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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3) 창조주 하느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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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33

제3강의 : 창조주 하느님 2(5월 9일 오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오늘 하루를 또 이렇게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혀 주시옵고,

주님께서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깨닫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신부님들 중에서도 보신 영화겠습니다만, 옛날에 <길>이라는 이태리 영화가 있었죠? 앤소니 퀸이 주연을 하는데 영화상에서 앤소니 퀸이 맡은 배역은 쟌파노이고, 또 순진하고 바보스러운 여자인 젤소미나가 있었고, 마르크스라는 동업자가 나옵니다. 그런데 쟌파노가 마르크스와 속이 상해서 다투다가 기물도 부수고 난동을 부립니다. 그래서 경찰에 잡혀서 유치장에 들어갔는데, 세상 물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젤소미나에게는 오직 쟌파노가 자기 삶의 근거라고 할까 의지였는데, 쟌파노가 유치장에 들어가 보이지 않으니까 젤소미나는 마치 삶의 의미가 다 없어진 것처럼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그를 달래 주면서 쟌파노는 그렇게 오래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어들고서 "젤소미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젤소미나가 "무슨 의미?"하고 묻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나도 몰라, 모르지만 의미가 있어야 돼. 이 돌멩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세상 모든 것에도 의미가 없을 수 있어"하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을 해 보게 합니다. '비록 돌멩이와 같은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한 가지 것에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세상 모든 것에도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돌멩이 하나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깊이 생각해 보면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미가 있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결국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온갖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당신을 닮은 존재로서 창조하신 우리 인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신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한 모습으로 창조해 주신 우리 인간, 이러한 우리 인간 존재는 얼마나 크고 깊고 높은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창세기 이야기로서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사랑으로 창조하셨다고 말씀드렸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만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즉 우리 모든 사람을 하나 하나 사랑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쏟으신 하느님의 사랑이나 우리를 지으시며 쏟으신 사랑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나의 탄생에 있어서 하느님의 개입을 간접적인 것만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태어날 '나'를 의식하고 낳아주신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낳아 주실 때 생각하신 것이 있다면 그저 자식 하나를 더 가지고 싶다는 정도였을 것이지 구체적으로 지금과 같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낳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구체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지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나'라는 존재는 참으로 하느님의 창조의 계획과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하느님께서 내가 있기 전에 나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에서 나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성 아오스딩은 "주님 당신은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서 저를 지으셨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가 하느님의 아심과 사랑에서 나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나'라는 존재가 있기도 전에 어떻게 나를 아셨을까 의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먼저 '나'라는 존재가 있고, 그 다음에 하느님께서 나를 보시고 '아, 네가 있구나'하고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나'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아심'에서 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내가 존재하기도 전에 나를 아실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또 그 이치는 그렇게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조각품이 조각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나타나기 전에 이미 조각가의 구상 속에, 마음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최소한 그런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내(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느님께서 이미 하느님의 창조의 뜻 안에, 하느님의 마음에 나(우리)를 담고 계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와 말씀을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1장 4절에서 5절 사이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예례미야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를 뽑으셨고, 또 그를 만방에 당신의 말씀을 전할 예언자로 이미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존재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뽑으시고 택하신 순간부터 이미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루가복음 1장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도 전에 즈가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하였고, 그가 장차 주님의 길을 닦고 그분의 삶을 준비할 것이라고 하면서 미리 그가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도 다 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탄생을 예고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를 아셨고 뽑으셨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목격한 것은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해서 가던 그 길에서였습니다. 그런데 후에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전에 유다교 신자였을 때의 소행은 여러분이 다 들었을 터이지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습니다. 아니 아주 없애 버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그 때 그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기 전에 이미 은총으로 나를 택하셔서 불러 주셨고, 당신의 이름을 이방인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시려고 기꺼이 그 아들을 나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1장 13절-16절).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레미야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나 이런 인물들은 큰 인물들입니다. 큰 인물이니까 그런 것이지, 우리 같이 작고 미약한 존재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페소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1장 3-4절).

 

영원하신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이전에 영원으로부터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고 뽑아 주시고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성모 마리아님'하고 부릅니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께서 천주의 모친이 되신 것처럼 특별히 하느님께로부터 뽑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용적으로 생각해 보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하는 말이나 에페소서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는 말이나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하는 인사가 비록 성모님께 바쳐진 고유한 것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 모든 사람들도 성모님과 마찬가지로 은총을 가득히 입은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내 존재의 근본적인 바탕이 되시고 가장 근원적인 의미의 바탕이십니다. 이 말은 또 하느님이 없이는 나는 결코 존재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는 하느님께 완전히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도 하느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에 갔을 때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면서 살아갑니다"(사도행전 17,28).

 

우리의 존재와 생명, 우리의 모든 것이 이렇게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다는 것, 그분의 아심과 사랑하심에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참으로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에 하느님의 현존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마치 우리가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내 존재의 바탕이시라고 하는 것은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나'라는 존재 바탕에 있는 그 의미만이 아니고 '나'라는 고유한 Persona의 근원이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Persona란 단어가 우리말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단어를 대체로 인격(人格) 또는 인격 주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인격이라고 하면 때로는 도덕적인 의미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말에 이 Persona를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에게 인격 주체 즉 Persona가 있기 때문에 우리 하나 하나가 모두 다른 것입니다. 50억 세계 인구가 똑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가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모두가 다 고유한 Persona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고유한 존재로 지으셨으며, 또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아시고 그와 같은 고유한 의미로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원으로부터 잘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을 지은 사람은 이런 인식에서 그 시편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 갈 때나 누워있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139, 1-3절).

 

이것도 잘못 생각하면 안기부에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나를 감시하고 계신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샅샅이 알고 계신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아신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환히 아신다는 것은 그렇게 구석구석 나를 아시며 그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39편의 7절-10절에서는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하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이 우리를 꼭 붙잡고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합니까? 묵시록에 보면 바로 이렇게 사랑하시는 주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면서 우리가 그분께 마음의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십니다 :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록 3,20).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께 마음을 열어 드릴 때까지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 앞에 서서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더욱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기도합시다.

 

어제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성인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믿고 산다면 그것이 정말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성녀 소화 데레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가 쓴 글에 보면 '나는 교회 안에서 사랑이 되겠다'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사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작고 보잘것없는 자기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고린토 전서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이는 사도가 되고, 어떤 이는 교사가 되고, 어떤 이는 기적을 행하는 은혜를 받고, 어떤 이는 방언의 은혜를 입는데 이 모든 것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끝에 가서 사랑과 만나게 됩니다. 데레사 성녀는 마지막으로 사랑을 발견하고,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나는 교회의 사랑이 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분은 정말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비록 세상 모든 죄를 다 지었다고 할 지라도 나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겠다. 내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하느님의 사랑의 용광로에서는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오로가 말씀한 것처럼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풍부하다는 그 말씀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 말을 하면서 그렇다고 우리가 더욱 죄를 짓자는 그런 말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그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서도 죄에서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하면서 사랑으로 주님과 하루를 지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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