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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성지]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의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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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0 ㅣ No.209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 생가 터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전주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전주 쪽으로 가다 보면 '동정 부부 생가 터'라는 안내 돌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5km 정도를 더 가면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의 생가 터' 사적지가 나온다. 지금의 형정 구역으로는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 마을이다. 1754년에 류 아우구스티노가 탄생한 곳이자 동정 부부로 유명한 류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가 살다가 체포된 곳이다. 현재 이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는 동산동 본당에서는 1987년에 그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한 뒤 축복식을 했다.

 

류항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윤지충과는 이종 사촌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전주 일대에 널리 신앙을 전함으로써 '호남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초기 신자들이 임의로 마련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에서 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교회일을 열심히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다가 1791년의 박해로 이종 사촌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였으나, 다음해에는 감영에 자수하여 신앙을 벌겠다고 다짐한 뒤 석방되었다. 물론 이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류항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류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그 동안 전라도 지역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후 10년 동안 고산, 전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복음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한국 천주교회의 반석이 무너지면서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먼저 류항검의 아우인 류관검과 윤지충의 아우인 윤지헌이 체포되었고, 이어 류항검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고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동시에 그들의 가산은 적몰되고 초남리의 집에는 연못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순교로 전주 남문 밖은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앞서 류 요한은 부친이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동정 부인 이순이와 동생 문철(요한), 사촌 동생 중성(마태오)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과 노비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중철과 문철 형제는 10월 9일 전주 감영에서 옥사하였고,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에는 이순이 또한 전주 숲정이로 끌려 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드디어 승리의 날이 왔다. 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동안 류중성(마태오)은 매우 열렬히 늘어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이순이(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4면).

 

훗날 다블뤼 주교가 순교자 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누갈다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모습은 "모든 조선의 순교자 중에서 우뚝 솟아난 하나의 아름다운 진주"였다.

 

[사목, 1999년 11월호, pp.120-122, 차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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