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강론자료

연중 06 주일-가해-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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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1999-02-13 ㅣ No.27

연  중   제  6  주 일  ( 가 해 )

          집회 15,15-20      1고린 2,6-10      마태 5,17-37

     1999. 2.  14.

주제 : 행복의 길 3

오늘은 연중 6주일입니다.

오늘 주님의 날에 성당에 나오신 여러분, 한 주간 행복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 설날도 이틀 남겨 놓은 때에 와 있습니다.  어제나 그제부터 시작된 휴일은 설날을 지나서 하루 더 이어질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 있는 설에 대한 계획은 어떻게 세우셨습니까?  휴일을 지내며 바쁜 일상에서도 삶에 여유를 회복하는 시간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쁜 삶에서 어떤 방법으로 여유를 회복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누릴 행복의 크기도 달라질 것입니다.

 

지난 연중 4 주일부터 읽기 시작한 마태오 복음서,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행복론(幸福論)’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행복의 길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행복이라는 것처럼,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그것만큼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 것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행복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저도, 그렇게 좋은 행복에 가까이 머물고 싶은 생각은 간절합니다.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에게 다가올 행복의 모습은 어떠할까?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것을 보고 느낄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몇 주간에 걸쳐서 생각해 온 것이긴 합니다만, 답은 각자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듯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기준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것에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가 가질 수 있는 차이에 대한 것은 접어두고 오늘 성서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시고자 하시는 행복에 대한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에 이르는 새로운 방법을 설명하십니다. 그 새로운 방법이란,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의 근본정신을 다시 설명하면서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해지고는 싶다고 생각하고 행복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 분이 남기신 말씀에는 소홀하게 생활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했던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머물 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정착의 단계에 가서도 그대로 강조됩니다. 사람의 생활이 안정되고, 방랑과 쫓기는 생활에서 정착단계로 들어섰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시대와 상황은 변했는데도 그 적용방법은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최초에 율법이 주어지던 때를 돌이켜 율법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법을 주실 때의 정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 밝혀주십니다.

 

오늘은 마태오 복음서 5장에서부터 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여러 가지 방법들 가운데서 네 가지를 읽었습니다. 사람이 화를 품고 사는 문제, 간음에 대한 것, 이혼에 대한 문제, 맹세에 대한 문제가 그것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주어질 때의 표현이나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말씀에는 같은 말이 등장하지만, 그 해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석 방법은 광야에서 이리저리 삶의 자리를 옮겨다니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하며 주어졌던 느슨한 것이 아니라, 농경사회 정착이라는 편안한 시대에 알맞을 좀더 엄격한 해석입니다. 분노가 곁들여진 마음으로는 하느님께 봉헌하는 제사는 의미 없다는 것, 행동보다는 생각으로 앞선 남녀의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것, 나만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죄의 길로 이끄는 이혼에 대한 것, 인간이 참으로 겸손해져야 한다는 맹세에 대한 것, 그 어느 것도 소홀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참된 자세를 먼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사람이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하시는 네 가지의 경우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행복으로 다가가고자 합니다. 어렵긴 하지만 누구나 해야 할 일이고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행복을 찾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오늘 1독서 집회서의 말씀은 ’행복을 찾아가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셨다고 합니다.  우리 앞에 물과 불이 있고, 생명과 죽음이 있고, 선과 악이 있는데, 우리가 선택한대로 그것들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이 불행하게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 분’이므로 탓을 하느님께 돌릴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선한 길을 찾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율과 책임을 지닌 인간이 나아가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올바로 갖출 때에 행복은 우리 앞에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들은 흔히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찾고 그것이 잘못된 것일 때에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이라도 편해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첫 번째 독서는 그 원망의 대상이 하느님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으니 그것을 사용하여 올바른 길로 나가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이 과거에 하느님의 뜻을 생각한 집회서 저자의 묵상이었습니다.  자유의지가 좋은 듯하면서도, 올바로 사용해야 할 어려움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짧은 생을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 것인지, 그렇지 못하게 살 것인지 구별은 매순간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선택하며 살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행복의 길을 선택했는데도, 그렇지 못한 결과를 맺었다면, 그 과정을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내가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좋은 결과를 바란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우리 세상에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있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통은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좋은 의미로 바꿔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현실의 삶에서 어떤 것을 택하는 것이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지혜를 얻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지혜는 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따로 준비해 두신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 개인의 욕심과 만족을 위해서 움직이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그 활동범위가 훨씬 더 넓다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하느님의 뜻이 통하는 세상으로 바꾸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한가지 일은 시작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길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쉬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자세만 갖춘다면, 그것들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잠시 마음을 열고 하느님이 마련하시는 행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 청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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