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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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사목] 관광사목의 신학적 근거와 그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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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2 ㅣ No.78

[관광 사목과 한국 교회] 관광 사목의 신학적 근거와 그 방향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유동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국경 없는 사목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러한 유동 인구 증가 현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자극을 받고 있다.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구조는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가 온 세상을 주름잡게 되었는가 하면, 정치도 현실적으로 볼 때 세계적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사회 생활도 세계적인 단계에서 그 활성화의 구심점들을 찾고 있다. 

 

유동 인구 현상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이 진보하는 세계야말로 참으로 우리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사목 과제이다.

 

이제 인종과 문명과 문화와 이념들이 서로 섞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관심한 채로 머물러있기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인류는 글자 그대로 '지구촌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 국경들이 무너지고 있고, 우주가 재형성되고 있으며, 나라간의 거리가 사라지고 있다. 이곳의 생활이 머나먼 저곳의 생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한 마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 아래에서 신앙이란 단순히 하나의 보존되고 간직되어야 할 유산일 수만은 없다. 현실이어야 하며 심화되고 발전되고 전파되는 것이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유동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눈에 띄게 다양한 형태로 파급되고 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역사와 함께 나아가는 교회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당면한 과제며 의미심장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 하고 꾸짖어 말하던 사도 바오로의 엄숙한 말씀을 새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교황청 이주 사목 평의회에서 펴낸 관광 사목 총지침서 [지상의 나그네](Peregrinans in terra)와 각국 주교회의에 보내는 서한 [교회와 유동 인구], 그리고 1998년 5월 터어키에서 열린 제5차 세계 관광 사목 대회 직전에 발표된 [대희년의 순례]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가르침에 나타나고 있는 관광 사목의 신학적 근거를 살펴보고 한국 교회에서 관광 사목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

 

 

2. 관광 사목의 신학적 근거

 

1) "하느님 보시기에 저희는 선조들처럼 이리저리 떠돌며 남에게 몸붙여 사는 신세였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이 떠도는 모습은 마치 땅 위를 스쳐가는 그림자 같았습니다"(1역대 29,15). 일찍이 다윗 왕이 하느님 앞에서 고백했던 이 말은 다윗 왕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사실 '길'은 떠남과 되돌아옴, 들어감과 나옴, 내려감과 올라감, 걷는 것과 쉬는 것 등 인간의 일상사가 담긴 실존의 상징이다.

 

인류는 세계 무대에 출현한 첫 순간부터 새로운 목적을 찾아 이 땅의 지평을 넘나들며 무한과 영원을 향한 순례를 계속해 왔다. 인류는 강과 바다를 건넜으며 하늘과 땅이 조화롭게 만나는 거룩한 산의 정상에 올랐다. 인류는 태어남을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것으로, 죽음을 땅의 모태 속으로 또는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겼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나타내는 지상 여정(교회헌장, 49항 참조)에서의 순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언제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고도의 유동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순례는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하여 관광 사목은 일반적인 사목적 배려의 차원에서 순례 사목에 대한 명료한 신학적 기초를 제시해야 하며, 확고하고 영구적인 사목 양식을 이끌어 내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순례를 제안하고 장려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인류의 복음화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순례를 통하여 사람들은 좀더 깊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2)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태초로부터 수천 년 동안을 아담의 순례로 볼 수 있다. 이 순례는 창조주 하느님의 손으로 지음 받아 세상에 들어온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정처 없이 떠돌게 되는 유랑(창세 3,23)에서 시작된다. 아담의 순례는─하느님과 함께 걸으라는 부름과 그의 불순종, 그리고 구원의 희망에 이르기까지─창조주 하느님께 받은 온전한 자유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아담의 곁에서 함께 걸으시며 그의 발길을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의 계약을 암시해 준다. 얼른 생각하면 아담의 순례는 자신의 목적지인 거룩한 곳, 곧 에덴 동산으로 가는 길에서 빗나간 듯이 보이지만 이러한 여정도 결국 회개와 귀향의 길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방황하는 카인의 뒤를 따라다니시며 그를 지켜주신다(창세 4,15 참조).

 

"저는 뜨내기, 당신께서 적어두셨나이다. 제 눈물을 당신 부대에 담으소서, 당신 책에 적혀 있지 않나이까?"(시편 56,9 참조) 죄 가운데 자포자기의 길로 접어든 탕자와 끝까지 함께하셨던 분은 아낌없는 사랑의 아버지시다. 모든 사람과 모든 그릇된 길을 회귀와 포옹의 여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다(루가 15,11-32 참조). 이러한 보편적인 순례 역사에는 '컴컴한 뒷골목'과 '비뚤어진 길'(잠언 2,13-15)을 걷는 어두운 인생 역정이 깃들여 있다. 거기에는 또한 '생명의 길', 정의와 평화의 길, 진리와 성실의 길, 온전함과 정직함의 길을 통한 회개와 회귀도 함께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3) 아브라함의 순례는 그리스도인들이 걸어 가는 구원 역사의 전형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 "네 고향을 떠나라."(창세 12,1)와 아브라함의 파란만장한 일생의 단계들과 그가 겪었던 여러 관계들은 이미 구원의 탈출, 곧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출애굽에 대한 훌륭한 선취였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상기시키고 있다.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도 같은 약속을 물려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나그네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 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 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히브 11,8-15). 그도 그럴 것이 나중에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약속의 땅에서조차 "나그네"(창세 23,4)로 표현했으며 바딴아람과 이집트로 피난하였던 그의 후손 이스마엘(창세 47, 50장 참조)과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4) 곧이어 위대한 출애굽의 순례가 시작되었던 곳은 파라오의 땅이었다. 출발과 사막에서의 방랑과 시련, 유혹, 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감 등의 여러 단계는 구원 역사의 모범적 사례가 되었다. 여기에는 파스카와 만나, 물, 메추라기를 내려준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과의 친교, 시나이의 계시, 해방의 선물뿐만 아니라 불신앙, 우상 숭배,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 되돌아가고픈 유혹 등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출애굽의 역사에서 한 가지 영원한 가치를 배운다. 이집트 탈출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기억되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이사야는 바빌론에서 풀려난 일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노래한다(이사 43,14-21 참조). 이스라엘은 과월절을 지낼 때마다 새로운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고 있으며 지혜서에서는 과월절이 종말론적 표현으로 바뀌게 된다(지혜 11-19장 참조). 

 

결국 순례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로워진 창조 질서 안에서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약속의 땅에 이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 걸으시는 순례자시다. "너희의 하느님께서는...... 이 막막한 광야를 돌아다니는 동안 너희를 돌보아주었으며,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와 함께 계셔서 너희에게 무엇 하나 아쉬운 것이 없지 않았느냐?"(신명 2,7)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도중에 시종 지켜주셨다"(여호 24,17). 사실 하느님께서는 향수에 젖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씨 뿌리지 못하는 땅 사막에서 나를 따르던 시절, 젊은 날의 네 순정, 약혼 시절의 네 사랑을 잊을 수 없구나"(예레 2,2). 순례자의 이러한 본질적 바탕이 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산 적이 있었기에 자기들한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할 수 없다"(출애 22,20). 오히려 그들은 "한 때 이집트 땅에서 떠돌이 신세였으니...... 떠도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10,19).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길손이며 나그네"(시편 39,12) 라고 진술한다. 

 

이스라엘의 천 년 역사에 걸쳐서 기록된 시편은 이런 기도를 통하여 공동체와 개인의 편력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인 자각을 증언하고 있다. 자기 소유의 땅에 살아도 몸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 25,23 참조)는 사실이 희망의 징표로 변하는 것은 바로 시온을 향한 신앙 순례를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 "주님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 순례의 길을 떠날 적에 주님께 힘을 얻는 이는 복되도다"(시편 84,4-5).

 

5) 예언자들은 좌절과 불신앙에 흔들리기 일쑤인 하느님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메시아의 순례를 가르쳐준다. 메시아의 순례는 지상의 모든 민족들이 평화와 희망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잡고 있는 시온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리라는 종말론적 지평으로 열려있다(이사 2,2-4; 미가 4,1-4; 즈가 8,20-23 참조). 

 

하느님의 백성은 이집트 탈출을 다시 체험하며 성령께서 그들의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불어넣어 주시도록 해야 할 것이다(에제 36,26-27 참조). 메시아의 약속을 완성하기 위한 여정에서 이미 이 순간에도 모든 인류는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에제 34,11-16)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거저 먹고 마시도록(이사 55,1-2 참조) 초대받고 있다. 

 

 

3. 그리스도의 순례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 진리, 생명"(요한 14,6)이신 분으로 인류 역사의 한 복판에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애초부터 인류와 당신 백성의 길을 함께 걸으시며 여러 방법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다([인간의 구원자] 18항 참조).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가 인간의 길을 걸으시고자 "사람"(요한 1,2.14)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다. 강생을 통하여 "당신 자신에 관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이 당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위격으로 오신 분"([제삼천년기] 6항)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를 주님께 봉헌하러 시온의 성전으로 올라간다(루가 2,22). 소년 예수는 부모와 함께 자기 아버지 집으로 간다(루가 2,49). 고향 길을 따라 펼쳐졌던 예수님의 공생활은 점차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순례의 형태를 띤다. 특히 루가복음 사가는 이를 십자가만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향한 긴 여정으로 묘사한다(루가 9,51).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모세와 엘리야와 사도들에게 임박한 파스카의 '탈출'을 보여주고 있다(루가 9,31). 다른 복음 사가들도 제자가 따라 걸어야 할 본보기인 이 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루가는 여기서 "매일"(마태 16,24; 루가 9,23 참조)이란 말을 강조한다. 마르코는 해골산의 십자가로 가는 여정을 기록하면서 이동을 나타내는 동사와 단어들을 사용하고 "길"(마르 8,27)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2)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해골산이라는 언덕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지상 순례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 무한의 영역, 죽음 저편의 하느님의 신비로 이어진다. 산에 올라 승천하심으로써 그분의 순례는 마지막 단계에 이른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사도 1,11) 하늘로 올라가시어, 당신 아버지 집에 가셔서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셨다. 그러기에 그분께서 계시는 곳에 우리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요한 14,2-3).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오순절의 성령께 활력을 받아 세상 사람들 속으로, 세계 모든 나라 속으로 들어간다(사도 2,9-11). 복음의 사도와 전령들은 제국의 길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간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그들에게 성서를 설명해 주시고 성찬의 빵을 떼어주신다(루가 24,13-35). 이 세상의 민족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나선다. 그들은 영적으로 동방 박사의 여정을 따르며(마태 2,1-12)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완성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마태 8,11). 

 

3) 그러나 세상의 길을 따라 걷는 순례의 최종 목적지는 세계 지도에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지는 우리의 시야 저 너머에 있다. 사실 사람들과 함께 걸으시며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어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길'은 그분께서 걸으셨던 길이며 바로 그 길을 따라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걸으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탁월한 "길"(사도 2,28; 16,17)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힘입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르치며(마태 28,19-20)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갈라 5,16) 정의와 사랑의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요한의 묵시록이 노래하는 천상 예루살렘에 도달한다. 이 길, 삶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부푼 기대와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묵시 22,17). 그러므로 우리의 순례는 초월적인 목적을 지닌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외국인이며 나그네"(에페 2,19)이지만 한편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운명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4. 제삼천년기를 향한 순례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2000년의 희년을 위한 더 직접적인 준비를 시작했던 하나의 섭리적 사건이었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 이 공의회는 이전의 다른 공의회들과 비슷하면서도 대단히 다른 공의회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의 신비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하여 열린 공의회였다([제삼천년기] 18항). 이 공의회는 모든 교회 공동체의 위대한 공동 순례라는 상징적인 틀 안에서 거행되었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언어 자체가 - 영적, 선교적 여정인 교회의 체험 안에서 - 전인류와 함께하는 여행의 동반자로 상징하였다. 그것은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더 충실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어떻게 쇄신해야 하는가."(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 1962. 10. 20.)를 묻는 문제였다. 따라서 공의회 시작부터 '순례자'인 하느님의 교회가 두드러진 모습으로 드러났다(교황 요한 23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회 연설, 1962. 10. 11.).

 

교회는 "민족들 가운데 세워진 깃발(이사 5,26)로서 진리와 생명을 향한 행진의 방향을 모든 이에게 제시하였다"(교황 바오로 6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회기 폐회 연설). 국가들과의 만남을 상징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국제 연합 방문은 '공들인 순례의 마무리'로 정의되었다. 공의회 자체는 '영적 진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공의회 교부들은 사려 깊은 남녀들을 "빛을 향한 여정의 순례자들"(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메시지, 1965. 12. 8.)로서 맞아들였다. 

 

3) 모든 교회를 "현세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순례 도중에 있는 것"(전례헌장, 2항)으로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공의회 문헌을 통해서였다. 거듭 언급하고 있는 순례자라는 교회의 본질(교회헌장, 7-9항 참조)은 삼위일체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 원천은 성부께서 파견하신 그리스도의 사명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께 나아가며 그분을 통해 산다. 우리의 여정은 우리를 그분께 인도해 준다(교회헌장, 3항).

 

성령께서는 우리의 갈 길을 이끌어주시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하신다(선교교령, 5항). 전례의 핵심을 이루는 성찬례와 부활(전례헌장, 7항)은 그 본질상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서 시작하고(출애 12,1-14) 끝맺는(여호 5,10-12) 계약과 순례의 잔치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4) 순례자인 교회는 자연적으로 선교사가 된다(선교교령, 2항; 교회헌장, 17항).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는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은 특히 '간다'는 말에 강조점을 둔다. '떠나간다는 것'은 세상으로 열려있는 복음화의 필수적인 방법이다. 이 여정의 노자(路資)와 보화는 하느님의 말씀(계시헌장, 7항)과 성찬례(사목헌장, 38항)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류의 행보를 그 업적과 빗나감을 들어 종합하고, 교회를 지상의 역사를 넘어 초월적인 목적지를 가리키는 인류 가족의 여행 동반자로 제시한다. 그리하여 역사 안에서 순례와 현실 참여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인류도 적극적인 대화를 통하여 교회에 협조하도록 요청받고 있다(사목헌장, 44항).

 

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상의 순례자로서 지난 20년 간 탁월한 복음 전파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사도적 순방과 교도권을 통하여 임박한 제삼천년기를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며 전체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지역 교회를 순례지로 삼는 교황의 사목 여행은 "평화와 연대의 순례"(1997. 4. 9. 사라예보 사목 방문 때 언급)이다. 오늘날 역사적인 교회 순례의 중요한 목적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하늘 아래 나아가는 2000년 대희년이다. 이는 공간적인 것이라기보다 내면적이고 생명을 주는 여정으로서 성서에 나타난 희년의 훌륭한 가치들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어야 하겠다(레위 25장 참조).

 

 

5. 관광 사목의 방향

 

관광객, 유랑민, 해상과 항공 여행객, 선원과 승무원들의 사목, 해양 사도직, 항공 사도직, 도로 사도직 등 관광 사목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말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속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집단들 사이에도 엄연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의 방안을 간단히 요약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것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다양성이야말로 이들 현상의 공통 분모라고 해도 될 것이다. 또한 관광은 본질상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면서도 계속 진보하고 있는 현상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현실에도 교회의 가르침과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결의한 [주교들의 교회 사목직에 관한 교령] 18항 "정상적인 본당 사제의 사목적 봉사를 넉넉히 받을 수 없거나 아주 받지 못할 처지에 있는 교우들을 주교들은 특별히 돌보아 줄 것이다."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의 유동 인구 증대 현상이 지니고 있는 주요한 사목적 측면을 꿰뚫어 보고 이 분야의 사목 활동을 강화할 방도를 찾아 더욱더 효과적이고 적절한 사목적 배려가 이루어지도록 분발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으뜸 가는 의무는 복음 선포에 투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곧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분명히 선포함으로써 끊임없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 교회의 특별하고도 첫째 가는 의무([현대의 복음 선교] 21-22항)라고 믿기 때문이다.

 

성령 강림 날 사도 베드로의 강론 이래로 줄곧 교회의 역사는 이 복음 선포의 역사로 점철되고 일관되어 왔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람들의 유동 현상이 새로운 교회들의 탄생과 성장에 결정적이거나 적어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여기에서 제한된 지면 관계로 한국 교회가 수행해야 할 관광 사목의 분명한 방향과 실천적 방안을 다 이야기할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하며, 다음 기회에 구체적인 사목 과제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하게 될 활발한 논의의 자리가 마련되리라고 믿는다.

 

 

6. 맺는 말

 

그리스도인의 일생(순례)은 태어나자마자 시간과 공간 속으로 존재의 여행을 시작하는 나그네인 인간(homo viator)의 체험을 상징한다. 이것은 약속의 땅, 곧 구원과 완전한 자유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체험이며, 예루살렘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가는 길을 여신 그리스도의 체험이고, 역사를 통하여 천상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교회의 체험이며, 희망과 충만으로 가는 온 인류의 체험이다.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우리의 이 순례에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찬례가 함께한다. 순례지들은 천상 예루살렘의 눈에 보이는 살아있는 표징이다. 우리가 그 곳에 다다를 때 하느님 나라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우리는 여행복과 순례자의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마침내 우리의 집에 들어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1데살 4,17). 거기서 주님께서는 "심부름하는 사람"(루가 22,27)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르실 것이며 우리와 함께 먹고 우리와 함께 사실 것이다(묵시 3,20).

 

[사목, 1998년 7월호, 정병조(주교회의 이주 사목 위원회 총무,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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