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모든 성인의 날-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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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8-10-30 ㅣ No.2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 다해 )

       묵시 7,2-4.9-14 1요한 3,1-3 마태 5,1-12

     1998. 11. 1.

     

교회는 11월을 위령 성월로 지냅니다.  위령 성월은 우리보다 앞서 이 세상을 사셨던 조상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기를 우리가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평소의 묵주기도 시작 때, 미사 중에 신앙 고백 때에 하는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말로써 고백합니다.

 

오늘 11월 첫 번째 날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머물고 있을 모든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들은 세례를 받고 성인들의 삶을 본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보호자로 모시는 주보 성인들, 혹은 본명 성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다가 하느님께로 나아갔는지 기억하고 삶을 통해서 본받으려고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행복한 사람의 종류에 대해서 노래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생각하고 묵상할 주제입니다.  삶을 이론으로 설명할 줄 알았고 학문의 체계를 세웠던 철학자들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행복하게 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철학자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 우리가 꼭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이 미사에 함께 하셔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무엇일까 함께 생각해 보실 것이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도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행복을 얻는 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이라고 고지에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것은 고양동에 있는 '바누라지' 산에 올라가는 일만큼 쉬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 누가 도전하지 않겠습니까?  행복이라는 고지에 올라가는 일은 '244미터 짜리 바누라지 뒷동산'에 올라가는 일보다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으로 땀을 흘리는 일과 비교할 것은 아니기에, 달리 생각하면 산에 올라가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는 일은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은 아니기에 그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몇 안되겠지만, 행복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일이기에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한 사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나간 일이고, 자비를 베풀려면 내 재산을 내어다 써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기준과는 다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의 첫 번째 기준을 재산을 많이 모아두는 데서 시작합니다.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커다란 건물의 성당을 지으려고 재산으로 표시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하는 일이고, 노년을 위해서 행복을 보장받으려면 돈이 있고 연금도 들어야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지난 17세기 18세기에 종교를 비판하던 사회주의자들은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아편이라고...  고통에 처해있는 현실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의 현실에 주저앉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비판을 받았던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살아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있는데 반해서, 그런 비판을 바탕으로 해서 태동했던 공산주의와 일부 사회주의는 지금 시대에 들어서 후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기에 이런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기준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기준을 다르게 가져야 합니다.  돈이나 재산이 행복을 이야기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며, 행복의 기준은 하느님의 기준을 어떻게 우리가 실천하고 살아가느냐의 차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기준에 따라 산 사람들이 오늘 기억하는 성인들의 삶이라고 교회는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 요한의 묵시록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판단을 다르게 내리는 성서입니다.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성서를 협박하는 말씀이 담긴 책, 하느님이 몇몇 사람들을 편애하는 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요즘 가끔씩 나타나는 신흥종교들은 세상 종말이야기를 하면서 묵시록을 이용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으니 재산을 모두 바치고 너희는 생업도 포기하고 기도만 하라는 말로 협박합니다.  그러나 요한의 묵시록 위험에 처해있던 신앙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말고 결코 겁내지 말라는 뜻으로 기원 후 90년-100년경의 그리스챤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1998년을 지내고 있는 우리가 요한의 묵시록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을 갖는다면 우리도 묵시록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할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묵시록을 읽고 들으면서 144,000명 숫자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그 말을 따내서 성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주신 하느님이 어찌하여 당신의 선물을 받을 사람들의 숫자를 제한하시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남은 문제는 내가 구원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를 다시 질문하고 또 두려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선물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는지 그것을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살면서 환난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환난을 겪는 사람 모두가 그 환난을 이겨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삶의 방법을 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증은 우리가 받은 새로운 이름, 세례가 증명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재산인 돈에 얽혀서 자신의 삶을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려면 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서나 또 죽어서나 우리에게 닥쳐 올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사람들은 삶이 좀 더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서 세상의 재물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하느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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