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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 산책21: 애덕의 무한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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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9-26 ㅣ No.72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 산책] (21) 애덕의 무한 증가

 

애덕 실천은 하느님 나라 안내하는 등불

 

 

비록 100% 달성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성덕을 완성하기 위해 완덕의 삶을 추구할 의무가 있음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상대적인 관점에서 완덕을 추구하게 된다는 점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인 완전성의 관점을 꼼꼼히 살펴보면 인간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관점이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정해졌거나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관점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화의 은총과 노력으로 하느님께 다가가야

먼저 인간의 본성 전체가 거룩하게 변하는 ‘본질상 완전성’에서는 하느님께서 성화 은총을 베푸시며 주도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도 하느님의 거룩한 본성을 담아내기 위해 힘닿는 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성화 은총은 인간이 거룩한 본성을 지니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최종 목표인 하느님과의 친밀한 합일을 추구하는 ‘목적상 완전성’도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당연히 의무로 주어지는 측면이 강합니다. 물론 하느님께 자유의지를 선사 받은 인간이 인간의 최종 목표인 하느님을 거부하는 정도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겠으나, 목적상 완전성을 이루기 위한 제2, 제3의 최종 도착 지점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위를 실천해야 하는 ‘작용상 완전성’에서는 인간이 노력하는 측면이 강조됩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덕행을 실천하면서 완덕을 추구하게 되지만, 그중에서도 애덕 실천이 작용상 완전성을 통한 완덕에 다다르는 방법 중에 최고에 해당합니다. 다른 많은 덕행은 인간을 하느님께 간접적으로 인도하거나 하느님 속성을 미약하게 반영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덕행은 인간을 하느님께 직접적으로 인도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덕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완덕에 도달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본질적이며 특징적인 요소라는 점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애덕,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신비체험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라고 강조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덕만이 인간을 하느님께 보다 직접적으로 이끌어 하느님과 온전히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덕(믿음)과 망덕(희망)은 하느님을 향하는 인간의 여정에 여전히 불완전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신덕과 망덕은 인간이 대죄 중에 있어도 작용할 수 있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잘못된 믿음과 하느님께서 바라시지 않는 잘못된 희망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덕(사랑)은 절대로 은총과 분리될 수 없기에 대죄 중에는 작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잘못된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면서 당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당신을 사랑해 주기를 늘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총 속에서 작용하는 애덕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신비체험’인 것입니다.


완덕 향한 삶 속에 애덕 지속적으로 쌓아야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완덕의 삶은 현세에서 한계점을 지니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이 원인이 돼서 무한하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이기에 완덕에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 안에서 애덕을 무한대로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작용상 완전성에서 작용으로서의 애덕 실천이기 때문에, 인간은 오로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육신을 지닌 이 세상에서 애덕을 무한히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죽은 후 천국에 다다랐다고 하더라도 영혼은 더 이상 애덕을 증가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완덕의 삶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하느님 대전에서 송구스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열심히 애덕을 실천해 하느님을 기꺼운 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9월 27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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