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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도원 기행: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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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도원 기행 3]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
이렇게 좋은 여건이지만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를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가장 발목을 잡는 것이 이탈리아의 ‘체류허가증’이다. 학생들은 1년에 한 차례씩 갱신을 해야 하는데, 새 체류허가증을 받으려면 근 1년을 기다려야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체류허가증 없는 체류상태가 된다. 만일 저가항공사(스페인 왕복 비행기표가 만 원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를 이용해 외국에 나가더라도 이탈리아의 체류허가증이 없으면 유럽에서 불법 체류하는 사람으로 몰릴 수 있다. 2007년 성탄 방학에 성 안셀모 수도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빠꼬미오 신부와 함께 헝가리의 판논할마Pannonhalma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마침 두 사람 모두 정식 체류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흔치 않는 시기였고, 부다페스트까지 가는 저렴한 비행기표를 구입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이곳에서 공부한 판논할마 수도원의 수사와의 친분 등 모든 조건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판논할마 수도원은 여러 베네딕도회 연합회 중 하나인 헝가리 연합회의 총아빠스좌 수도원이다. 996년에 왕실에 의해 설립되었고, 당시 왕인 성 스테파노의 후원으로 1001년에 성당이 축성되었다고 하니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수도자들을 프라하에서 초빙하여 수도원을 세웠고, 헝가리의 역사와 거의 함께 한 수도원인 셈이다. 현재 이 수도원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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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경은 모두 헝가리말로 바쳤다. 헝가리어가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뭔가 쉽게 건질 것이 없을까 하는 기대도 했었는데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단지 독일어를 닮은 알파벳을 간신히 읽을 수 있을 뿐이었고, 내용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사 때 그레고리오 성가를 라틴어로 부를 때에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성탄 대축일 전례는 한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모두 생중계되었다. 헝가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인접한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헝가리인들도 청취한다고 했다. 이 수도원의 기도 소리는 힘이 있으면서도 아주 깨끗하였다. 도드라지게 튀어 나오는 소리 없이 투명한 하나의 소리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소리의 배경에는 고딕식의 아담한 성당도 한 몫 했으리라 생각된다. 오랜 역사를 지닌 수도원답게 건물들은 고딕식, 로마네스크식, 신고전주의 등의 여러 건축 양식들이 혼재해 있었다.
시간이 날 때 마다 야코 수사가 수도원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었다. 처음 수도원 식당에 들어갔을 때 마치 왕실에 딸린 식당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벽과 천정을 온통 그림으로 장식해 놓았다. 하지만 그 그림들은 수도자들이 과식하지 않도록 성서의 이야기 중에서 식욕이 떨어질 만한 내용들을 그려놓은 것들이었다. 성탄대축일과 부활대축일은 식당에 전깃불을 켜지 않고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한다고 했다. 수도원의 대축일은 성당의 기도와 식탁에서 느낄 수 있는 법. 오후 내내 주방담당 수사와 아주머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더니 아주 근사하게 상을 차려 놓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지붕 아래에 있는 큰 휴게실에 모든 형제들이 다 모였다. 성탄 트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에 형제들끼리 서로 교환하는 선물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들을 위한 선물도 있었다. 선물을 뜯어보면서, 음료를 마시면서 공동휴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노인 수도자들이 모인 탁자에서 헝가리의 성탄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모든 이가 조용히 그 노래들을 합창하였다. 그러는 동안 아빠스와 수련자가 성탄 트리에 촛불들을 하나씩 켰다. 그렇게 조용히 아기 예수님 탄생을 맞이하였다. 아빠스께서 창문을 열고 밖을 보라고 해서 보니 흰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헝가리에서 맞이하였다.
성탄대축일 미사 후에는 야코 수사가 수도원 도서관을 보여주었다. 40만권의 고서적이 소장되어 있다는 도서관은 내용상으로나, 아름다움으로나 이 수도원의 자랑거리 같았다. 이 밖에도 형제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방이나 잡지실, 수련실 등이 잘 꾸며져 있었다. 안내를 마치고 야코 수사가 자신의 방으로 우리를 초대하였다. 야코 수사는 파리에서 전례학을 공부하였고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성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방에서 보여준 논문이 한 권 있었는데 시몬 베드로 아빠스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자신이 논문을 쓸 때 참고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렇게도 인연은 이어지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아빠스께 인사를 드리는데, 아마 우리가 최초로 방문한 한국인일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 수도원의 김 로마노 수사가 독일에서 생활할 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의 수도자들과 함께 방문했었다고 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특별한 체험이었던 것 같다. 오늘도 성 마르띠노의 언덕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을 이 분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한다.
참고할 만한 누리집 http://www.bences.hu/en/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 http://blasio.tistory.com/search/ 판논할마 (판논할마 수도원의 사진들과 이 수도원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을 수 있다.)
[분도, 2008년 겨울호, 글 · 사진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0 1,132 0 |