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2012-0401...주님수난성지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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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2-03-31 ㅣ No.1207

수난 성지주일 (나해)

마르코 11,1-10 /// 이사 50,4-7 필리피 2,6-11 마르코 14,1-15,47

2012. 4. 1. 등촌3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후

우리는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구원자로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것을 전해주는 마르코복음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드러난 사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제자들이 어린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왔고, 제자들이 자기 겉옷을 잔등에 얹었으며,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흔들기도 하고 깔기도 했으며,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에 함께하면서 이와 비슷하게 노래 부르려니, 영 쑥스럽지요? 어쩌면 우리는 히브리인들이 느꼈던 그 절박한 심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마음자세를 가지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라는 원칙은 없습니다. 다만 짐작할 뿐입니다.

히브리인들 가운데,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똑같은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입성기념식 마르코복음에 나오지는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반대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그 마음을 걷어내고,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부르며 뒤따랐던 순수한 군중들의 마음을 우리가 간직하고 그들을 조금이라도 본받으며, 그 옛날의 그 함성과 기쁨을 새기면서 우리도 같은 소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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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의 수난기 읽고.

주제 : 우리가 갖출 자세는....?

우리는 지금 아주 길게 마르코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날이지만, 수난기의 시간적인 배경은, 빠스카 축제일의 이틀 전, 즉 성주간 목요일부터 금요일 해가 질 때까지 만 하루나 혹은 날짜로는 이틀 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수난기에 나온 내용들을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산헤드린의회의 일부 사람들에게 가서 스승을 팔아넘길 모의를 꾸미는 얘기, 막달라여자 마리아의 향유사건, 과월절 음식준비에 대한 얘기, 과월절음식을 먹는 얘기와 올리브산으로 가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졸고 있었다는 사건얘기, 예수님을 납치(!)하여 의회로 끌고 온 사람들의 얘기와 심문, 베드로의 배반과 빌라도의 사형선고, 그리고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님이 무덤에 모셔지는 얘기까지 우리가 아는 아주 극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난기를 몇 사람이 앞에 나와서 읽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선채로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들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사실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읽거나 들으면서 우리가 가질법한 자세는 개인적인 것이지,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그 느낌을 반드시 남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앙은 개인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쉬워집니다. 쉽거나 어려운 것을 따지는 것이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이지만, 적어도 예수님은 개인만의 선택으로 이 수난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드러내기 쉬운 자세처럼, 개인적인 자세로 세상에 오신 삶이었다면, 그분은 오늘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같은 수난기에 나오는 일을 일부러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삶의 자세를 개인적인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으셨기에, 우리 신앙인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고, 찾아온 것이니 이 자리에 모인 우리라면, 예수님이 삶을 통해서 뭔가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개인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힘겨운 일에 대해서 모른척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아준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다른 사람이 겪는 힘겨운 일을 포함한 고통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고 쉽게 말할 것입니다. 이론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주 쉬운 방법이기에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개인으로 오셨지만, 개인으로 살지 않으신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이루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해도, 제가 말씀드리는 것과 같은 마음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정도쯤 되면 사람이 머리로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몸이 부딪혀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을 익히며 실천해야 할 것을 몸으로 드러내는 일은 서로 다른 것이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러 세상에 오신 분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삶의 목적을 생각하는 방법에 따라 우리가 갖는 삶의 실천방법도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고통은 내가 피한다고 해서 나를 무서워하여 내게서 달아나지 않습니다. 부딪혀서 이겨야 할 것이 있고 피해도 좋은 것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대하느냐는 차이 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 하느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신 분, 기적을 베풀 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하느님께로 돌리지 않으시고, 그들 앞에서 고통을 받아들이고 수난을 겪으신 예수님의 본보기를 생각할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행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노력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하느님 앞에 조금씩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다가선다는 것은 그만큼 축복에 가까워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잠시 마음과 생각을 모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기억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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