는데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라고도 말하였습니다. 두 눈을 잃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니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참 알아듣기 힘든 말이지요. 그리고 몇 해 전에 '단주 운동'이라는 특수 사목에 종사하시다가 폐암에 걸려서 강남 성모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신 켈리(Kelly) 신부님의 경우도 생각납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그분을 방문했을 때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기쁨을 미리 맛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묵상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결코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도덕 종교가 아닙니다. 또 예수님을 믿으면서, 조상 숭배처럼 비록 과거의 사랑과 은공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지만 현재는 살아 계시지 않는 부모를 섬기듯, 성인이었고 거룩한 분이었지만 현재는 살아 계시지 않는 분으로 섬기는 그런 종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부활하시어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신 우리의 주님, 우리의 구세주, 우리를 참으로 살리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진정 우리 신앙의 바탕이요 중심이며,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과 기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고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끝없이 누릴 것" 이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부활을 믿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토 전서 15장 16절에서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활 신앙은 우리 믿음의 근본입니다. 어떤 면에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incarnatio,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를 믿는 것이 믿음의 근본이라고 강조하고, 사도 바오로는 부활을 더 강조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두 가지가 다 같은 진리입니다.

 

바오로에 의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와 함께 계시고 교회를 살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지금 살고 있으며, 모든 지체들 역시도 바로 그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존귀합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그 주 그리스도는 바오로에게 있어서 바오로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보다도 더 참된 의미로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한 말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결코 죽은 예수를 사모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생의 전부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오로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바탕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 자체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로 신약 성서는 물론이고, 신구약 성서 전체가 이 부활이 있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고, 지금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 부활을 뺀다면, 예수 부활이 없다면 복음 말씀은 죽습니다. 아무런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순이요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복음 말씀,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고 우리 마음을 밝혀주는 빛이 되며 우리 영혼을 살려주는 양식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 속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뿐더러 모든 성사를 통하여 받는 은혜라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아파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 가두기도 하고, 매를 때리기도 하면서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사도 베드로를 위시하여 모든 사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믿고 선포한 복음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이 부활의 증인이며 목격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악인들의 손에 넘겨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 23절과 36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성령 강림날에 성령을 가득히 입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자신들에게 몰려든 군중들에게 힘차게 전한 첫 복음의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이 때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을 말하고 그것이 나자렛 예수에게서 실현된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악인들에게 넘겨서 죽게 하였다는 것,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부활케 하셨다는 것을 선포한 후 바로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니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에서도 같은 뜻의 말씀이 나오는데 '우리는 목격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도 양보할 수 없고 목숨을 바쳐서까지 수호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에서 10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솔로몬 행각에서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벌떡 일어서게 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구걸하고 있는 그에게 "나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고,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나서 걸어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유대의 지도자들인 대사제들에게는 난리가 났지요. 사도들을 불러서 엄하게 추궁했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떡합니까? 그래서 자기들끼리 의논한 다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해서도 안 된다고 했지만, 베드로와 요한 등 사도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지 판단해보시오'라고 응답하면서 그들의 말을 물론 따르지 않았습니다.

 

부활은 정말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이들이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증명할 것도 증명할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그분을 직접 만나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의 가르침을 다시 받고, 뿐더러 당신 부활의 증인으로서 새롭게 권한도 받고, 파견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박해에서도 부활의 증인으로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너희들은 나보다도 더 큰 일을 할 것이다'라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사도들은 예수님 보다도 더 큰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님처럼 제한된 지역이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만 보아도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만이라도 스쳐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병자들을 데려다 놓지요. 그런 현상은 예수님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사도들이 예수님 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사도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듯이 그것은 물론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니 일어나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 강림 날부터 사도들이 증언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만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동시에 증언하였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깊은 뜻을 지닌 말입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즉 선조들을 통하여 예언된 메시아, 바로 구원과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 믿음 위에, 즉 '주님'이라는 믿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뿐더러 '주님'이라는 말은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권세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그 발 아래에 굴복시키신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주(主)'라는 개념에는 어떤 제한도 있을 수 없고 세상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 의해 굴복 당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서 2장 9절과 10절에서,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분이 먼저 내려오셨으니까, 본래는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시는 분이신데, 당신을 비우고 낮추셔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에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셔서 순종하셨다, 그렇게 당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셨다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Kenosis의 극치에 이르도록 예수께서는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 모든 존재가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외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당신의 몸인 교회 안에, 또 우리들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근본이요, 바탕입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아무런 걱정도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약함, 부족, 죄까지도 문제없습니다. 그분이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 피정에서 거듭거듭 강조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계심으로써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제 그분께 언제나 나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장면을 전해주는 성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한 복음 21장 1절에서 14절까지,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어느 날 새벽에, 제자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 나타나신 장면, 잘 아시죠? 그리고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데,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뭘 좀 잡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못 잡았습니다!"하고 대답하자,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쳐보게." 그래서 그 말씀대로 그물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고기들이 잡혔는데, 나중에 그 마리 수까지 다 나오죠. 153마리의 아주 큰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 사도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주님이신가 보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 베드로의 성격이 잘 나타납니다, 옷을 벗고 일하다가, 주님이시라는 그 말을 듣고서는 그냥 너무나 반가워서, 너무나 기뻐서, 그냥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것을 걸치고서는 물에 풍덩 뛰어들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올라와 보니까, 이미 거기 숯불이 있고 고기가 거기 놓여 있고, 빵도 있고 말이죠.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준비를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먹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제자들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가지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전혀 생각도 안 했는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렇게 아침 준비까지 다 해놓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모두 식사를 하는데, 아무도 "당신 누구시오?"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다음에,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시몬아, 너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주님이 아시는 바대로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답을 했는데, 또 다시 물으셨습니다. "시몬아, 너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주님이 아시는 대로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식으로 또 물으셨습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셨습니다. 이렇게 같은 질문을 세 번 되풀이하신 것을 어떤 분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네가 세 번 배반했으니까 나도 세 번..'하는 식으로 예수께서 과연 그렇게 타산적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이미 용서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또 그 배반은 베드로가 나약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예수님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인간적인 나약함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 없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의 질문을 세 번씩이나 던지신 중요한 이유는 당신의 제자가 되고, 당신의 사명을 이어받을 사도는 당신과 사랑으로 일치되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특히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주님께서 날이 밝았을 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멀리 계시다가 불쑥 나타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그 순간만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보면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신 다음 제자들을 배에 태워 보내시고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6, 45-). 이렇게 제자들만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는데 폭풍을 만나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계셨고,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로 다가오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는데, 예수께서는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잘 알고 계시면서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늘 우리와 같이 계실 것을 약속해 주셨으며, 전례를 통해서는 사제의 인격 안에도 계십니다. 따라서 사제는 "in persona capiti christi"(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행하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이 맺으신 새로운 계약의 표로 남기신 성체 성사 안에서 특별한 모양으로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예전의 사도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1,48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