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2014-0413.....예수님수난성지주일-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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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4-04-12 ㅣ No.1506

                                                   수난 성지주일 (가해)

입성기념식 복음 : 마태오 21,1-11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마태오26,1427,66(짧게.. 27,11-54)

2014. 4. 13. 등촌3

<입성기념식 복음을 읽은 다음>

우리는 조금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동쪽 언덕 너머, 벳파게에서 사람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구원자로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는 과정을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예식을 성대하게 거행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옛날의 히브리백성은 아니기에, 우리들더러 똑같이 감동하라고 하는 일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입성기념식의 복음을 읽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신앙인이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데 힘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는 올바른 신앙인의 삶에서 변질된 못된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대하면서 간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인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본보기를 따르면서 같은 일이 우리 삶에도 실현되도록 청해야 하겠습니다. +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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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

오늘은 인류구원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구원자로서 입성(入城)하신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파스카축제를 기념하던 명절에서 7일전이었습니다. 파스카축제는 히브리백성이 이집트에서 400년간 노예생활을 끝내고 모세의 인도를 따라, 홍해바다를 건너기 전날 밤,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 3450년 전쯤의 일입니다. 그때로부터 1500년쯤 지나고 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입성을 기념하는 특별한 일이 있었고, 그로부터 다시 2000년쯤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 예절을 <마태오복음사가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함께 기념했습니다.

 

4개의 복음서에는 4개의 수난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대하면서 그 내용들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 내용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비슷한 내용을 해마다 한 개씩 바꿔가면서 읽고, 파스카성삼일의 금요일에는 차원이 조금 다른 요한복음서의 수난기를 해마다 읽습니다.

 

수난기의 내용은 그 길이가 아주 깁니다. 그렇게들은 내용을 다 기억하는 것이 쉽지도 않을뿐더러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들은 수난기내용에서, 여러분은 어떤 내용을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십니까? ‘늘 대하는 소리라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없다고(!)’......말할 사람들을 향해서 묻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게 감흥이 없는 사람에게라면, 우리가 그 어떤 내용을 질문해도 나오는 대답에는 정성이 담겨있지 않은 것이기에, 올바른 마음자세를 갖춘 사람들을 향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마태오복음사가의 수난기에 나오는 내용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이 시간에 (짧게/혹은/길게)들은 내용들 가운데 몇 가지라도 제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수난기의 생략부분에는) 유다가 예수님을 판 얘기 / 예수님께서 배반자를 지적하는 얘기 / 성체성사를 세움 / 제자들이 도망칠 거라는 예고 / 베드로의 배반예고 / 올리브동산에 기도하러 간 얘기 / 성전경비병들 등장 / 대사제의 종의 귀를 자른 얘기 / 대사제의 심문 / 인자의 강림 예고 / 베드로의 배반 얘기 / 유다의 후회와 자살 얘기 )

(짧게 읽은 부분에는).........당신이 유대인의 임금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서부터, 십자가형을 내리는 빌라도 얘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산으로 가시는 얘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얘기까지, 자세하게 구별하면 7가지나 그것보다 더 많은 내용으로 나눌 수 있는 말씀들을 읽고 들었습니다.

 

수난기의 내용을 해석하는 신학은 예수님의 죽음을 인류를 위한 구원자의 대속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 내용을 얼마나 믿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살이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갖고, 그것을 어떤 모양으로 드러내면 자기 개인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대속자의 죽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대속자의 죽음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세상재물의 차원에서 해석할 내용은 아닙니다. 재물은 내가 벌어들이고,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고, 내게 필요한 것은 남겨놓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차원이 다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드러낸 행동과 그 본보기는 세상에서 우리가 쉽사리 볼 수 있는 일과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없는 뭔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들과 비교해서 과연 무엇을 갈무리(=잘 챙겨서 간수함)해서 따로 떼어놓고 목숨을 내놓으신 것일까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고해서 반드시 잘못 드러내는 본보기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내 것과 네 것을 가르고 구별하는 차원에서는 예수님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가 드러내는 세상 삶의 모습에서, 예수님처럼 온전히 다른 사람을 위한 이타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배우자와 가족, 친인척의 범위를 벗어나서 내 것을 내어주는 일이 얼마나 가능한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생각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악() 때문에 내가 비뚤어진 행동을 한다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아쉬운 자세를 드러낸 바오로사도의 모습(로마7,18-21)을 기억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날에 읽은 내용은 기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신앙인들이 드러내야 하는 삶도 힘들고 서글퍼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드러내는 삶은 기뻐야 합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삶에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이 내린 벌과 책임추궁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자세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느님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야만, 얼굴을 차돌처럼 만들 수 있고, 내게 갑작스레 다가오는 부끄러운 일들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은 내놓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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