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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전환기의 복음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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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6 ㅣ No.131

전환기의 복음 선교

 

 

우리 신앙인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오늘날까지 과도기적 상황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다. 그때까지 자명하게 신봉되고 생활화되었던 많은 교리와 생활규범들이 공의회를 계기로하여 줄곧 논란되고 있다. 그리스도 신앙의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들이 논란되고 있다. 여러 주요 신앙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견해의 복수성 내지 양극화 현상이 공의회가 끝난지 1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제 간략하게나마 고찰하려는 복음선교의 문제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특히 지난 공의회에서 교회가 그 본성상(本性上) 선교적 교회라고 규정된 이래 복음선교의 주제는 새로운 각도에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복음선교의 의미와 필요성을 둘러싸고 상이한 견해들이 대두되었다. 그동안 교회본질을 둘러싸고 대두된 갖가지 견해처럼 선교이론 역시 그만큼 다양하게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선교이론을 개별적으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다만 현대 교회에서 공적으로 대변되는 선교이론을 간략히 해설하고, 이에 따르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 바람직한 선교이론의 전망을 단편적으로나마 시사하고자 한다.

 

 

1. 현대 교회의 선교이론과 문제성

 

복음선교(Evangelizatio missiones)의 문제는 오늘날 교회와 인류가  처한 상황에 직면해서 비단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일반으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하나의 역사적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어느 새 거의 2천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그동안 세계 도처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전체인류 속에서 여전히 소수집단에 머물고 있다. 18세기까지 단일적인 그리스도교적 세계였던 서양에 19세기에 반(反)그리스도교적 마르크시즘이 대두된 이래 그곳에서 거의 절대적 권위를 행사해 왔던 교회는 사회적 비중과 의미를 점차적으로 상실해 가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오자 소련을 비롯한 동구(東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국가들이 출현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전세계에 미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서구(西歐)에서도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전승된 신앙으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의 수효가 증가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여전히 서방전래의 이질적인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교회는 다른 세계적 종교와 비교할 때 외적 규모와 사회적 영향면에서 미소한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비판적인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교회는 소위 ‘절대성 요청(絶對性要請)’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 신앙은 물론이려니와 교회 역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회의 필요성으 로부터 복음선교의 의미와 필요성이 결과적으로 규정된다. 오늘날까지 교회 안에서 사실상 서양 신학자 및 교부들에 의해 정립된 교회중심적 선교이론을 소개하고 이 이론이 지니는 문제성을 간략히 시사하고자 한다.

 

가. 현대의 교회중심적 선교이론

 

그리스도 교회는 고금을 막론하고 소위 ‘절대성 요청’을 표방하고 있다. 즉 교회는, 인간이 구원되려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출현한 이후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는 “교회 밖에서는 아무런 구원이 없다”는 정식이 교의로 확정되어 가르쳐져 왔다.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선포된 가르침이 이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의 말씀으로 설립된 로마 성교회는 가톨릭 교회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즉 이교인뿐만 아니라 유다인도, 이단자도 열교자(裂敎者)들도, 만일 이들이 죽기 전에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고 오히려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마태 25,41) 영원한 불에 빠지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선포한다.” 교회의 구원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이러한 원칙이 견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거하여 나그네 길에 있는 이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재자이시오 구원의 길이시며, 이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과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면서(마르 16,16; 요한 3,5),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사힌 것이니 문을 통해서 집에 들어오듯이 사람들이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인정치 않는 입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수정된 바 있다. 교회는 극복할 수 없는 오류의 처지로부터 자기 탓 없이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그 구원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뿐만 아니라 교회가 또한 필요하다는 점은 여전히 주창하고 있다.

 

복음선교의 동기는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의 구원 필요성에서부터 유발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운명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고 선교활동을 계속 전개하여 왔다. 교회는 인류의 구원자이자 스스로 구원의 실재인 그리스도를 역사안에서 현존케 하는 사명을 지닌다. 그리스도를 세계 안에 현존케 하기 위해서 교회가 세계 안에 현존해야 할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생겨난다.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현존은 선교활동을 통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베푸는 복음선교 활동은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현존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사상 근거에서 바로 ‘교회의 부식’(Plantatio Ecclesiae)이라는 선교표상이 생겨난다. 지난 공의회는 이 선교표상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 가서 복음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을 ‘선교’라고 한다. 이것은 선교활동을 통하여 완수되며 보통으로는 성청으로부터 인정된 일정한 지역들에 있어서 실행되고 있다. 이런 선교활동의 본 목적은 아직 교회가 뿌리를 박지 못한 백성이나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를 부식하는 일이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에서도 같은 입장이 견지된다. “복음선포는 복음의 메시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그 땅에 심는데 의미가 있는 만큼, 성체성사에 정점을 둔 성사생활의 힘 없이는 교회건설도 이루어질 수 없다.”

 

교회의 부식으로서의 선교표상은 1920년대에 활약한 루뱅(Louvain)의 교의신학자인 삐에르 샤를르(Pierre Charles)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정립된 선교이론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선교이론에 의하면 본연의 의미에서의 선교의 본질과 목표는 아직 교회가 현존하지 않는 지역이나 사회영역에 교회를 심는 것이다. “가시적(可視的)인 교회가 부재한 나라는 선교지역이다. 선교사를 충동하는 것은 가시적인 교회가 아직 현존하지 않는 곳에 교회를 건립하여 교회의 활동영역을 계속 확장시켜 가려는 원의이며 욕망이다.” 특정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이 항구하게 구원의 욕망에 접할 수 있고, 성사(成事)가 집행될 수 있는 데에서 교회가 건립되고 여기서 선교활동이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전망에서 선교활동의 성공도가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가시적인 교회제도에 가입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성사생활을 영위하며, 목자의 통치를 받게 될 때에 선교활동은 성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나. 교회중심적 선교이론의 문제성

 

교회 부식을 목적으로 하는 선교활동은 어쩔수 없이 교회중심적인 색채와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이 교회중심적인 선교관이 역사적으로 현세 제국주의적 동기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16세기 이래 서양문화권 밖에서 전개된 교회의 선교활동은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t서양 제국인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이들 서양 선교사들은 모국의 식민지가 된 선교지역에서 모국의 배려와 협력 내지는 묵인하에서 대부분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서양 제국식(帝國式)으로 제도화한 교회를 피식민지에 부식하였다. 예외가 없지 않았으나, 교회의 선교활동이 근세에 식민주의 활동과 맥을 같이 하였음을 오늘날 서구인들에게도 시인되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이러한 잔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이 교회중심적인 종교관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우월감을 지니게 한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진리와 구원의 제도적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의식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도록 하고 우월감을 싹트게 하여 독선적 아집에 빠지게 할 소지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신학이론과 실천생활 속에서 표출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우월감을 오늘날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결과는 부정적이다. 불필요하게 야기된 긴장과 위화감으로 말미암아 비그리스도교적 문화와 종교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선교활동에 지장이 초래되기 쉽다. 그러므로 선교활동의 본 목적이 특정한 가시적 교회의 세력부식에 있다는 선교관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어떤 의미로는 아직 교회중심적 심성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복음선교의 대상인 비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세계관 내지 종교에 대해서 그전의 교회의 태도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하느님이 이교인에게도 충분한 구원은혜를 부여하시고 이 은총이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에게도 도달된다고 교회는 가르쳐 왔다. 교회는 이미 중세기에 열세(熱洗, votum baptismi)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비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적 종교들 속애서 ‘옳고 성스러운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 있으며, 이들의 생활과 행동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꾸밈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고 말한다. 라너는 이번 공의회가 다른 종교를 평가하는 데에서 ‘새롭고 과감하게’ 규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판결을 명시적으로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와 무신론 안에서 ‘익명(匿名)의 그리스도교’를 찾을 수 있다는 라너를 추종하는 일부 신학자들은 다른 종교들을 정상적인 구원의 도정(道程)으로 보면서, 그리스도교에로의 개종 내지 입교활동으로서의 선교활동을 반대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이들에게서 ‘절대성 요청’을 내세우는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적 입장은 사실상 거부되고 있다. 이와 함께 교회으이 전통적 입장은 사실상 거부되고 있다. 이와 함께 교회의 선교활동의 의미와 필요성이 근본적으로 의문에 처해지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거의 10년이 되던 1974년  10월 로마에서 ‘현대세계에 있어서의 복음선교’를 주제로하여 세계주교 대의원 회의(주교 시노드, Synodus)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회의 참가 주교들 사이에 복음선교의 의미, 필요성, 그리고 활동양식을 둘러싼 의견대립이 생겨났다. 특히 그리스도교에로의 귀화, 비그리스도교적 문화 내지 종교에 대한 평가, 복음선교에 있어서의 교회적 요소의 역할 드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끝내 의건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결국 이 회의 참가 주교들은 복음선교에 관해 토의한 문제들을 공동으로 발표사기를 포기하고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입장 천명을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회의가 끝난지 2년이 지난 뒤인 1975년 12월 8일에야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Exhortatio Apostolica)인 「현대의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를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도적 권고문의 내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쟁점이 되는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복음선교

 

지금까지는 교회중심적인 선교이론이 제도적 교회의 현세적 세력부식을 본 목적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오해받을 여지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앞으로는 복음선교의 교회중심성이 지양되고 종말론적 성격이 보다 체계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역사의 획기적 전환점이자 정점이기도 한 ‘그리스도 사건의 종말론적 성격’으로부터 복음선교의 의미와 근거가 제시되는 전망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복음선교를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 안에 구현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이해된 복음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다음에서 단편적으로나마 제시하고자 한다.

 

가. 복음선교의 종말론적 성격

 

복음선교를, 온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이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의 집단에 교회를 부식하는 사업으로 이해할 때, 역사적 인물인 나자렛 예수가 이러한 복음선교를 직접 행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수는 생존기간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국한하여 자신의 활동을 전개하고 팔레스티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이교도에게 가지 말도록 명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파견하였다(마태 10,5 이하). 주지된 바와 같이 예수의 복음선포의 중심부에는 ‘하느님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가 위치하고 있었다. 예수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 예고된 바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제 도래했음을 알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에 즈음하여 회개하기를 촉구한 것이다(마르1,14 병행구 참조).

 

예수는 자신이 바로 이 종말론적 사건의 개시(開始)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기를 거부하는 데 반해서, 이교도들한테서 예수에 대한 신앙이 발견된 것이다. 예수는 이 현상을 세상종말이 도래(到來)한 표징으로 보는 것 같다. 그는 이교도인 백부장을 신앙에 감탄하고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러한 신앙을 본 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잘 들어라.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 이 나라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마태 8,11 이하; 루가 7,1; 마르 7,24-30; 요한 4,46-53참조).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인들이 예수를 방문한 사실에서 종말론적 시간이 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요한 12,30 이하). 예수의 현존과 그 안에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나라에 직면해서 이교도들도 그를 향하여 모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에페소서에서 일컬어지듯 유다인과 이교도 사이에 맺어진 평화조약의 역사(役事)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페 2,14-15).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신강림의 체험과 함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이교도들에 대한 선교활동은 사도들의 성신강림의 체험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교회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사도 1,1-8; 8,29; 10,11이하; 16,6). 사도행전에 기술되고 있는 교회는 선교활동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교인들의 사도라고 할 수 있는 바울로는 당시에 알려져 있는 전세계를 거의 다 두루 다니며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걸림돌로 느끼고  배척한 뒤에 이교도들에 대한 선교활동에 착수하였음에 일단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사도 13,46-48; 18,8; 22,17-21; 28,28 참조). 그리고 이교인들에 대한 선교활동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발해진 바 있는 하느님의 약속의 충만이라고 시사되어 있음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신약성서에서 교회와 복음선교는 불가분의 관계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복음선교의 문제는 단순히 교회론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론적이며 구원론적 문제임이 명시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이스라엘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 개방되어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그를 뒤따르는 사람들만의 주님일 뿐 아니라, 온 우주와 전인류의 주님인 것이다. 에페소서와 골로사이서에 의하면 종말론적 시간에 전체창조와 전구세사가 함께 일치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는 구원계획에 편입되어 있다.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에페 1,10-12; 골로1,15-20).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목표는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와 우주가 일치하여 하느님의 큰 영광을 찬미하는 데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가 당신 제자들에게 명했다고 알려진 소의 ‘선교위탁’에도 이 점이 명시되어 있다. 이 위탁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만백성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편적 파견(missio)의 근거는 하늘과 땅, 즉 우주 전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보편적 주권이다(마태 28,19 이하 참조).

 

복음선교는 이를테면 만백성이 그리스도를 온갖 피조물의 보편적인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 본연의 목적을 두고 있다. 복음선교는 그리스도와 함께 현세에서 이미 시작된 종말론적 ‘때’에 직면하여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여 하느님의 위업을 찬미하도록 이바지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나. 복음선교 활동의 원리

 

복음선교의 목표가 하느님과 인류,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일치는 평화가 이룩된 세계 안에서 자유로운 삶이 영위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상태는 바로 구원된 세계 안에서의 구원된 인간의 처지를 뜻할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정의에 입각하여 평화를 이룩할 때, 복음선교의 목표는 달성된다고 볼 수 있겠다.

 

정의에 입각하여 이룩된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평화는 순전히 내적인 영혼의 평화나, 아니면 인간들 사이에서 순전히 형식적으로 맺어진 외적 평화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shalom)는 존재의 전영역을 포괄하는 보편적 차원을 지닌다. 이 평화는 세계와 인간존재에 순전히 외적으로 첨가되고 결핍될 수 있기도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평화가 위험에 처하여질 때에, 온갖 조물은 근본부터 의문에 처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 평화가 온전히 이룩될 때에, 만물의 질서가 회복되고 만물의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 평화는 성서에 의하면 오로지 하느님에 의하여 가능하다. 하느님은 평화의 하느님이다(1고린 4,33). 때문에 평화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약속의 본질인 것이다(이사 2,7 이하; 9,7; 즈가 9,9이하; 시편28,11; 71,7).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다(에페 2,14). 그리고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다(에페 6,15).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선교활동은 평화의 인사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마태 10,12; 루가 10,5). 바울로는 그의 서간을 평화의 인사로 시작한다.(로마 1,7; 1고린 1,3 등). 교회의 봉사활동은 화해를 이룩하기 위한 봉사이고 결국은 평화를 위한 봉사이다(2고린 6,18). 이러한 관점에서 선교활동의 유형 역시 새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선교활동이 단순히 ‘구령사업(救靈事業)’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밝혀진다. 선교활동은 인간의 영혼 구원만을 지향하지 않고 하나요 전체적인 인간, 하나요 전체적인 세계의 구원을 지향한다. 이러한 전인간과 온 세계의 구원은 정의롭고 자유로운 질서 속에 평화가 구현될 때에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일치를 이루어주는 표지요 도구라고 선언된 바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현시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성령의 은총과 사랑에 의지하여 실천에 옮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관해서 이번 공의회도 위와 같은 의미로 언급하고 있다. “하느님은 죄인들인 사람들과 당신 사이에 평화 혹은 상통(相通)을 성립시키기 위해 우리 육신을 취하신 당신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인간 역사 안에 새롭고 결정적인 방법으로 개입하시기를 결의하셨다. 이는 하느님이 당신 아들로 말미암아 인간을 암흑과 사탄의 권력에서 구해내시기 위하심이었고(골로 1,13; 사도 10,38 참조) 당신 아들 안에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기 위하심이었다.” 교회는 바로 생활의 모범과 선교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앙과 자유와 평화에로 모든 사람과 만백성을 인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표명되고 있다.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또한 일치를 이루어주는 표지와 도구로서의 교회는 인류의 자유와 정의 문제가 관건이 될 때에, 그 개선을 위해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인류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교회는 진정으로 일치의 표지이며 성사(聖事)가 될 수 있다. 교회의 구원사업, 곧 선교활동은 불가피하게 사회?경제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교회가 일방적인 영신주의, 개인주의적인 사사화(私事化) 경향, 그리고 옹졸한 지방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는 인간과 세계의 크고 작은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진력하는 가운데 교회는 그리스도의 화해은총의 힘을 온인류로 하여금 체험케 할 수 있다. 이때에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로서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교회가 세계의 평화가 이룩되도록 이바지해야 할 것을 명백히 촉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 표시로서 모든 번뇌와 병을 고쳐주시며  모든 도시와 시골을 돌아다니신 것과 같이(마태 9,35 이하; 사도 10,38 참조) 교회도 그 자녀들을 통하여 모든 자기의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과 결부되어 그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애쓰고 있는 것이다(2고린 12,15 참조). 사실 교회는 그들과 같이 즐거움과 슬픔을 나누며 삶의 동경과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알고 있으며 사고(死苦)에 허덕이는 인간들과 고통을 같이 나눈다…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경제적 사회적 사정에 있어 올바른 질서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 점에 있어 다른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야 한다…그뿐만 아니라 굶주림과 무지와 질병을 극복함으로 더 나은 생활상태를 이루어 세계의 평화를 확립하려고 진력하는 백성들의 노력에도 참가해야 한다. 이 활동에 있어서 신자들은 사적 및 공적 제(諸)제도와 정부, 국제기관, 갖가지 그리스도교 공동체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외의 제 종교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기획에도 현명한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구현하려고 추구하는 보편적 구원이 인간들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세계가 줄 수 없는 평화를 중재한다(요한 14,17 참조). 교회는 세계안에서 하느님의 평화가 이룩되도록 힘쓴다. 하지만, 하느님에 의해 이룩되는 평화가 평화를 위한 인간적 노력과 전혀 무관하거나, 또는 이와 경쟁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이 바로 인간들의 평화 추구를 가능케 하는 근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참되고, 인간의 품위에 맞으며, 의롭고 사랑스러우며, 고상하고 유덕한 모든 것 (필립 4,8)을 촉진시킴으로써 종말론적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정체(正體)를 실현시켜 나가는 가운데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결속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종말론적 희망은 역사내적(歷史內的) 미래의 유토피아를 위해 오늘날의 인간들을 희생시키는 온갖 시도에 저항할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적 희망과 인내는 경쟁자 또는 적대자로 나타나는 세계관 내지 종교의 추종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 현세의 어느 누구도 ‘진리’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소유하며, ‘구원’을 획득하였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불교, 유교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 신봉자들이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구원의 종교를 신봉한다는 확신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신앙의 진리를 전시하려고 애쓰기 전에 생활로써 빛을 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리는 이론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천의 차원에서 입증된다. 그리고 교회는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기 전에 먼저 사랑할 때에 구도자(求道者)와 입교자들의 수효가 급증할 것이다. 현 그리스도 교회가 비그리스도교계에 대하여 그리스도처럼 “와서 보시오”(요한 1,39)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선교’ 문제는 교회와 개별 그리스도인에게 도전적인 과제로 남는다.

 

 

3. 맺는 말

 

지금까지 복음선교를 그리스도 안에서, 특히 그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 속에서 이미 성취된 종말론적 실재를 완성으로 이끄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이렇게 이해된 복음선교는 필요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실재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肉化)하고 수난하신 것은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필요성의 범주를 벗어나는 잉여가치이다. 이 사랑은 자신의 소유나 세력부식을 지향하지 않고 타자(他者)의 선익을 지향하여 자기 비허의 길을 기꺼기 택한다. 하느님의 종말론적 사랑은 바로 말씀의 육화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자기 비허의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교회의 복음선교 활동의 본연의 원리는 잉여가치로서의 자기 비허이다. 교회가 자신의 외적 세력확장을 위해 부심하는 대신에,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자신을 비운 그리스도처럼 자기 비허의 도정(道程)을 항구하게 택할 때,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로서의 정체(正體)를 보전하고 만백성은 교회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되리라 믿는다.

 

* 각주가 포함된 내용은 첨부 파일을 참조하세요.

 

[사목, 1981년 1월호, 심상태 신부 /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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